69화. 검사
그들 각각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바깥에 있는 성건우와 장목화를 비롯한 이들을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허리가 약간 굽어있다는 것뿐이었다.
성건우를 포함한 이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면서 근처의 장애물 뒤에 몸을 숨겼다. 심지어는 용여홍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어본 덕분인지 몸놀림이 재빨랐다. 그간 받은 훈련의 효과를 제대로 본 것 같았다.
빠르게 흐르던 구름은 달을 다시 가렸다. 거리 끝의 건물들은 재차 짙은 어둠 속에 잠긴 채 어렴풋한 윤곽만을 드러냈다.
잠시 후, 아무런 기습도 일어나지 않자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차으뜸이 먼저 숨어있던 곳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는 거리 중앙으로 돌아가는 대신 암적색 벽돌이 깔린 왼편의 인도로 향했다. 낙엽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가로수 덕분에 고층 빌딩 안에 있는 자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리 끝에 있을지 모를 사수조차 정확히 겨냥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장목화와 용여홍, 백새벽 역시 속속들이 차으뜸의 뒤를 따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피던 성건우는 달빛과 별빛이 점차 미약해지는 것을 보고 숨어있던 곳에서 맹렬히 튀어 나가더니, 몸을 연달아 두 번이나 굴리면서 오수혁의 곁에 이르렀다.
그 후 그는 그 시체를 끌어 등에 메고는 거리 왼편에 자리한 열린 가게 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이 가게에 비스듬히 걸린 채 반 정도 망가진 간판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스낵’이라는 애쉬랜드 문자뿐이었다.
가게 안에는 부연 먼지를 뒤집어쓴 하나하나의 사각형 테이블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성건우는 테이블들이 더럽다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그중 한 테이블 위에 오수혁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목화에게서 배운 응급조치 방법에 따라 상대의 상의를 열어젖힌 뒤 흉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소용없을 것 같은데⋯⋯.”
어느새 뒤따라 들어온 장목화가 응급조치 과정을 끝까지 마친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성건우가 뭐라 대꾸하기 전 습관적으로 지시했다.
“몸수색을 해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차으뜸 역시 열린 문가로 다가와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가 가게 안의 상황을 2초 정도 살피다 말했다.
“필요 없어. 최대한 빨리 목적지로 가자고.”
차으뜸을 돌아본 장목화가 진심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이 유적 사냥꾼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그가 왜 거리에서 잠들어 있었는지를 알아낸다면 우리는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그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거야.
이곳은 확실히 기이해. 괴물들의 위험도도 상상을 초월하지.
거기다 무심자의 수도 그래. 그들은 여태까지 대체 뭘 먹고 살았을까?”
무심자에게는 번식 본능이 있기 때문에 개체의 죽음만으로 종족의 소멸을 바랄 순 없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생명체니,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식량이 필요했다. 농업과 공업의 지지기반을 잃은 폐허 도시 속에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동족, 쥐, 벌레 정도였으며, 그 정도 식량만으로는 이렇게까지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없었다.
생태 환경은 점차 균형을 이루어나가기 마련이었다.
“이 도시에 비축되어 있던 물자가 꽤나 풍족했을 수도 있죠⋯⋯. 무심자에게는 생존 본능이 있으니 자발적으로 그런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테고요.”
백새벽 역시 가게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추측을 제시했다.
비축되어 있던 물자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질되었겠지만, 뇌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는 무심자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지도.”
장목화는 백새벽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 폐허 도시가 구세계에서 어디에 속해있던 곳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폐허에서 발견되었던 것과 같은 식량 창고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무심자가 이렇게 대를 이어 번식해왔다면, 생쌀이나 밀가루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진화했을 수도 있었다.
두 여자의 대화를 듣던 용여홍이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심자도 이렇게나 많고 아무래도 이상한 곳이니 차라리 그냥 철수하면 안 될까?
