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65화 (65/649)

65화. 밤

백새벽이 군용 외골격 장치를 벗는 장목화를 돕는 동안, 성건우와 용여홍은 눈앞의 장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액정 화면이었다. 495층 활동 센터에 있는 스크린보다 적어도 두 배는 큰 듯한 그 액정 화면은 오른쪽 전방 벽에 걸려 있어 상당히 눈에 띄었다.

“대단한 물건인데⋯⋯.”

용여홍은 한 번 만져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얼굴로 감탄했다.

이 화면을 회사에 주워갈 수, 아니, 옮겨갈 수 있다면 이미 망가져 버린 물건이라도 꽤 많은 공헌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납해야 하는 물건인 만큼 본인이 쓸 수는 없겠지만, 회사에서는 그에 받는 포상을 해줄 것이었다.

맨 우측에 있는 창문 앞으로 다가간 차으뜸이 용여홍을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너희들이 봤던 여러 빌딩 안, 대부분의 유리창 뒤쪽에는 전부 이런 모니터가 달려있어.”

아까 전에 봤던 하나하나의 높은 빌딩들을 떠올려보던 용여홍이 저도 모르게 뱉어내듯 말했다.

“그렇게나 많다고?”

뒤이어 그는 약간 의아하다는 듯 차으뜸에게 물었다.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거야?”

곁에 있던 성건우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저 말은, 쓰레기를 주우려고 할 때도 더 가치 있는 쓰레기를 주우라는 거지!”

“이곳은 부광(富鑛)이야.”

백새벽은 황야유랑자 사이에서 쓰는 은어까지 언급하며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부광은 각종 자원이 풍부해서 당분간은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할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구역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매번 휴대할 수 있는 물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탐색을 헛되이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어떤 물건을 먼저 가져갈지를 세심하게 선택해야 했다.

금광에 들어갔다면 가방에 돌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양의 황금을 담아 나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곰곰이 고민해보던 용여홍은 성건우의 말에 깊이 동감하며 계속해서 주위의 물건들을 살폈다.

표면 곳곳에 오염된 흔적이 남은 액정 화면 아래쪽으로는 옆으로 길고 키가 작은 나무장이 하나 자리해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나무장이 원래는 유백색이었음을 알아보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무장 위에는 비취색 물컵 하나와 회로가 꽂힌, 손바닥만 한 전자 설비 두 대, 그리고 투명하고 목이 긴 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병에는 3분의 1 정도의 더러운 물이 남아 있었으며, 그 물에는 검은색 부스러기들이 둥둥 떠 있었다.

이는 장목화가 이전에 했던 판단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었다.

만약 이 도시가 구세계 파괴 이후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곳이었다면, 병 안의 물은 진즉에 다 증발해버렸을 것이다. 창문은 굳게 닫혀있고 바닥도 바싹 말라 있으니, 빗물이 안으로 들어와 병에 담겼을 리는 없었다.

액정 화면 맞은편에는 나무장과 같은 색, 같은 스타일의 티테이블이 자리해 있었다. 그 위에 놓인 것은 더러운 물컵들과 짙은 검은색 각에 담긴 휴지 하나였다.

티테이블 왼편으로는 구멍이 잔뜩 뚫린 쓰레기통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은 짙은 파란색의 반투명한 비닐로 씌워져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아주 더러워서 원래 색이 연보라색이었는지 짙은 회색이었는지 알 수 없는 천 소파가 놓여 있었다.

또한 티테이블과 나무장 사이에는 빛바랜 접이식 앉은뱅이 의자가 있었는데, 분홍색을 띤 표면과 테두리, 그리고 디자인 덕분에 전체적으로 캐릭터 형식의 돼지처럼 보였다. 차으뜸은 티테이블 오른쪽의 비교적 넓게 트인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쪽으로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목제 난간이 보였다. 난간 바깥쪽으로는 몇 개의 대형 유리가 세워진 채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성건우와 용여홍이 배웠던 교과서에 그런 창문을 뭐라고 부르는지 나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 차으뜸이 그것을 통창이라고 부른 것을 들은 그들은 눈앞의 유리창과 그 명칭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통창 양옆으로 한쪽에는 석제 테라스 위에 놓인 개수대가 자리했고, 다른 한쪽에는 적갈색 질그릇 여러 개가 쌓여있었다.

질그릇 안에 채워진 황갈색 흙은 약간 말라서 갈라져 있었다. 그 안에 심겼을 각종 식물은 일찍이 사라져 깊은 곳에 묻힌 듯 아무런 흔적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한편 성건우와 용여홍의 전방으로는 복도가 자리해 있었고, 그 복도에는 여러 개의 방이 딸려 있었다.

또한 그들의 왼쪽으로는 크지 않은 원탁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꽃 몇 송이가 수놓아진 심플한 식탁보가 깔려 있었는데, 원래는 흰색이었겠지만 지금은 거의 짙은 회색에 가까웠다.

