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자정
성건우는 길고 흰 머리카락을 집어든 채 재빨리 거실로 돌아갔다.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그러고는 차으뜸과 장목화를 비롯한 이들에게 그것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도록 손전등을 돌려 자신의 손을 비추기도 했다.
주황색 빛에 비친 성건우의 얼굴은 매우 음침했다. 이에 화들짝 놀란 용여홍이 하마터면 그에게 총을 쏠 뻔했을 정도였다.
“내 손 좀 봐.”
성건우는 용여홍의 그런 반응을 예견했기라도 한 듯 덧붙였다.
그러자 용여홍이 느릿하게 숨을 토해내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황색 빛기둥 속, 부유하는 먼지 사이로 흰색 머리카락 한 올이 가볍게 나풀거렸다.
“어디에서 찾았어?”
장목화가 물었다.
성건우는 액정 화면이 걸린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침실의 베개 위에서요.”
“한 가닥뿐이었나?”
장목화가 캐물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 머리카락이 동족을 집어삼키면서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요.”
성건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요즘 기본 교육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치냐?”
장목화는 다양한 가능성을 고민하는 중인 듯 대충 대꾸했다.
얌전히 듣고 있던 백새벽이 목에 둘러놓은 낡은 스카프를 당기며 입을 열었다.
“구세계 파괴 당시에 남은 걸까요?”
머리카락은 그런 환경 속에서도 쉽게 썩어 없어지지 않았다.
“그럼 한 가닥만 남아 있지는 않았겠지.”
장목화는 자신의 의혹을 드러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기초적인 판단을 내렸잖아. 이 도시는 일정 기간 누군가에 의해 어느 정도 유지되었어. 이 집 안의 상황들이 그것을 증명하지. 방금 전 식당과 주방에서 쥐가 활동한 흔적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갉아먹은 흔적과 긁힌 흔적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찾아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야.”
“어째 들으면 들을수록 무서워지는데요.”
용여홍이 못 참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진즉에 폐허가 된 도시가 정기적으로 쓰레기를 치우며 스스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이 이야기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나온 귀신 이야기보다 더 무시무시했다.
“쥐는 이곳에서 활동하는 무심자에 의해 잡아먹혔을지도 몰라요. 그들에게도 식량은 필요하니까요.”
백새벽이 자신의 추측을 내놓았다.
장목화는 음, 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그럴지도. 하지만 무심자가 쥐가 싼 똥까지 치웠을까?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생존 본능밖에 없잖아.”
“불가능할 건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노래도 부를 수 있으니까요.”
성건우는 손에 쥐고 있던 손전등을 끄고 진지하게 반박했다.
“⋯⋯.”
장목화가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 포효를 노래라고 하는 거야, 지금? 그래,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정리 본능이 있다고 치자. 물론 내가 다른 곳에서 목격한 무심자에게서 그런 본능을 확인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치자고. 그렇다면 그들은 수시로 도시를 정리하고 청소해야 해. 그들에게는 사고력이랄 게 없으며 오직 본능에 따른 행동만 할 뿐이니까.”
하지만 거리와 빌딩, 그리고 집 안의 상태로 봤을 때 이곳은 꽤 오랫동안 손이 닿지 않은 듯 보였다.
성건우는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인간에게는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팀장님은 보통 며칠에 한 번씩 청소를 하십니까?”
말문이 막힌 장목화가 차으뜸을 바라보았다.
“난 황야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만 정리에 신경을 덜 쓰는 편이야. 곁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지.
하지만 회사에서 스스로 밥을 해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매일 청소를 해. 어떨 때는 한 번 이상도 하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라면 사흘에 한 번 정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은 대청소도 한다고.”
그들이 토론을 시작했을 때부터 내내 아무런 말도 않고 있던 차으뜸이 불쑥 끼어들었다.
“너희는 반고 바이오 출신이야? 아니면 연합 공업? 오렌지 컴퍼니? 퓨쳐인텔리?”
“반고 바이오야.”
장목화가 솔직하게 답했다.
차으뜸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은색 소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머리카락에 대해 토론할 필요는 없어. 별일 아니니까.
밥 먹고 쉬면서 자정이 되기를 기다리자고.”
“좋아.”
성건우를 포함한 구조팀원들은 토론을 포기하고 각자의 위치에 앉아, 물 주머니 안에 든 물과 함께 압축 비스킷과 에너지 바 등의 식량을 먹었다.
그렇게 배를 불린 후 자리에서 일어난 장목화가 식당의 창문 앞으로 다가가 아래쪽의 잡초가 가득한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직접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려 했던 그녀는 차으뜸을 힐긋 살핀 뒤 약간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난 내려가서 볼일을 좀 봐야겠어.”
“여기 있는 화장실에서 해결하셔도 됩니다.”
성건우는 방금 전 자신이 발견한 방법을 동료에게 공유하고 싶다는 듯 적극적으로 나섰다.
“괜찮아⋯⋯ 다른 사람의 휴식에 방해가 될지도 몰라.”
장목화는 그의 호의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때,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차으뜸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구석에 있는 601호를 써도 돼.”
목화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기이한 곳에서는 신중하게 구는 게 좋아.
지독한 냄새를 숨기지 못한다면 뭔가가 근처에 왔을 때 불필요한 문제를 불러일으킬지도 몰라.”
“괜찮아.”
차으뜸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이에 반박하고 싶지 않았던 장목화는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백새벽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제가 같이 갈게요.”
“그래, 서로를 위해 경계해줄 수 있을 테니까.”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가기 싫다고 했어도 끌고 가려고 했어.”