돌아가는 길에 적당한 물건을 챙겨나가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될 거야!”
말을 하는 그의 눈은 차으뜸에게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차으뜸은 그를 무시한 채 성건우를 재촉할 뿐이었다.
“서둘러.”
그는 오수혁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조사해야 한다는, 그러지 않으면 그들 역시 같은 위험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거라는 장목화의 의견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말을 마친 차으뜸은 몸에 묻은 먼지를 열심히 털어내기 시작했다.
성건우는 손전등을 들어 오수혁을 전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았다. 상대의 몸에서 눈에 띄는 상처를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그 얼굴은 극단적으로 무시무시한 무언가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오수혁은 대머리 사냥꾼 해리스 브라운이 묘사했던 웨이루 역 북쪽에서 기이한 죽음을 맞은 사람들과 매우 비슷해 보였다.
차으뜸의 증언을 바탕으로, 성건우는 그들이 가위말의 습격으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는 기초적인 판단을 내렸다.
다만 그 괴물이 어디에 있는지, 이곳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뒤이어 성건우는 오수혁의 옷을 홀딱 벗겨놓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흔적을 찾아 나섰다.
“손목의 피부가 다른 곳보다 흰 것으로 볼 때 이전까지 시계를 차고 있었지만 어딘가에 떨어뜨린 모양이야⋯⋯. 최근에 주사를 맞은 흔적도 없고⋯⋯ 안타깝게도 이곳에서는 피 검사를 할 수 없으니, 이자가 마취 가스를 흡입했는지 어쨌는지 확인할 수도 없어.”
가까이 다가온 장목화는 성건우를 도와 빠르게 검사를 완료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차으뜸과 백새벽,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가위말과 비슷한 능력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잠들었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정말 가위말의 짓인지, 아니면 다른 괴물의 짓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
차으뜸이 단호하게 말했다.
“가위말의 짓은 아니야.”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혹시 가위말이 어떻게 포효하는지 알고 있어?”
그 소리를 흉내 내려는 듯 입을 벌리던 차으뜸은 아무래도 부끄러운지 결국 시도를 포기했다.
이때 장목화와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 성건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이래?”
그는 부끄러워하는 기색 따위 조금도 보이지 않고, 방금 전 들렸던 가장 무시무시하고 가장 우렁찬 포효를 흉내 내었다.
물론 소리 크기는 적당히 조절했다.
“아냐.”
차으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보아하니 이 폐허 도시 내 가장 무서운 괴물은 가위말이 아닌 모양이군.”
이는 그녀가 방금 전에 했던 질문으로 확인하고자 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장목화가 궁금했던 건 가위말이 큰소리로 포효하면서 그에 대한 호응을 이끄는 괴물이냐는 점이었다.
“그럼 이거?”
성건우는 포기하지 않고 이전에 들어보았던 각종 포효를 연거푸 흉내 내 보았다.
“전부 아냐.”
헬멧을 쓴 차으뜸은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 물었다.
“그냥 말의 소리를 흉내 내면 안 되겠어? 가위말의 포효는 평범한 말이 하는 포효랑 전혀 다르지 않다고.”
성건우는 차으뜸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말을 본 적은 없는데.”
말을 마친 그는 곧장 돌아서서 허리를 굽힌 채 오수혁의 옷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가장 먼저 찾아낸 것은 황동색 배지였다. 배지의 앞면에는 이목구비가 흐릿한 사람 얼굴과 칼 한 자루, 그리고 창 한 자루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으며, 뒷면에는 작은 칩이 박혀 있었다.
이미 비슷한 물건을 본 적이 있는 성건우는 이것이 사냥꾼 길드의 배지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이에 그는 배지를 장목화에게 건넸다.
장목화는 칩의 내용을 읽는 대신 그것을 그냥 거둬 넣었다.
오수혁이 이전에 어떤 임무를 완수했는지와 이번 탐색을 진행하는 와중 겪은 일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건우가 두 번째로 찾아낸 물건은 파란색과 흰색 체크무늬 손수건이었다.
이 손수건은 상당히 낡아 보였으며 표면에는 보풀도 일어나 있었지만 아주 정갈하게 개켜져 있었다.
손수건을 펼쳐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성건우는 그것을 원상태로 접은 뒤 오수혁의 가슴팍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다음으로 발견된 것은 은박지에 싸인 초콜릿 반 조각이었다.
녹았다가 다시 굳은 흔적은 또렷했지만, 이로 베어 문 자국은 없었다.
성건우가 그 초콜릿을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살피려 한 그때, 벡새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먹고 싶을 때마다 핥아먹거나 입에 넣고 잠깐 빨았을 거야.”
백새벽의 목소리는 아주 당연한 일을 설명하는 양 덤덤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성건우가 물었다.
“가질래?”
“이 폐허 도시에서는 필요 없어.”
백새벽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물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다른 이들에게 초콜릿을 권하는 대신 계속해서 오수혁의 옷을 뒤졌다.
네 번째로 발견된 물건은 마찬가지로 정갈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이었다.
종이 위에 적힌 글자도 상당히 가지런했다.
「여향에게 소고기 통조림 하나 빌림.
강하에게 압축 비스킷 큰 봉지 하나에 맞먹는 두 차례의 보수 빌림.
절름발이 장씨에게 기름 반 그릇 빌림.
올랑그에게 권총 한 자루와 총알 열 발 빌림.
광수에게 고기 한 끼 빌림.
여향에게 꽃 한 송이 빌림.」
내용을 빠르게 확인한 뒤 종이를 다시 접은 성건우가 그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설마 오수혁 대신 그걸 갚을 생각은 아니지?”
장목화가 살짝 놀란 듯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건우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건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만약 이자의 동료를 만나면 이 종이와 배지를 돌려주려고요.”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천천히 끄덕일 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성건우가 다섯 번째로 찾아낸 것은 오수혁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열두 개의 동전이었다.
그 무늬와 형태로 봤을 때 구세계의 것인 듯했다.
“구세계의 동전도 아직 쓸모가 있나?”
그것을 본 용여홍이 의문을 표했다.
“있어. 하지만 액면가를 따지는 대신 어떤 금속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중량은 얼마나 되는지를 따지지.”
백새벽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열두 개의 동전 중 일곱 개는 은백색이었고, 나머지 다섯 개는 금색이었다. 성건우는 그것들을 잠시 살피다 카무플라주 배낭의 작은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제 오수혁에게 옷과 바지, 신발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그의 검은색 권총뿐이었다.
“우베이7, 아직 다섯 발의 총알이 들어있네.”
성건우는 그 상태를 대충 확인한 뒤 총을 벨트에 찼다.
이 총에 들어가는 총알은 7.62밀리미터로, 그들이 출발할 때 준비한 것과는 달랐다.
그들과 처음 만났을 때 오수혁이 등에 메고 있던 자동 소총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수색을 마친 성건우는 벗겨놓았던 오수혁의 옷을 다시 입혔다.
“가자.”
별다른 단서가 나타나지 않자 차으뜸은 성급하게 재촉했다.
장목화를 비롯한 이들은 반대하지 않고 그를 따라 거리로 나갔다.
맨 마지막으로 나선 성건우는 고개를 들어 뭔가를 바라보다가, 돌연 폴짝 뛰어오르더니 금속으로 만들어진 셔터를 내렸다.
콰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이 가게의 셔터는 완전히 닫혔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무심자들은 문을 열 수 있어. 때가 되면 저자의 시체는 그들의 먹이가 될 거라고.”
뱉어내듯 중얼거리던 차으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
총을 쥔 채 대열의 꽁무니에 붙은 성건우는 더 이상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깊은 어둠 속의 어딘가를 향해 가볍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