용여홍은 허벅지 사이에 손을 끼운 채 성건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도 이따가 같이 갈래?”
“그래.”
성건우는 약간 후회스럽다는 듯 답했다.
“차으뜸이 괜찮다고 했으니 안심해도 될 거야. 예컨대 난간 앞에 서서 창문을 열고 밖을 향해 조준⋯⋯.”
“그만!”
용여홍은 날뛰는 성건우의 생각, 혹은 그가 평소 품어온 환상을 저지했다.
* * *
잠시 후, 각자 소파의 한쪽을 차지한 용여홍과 백새벽은 몸을 웅크리며 휴식을 취할 준비를 했다. 여전히 그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차으뜸은 그저 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잠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통창 앞 난간을 마주한 채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성건우는 터널 쪽을 바라보면서 어둠에 잠긴 도시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장목화는 유탄 발사기 대신 아이스모스 권총을 쥔 채 거실을 이리저리 오가며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 무렵, 공포에 찬 누군가의 절규가 도시 안 어딘가에 울려 퍼졌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밤, 죽음의 숲 같은 도시 폐허 속 절규는 멀리까지 퍼져나가며 아직 잠들지 못한 용여홍을 전전긍긍하게 했다.
뒤이어 요란한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탕탕탕탕탕!
폭죽과 같은 일련의 굉음을 끝으로 소란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성건우는 이내 미약한 별빛 아래 부근의 골목길 안에서 튀어나오는 하나의 인영을 발견했다.
등이 굽은 그 인영의 움직임은 인간이 아니라 유인원에 더 가까워 보였다.
지저분한 옷차림에 몇 장의 천을 둘러멘 그는 성건우를 비롯한 이들이 자리한 빌딩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그는 황갈색 낙엽이 가득 쌓인 거리를 따라 그 거리의 반대편 끝으로 돌진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능숙하게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기도 했고, 때로는 가볍게 폴짝 뛰어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성건우는 유전자 개량자인 데다가 체계적인 훈련까지 받은 자신이라고 해도 그와 같은 동작을 해낼 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전자 개량의 주요 목표는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하늘을 뒤덮은 구름층이 살짝 이동하며 달빛을 드러내었다. 덕분에 성건우는 그 인영의 생김새를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수컷으로 보이는 상대의 검은 머리카락은 덥수룩하면서도 지저분했지만,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지는 않았다.
순간 성건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홱 튼 그가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건우의 시야 속에 상대의 멍한 얼굴이 비쳤다.
무심자.
상대는 장년의 무심자였다.
성건우는 시선을 피하는 대신 눈을 뜬 채 무심자와 한참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상대를 마주 보았다.
마침내 먼저 시선을 거둔 무심자는 계속해서 멀리 떨어진 고층 빌딩의 그늘을 타고 사라졌다.
성건우는 결정적인 승리라도 쟁취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던 그때, 그의 시야에 하나의 인영이 더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등이 굽어있었지만, 이 인영은 방금 전의 그 무심자보다 훨씬 느렸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성건우는 주름이 가득하고 비쩍 마른 얼굴과 어지럽게 엉킨 긴 백발을 볼 수 있었다.
휙 몸을 날린 이 인영은 왼쪽의 골목길로 파고들었다. 그곳은 건우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그 후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성건우는 몇 명의 무심자를 더 볼 수 있었다. 장목화 역시 이를 눈치채고 이곳에 존재하는 무심자들의 수에 의혹을 표했다.
시간에 맞춰 깨어난 백새벽과 용여홍은 성건우와 장목화가 맡고 있던 임무를 이어받았다.
그러다 성건우가 용여홍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차으뜸은 이미 의자를 떠나 통창 앞에 서 있었다.
“곧 자정이야.”
차으뜸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어둠에 휩싸인 도시 폐허로부터 시선을 거둔 그는 냉랭한 눈빛을 유지하는 한편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내가 외골격 장치를 입을 수 있도록 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목화와 백새벽의 도움 아래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그는 시스템을 활성화했다.
검은색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채 은색 소총을 쥔 차으뜸이 통창 앞으로 돌아가 몇 개 구역 너머에 자리한 한 채의 빌딩을 가리켰다.
“우리 목적지는 저기야.”
성건우를 비롯한 이들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건물은 주위에 있는 다른 건물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형 정원을 주위에 끼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둠에 잠식된 도시 폐허 가운데 얌전히 서 있는 그 건물은 일찍이 그 수명을 다한 듯 한 점의 빛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몇 초 후 돌아선 차으뜸은 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출발!”
* * *
남은 식량을 챙긴 다섯 명의 일행은 605호를 떠나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차로 가?”
장목화가 길가에 세워진 지프차를 바라보며 물었다.
차 지붕 위에 얹힌 검은 늪 철갑뱀의 가죽은 상당히 눈에 띄어서, 누구도 태양열 충전기에 신경조차 쓰지 못할 정도였다.
“그건 너무 시끄러워.”
차으뜸이 고개를 저었다.
장목화는 이 차는 전기차이기 때문에 모의 주행음을 끄기만 하면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차으뜸은 한 마디만 남긴 채 돌연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따라와!”
장목화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과 함께 각자의 무기를 들고 출구로 달렸다.
이때 비교적 짙은 구름에 가려진 하늘에서는 드문드문 자리한 별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달은 가끔씩만 그 얼굴을 드러내며 옅은 빛을 뿌려주었다.
이 폐허 도시의 메인 컬러는 바로 검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