이 원탁 주위에 놓인 평범한 등받이 의자 네 개는 유백색으로 얼룩덜룩하게 칠해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미 또렷하게 금이 가 있었으며, 균열 안쪽으로 보이는 나무는 심각하게 썩은 상태였다.

원탁 맞은편에 자리한 문 근처에는 반개방형 방이 하나 자리했다. 건우는 그곳에서 자신의 집에 있는 것과 같은 전기밥솥을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외부의 칠이 떨어져 나간 밥솥은 군데군데가 녹슬어 얼룩덜룩했다.

전기밥솥 옆쪽으로는 렌지대로 보이는 두 개의 금속 물체가 있었고, 그 위에는 크고 작은 솥이 하나씩 얹혀 있었다. 큰 것은 메탈블랙 색상이었으며 작은 것은 외부는 분홍색, 내부는 회백색이었다.

뿐만 아니라 건우는 수전과 싱크대, 그리고 각종 수납장도 볼 수 있었다. 이에 그는 상식에 근거하여 이곳이 주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치스럽네⋯⋯.”

그의 곁에 있던 용여홍도 그곳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성건우는 그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그들이 아는 바에 따르면 주방이 딸린 집은 원로 직원들이나 분배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이렇게나 큰 주방이 딸린 집은 생활 구역의 관리층이나 누릴 수 있었다.

그 사이 걸음을 옮긴 성건우는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차으뜸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어느새 문밖으로까지 물러난 성건우가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605⋯⋯.”

그가 읽은 것은 문패 번호였다.

“뭐해?”

용여홍이 물었다.

“각 층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고, 각 라인은 2, 30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건물은 몇 개의 라인으로 나뉘어 있지⋯⋯”

성건우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큰 방이 수백 개나 되는 거야.”

차으뜸은 성건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덤덤하게 말했다.

“들어와서 문 닫아.”

성건우가 그의 말에 따라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부드럽게 문을 닫자, 용여홍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입을 열었다.

“이 근처에만 일고여덟 개의 빌딩이 있고, 주위의 빌딩은 더욱 많아.

이게 바로 구세계인가?”

성건우는 그에 대해서는 무시한 채 쪼그려 앉더니 입구 오른쪽의 나무장을 열었다.

케케묵은 냄새를 짙게 풍기는 장 안쪽에는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얌전히 놓여있었다.

“닫아!”

차으뜸이 코를 움켜쥐며 말했다.

이에 성건우는 안쪽의 신발들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한 채 쾅 소리가 나도록 나무장의 문을 닫았다.

용여홍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사치스러워!”

‘대체 누가 살던 집이길래 신발이 이렇게나 많은 거야?’

해가 이미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은 이때, 하늘 역시 회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성건우를 비롯한 이들은 유리 통창 너머로 더욱 어두워진 도시를 바라보았다. 외로운 섬처럼 보이는 여러 고층 빌딩들은 점점 맹렬하게 밀려드는 짙은 색의 밀물에 잠식되어갔다.

이에 따라 그들의 마음도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곧 탕,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목화를 비롯한 이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동시에 판단을 내렸다.

이건 총성이었다.

누군가가 총을 쏜 것이다.

그들 중 누가 입을 열기도 전, 주위에서 거친 포효가 울려 퍼졌다.

빠른 속도로 전파된 포효에 사방팔방에서도 호응하는 듯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거친 포효는 끝을 모르고 이어지며 방금 전 총성이 울린 곳으로 가까워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적막했던 도시는 순간 요란해졌다.

1, 2분이 지난 후에야 포효는 마침내 잠잠해졌으며 온 도시는 다시 극단적으로 고요해졌다.

군용 외골격 장치를 벗어놓았던 장목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심자?”

그녀가 아는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도시 폐허에는 무심자들이 머물러 있거나 돌아다녔다. 구체적인 수는 각 도시의 생태 시스템과 남아 있는 물자의 정도에 따라 정해졌다.

여전히 은색 소총을 멘 채 통창을 마주한 차으뜸은 죽음과 같은 적막에 휩싸인 도시를 바라보며 답했다.

“맞아.”

“다른 길을 통해 폐허에 진입한 유적 사냥꾼이 무심자의 기습에 대적하기 위해 총을 쏘면서 연쇄반응을 일으킨 건가?”

장목화는 방금 전의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차으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번에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다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성건우였다.

“이전에 황야에서 들었던 포효도 그들의 것일까요?”

“그럴 리 없어. 이 정도의 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멀리까지 퍼져나가겠어?”

장목화는 모종의 생각에 잠긴 채 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들었던 포효는 당시 그 구역에 있던 무심자들의 것이었을 거야. 그건 맨 처음의, 가장 과장된 포효에 대한 호응이었겠지. 그리고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포효는 정말 이곳에서 울려 퍼졌던 것일지도⋯⋯.”

“포효에 실린 힘과 무심자들의 호응을 야기했다는 사실로 볼 때 그 괴물은 분명 굉장히 위험한 존재일 거예요!”

용여홍 역시 점점 긴장되는 마음을 안은 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 말에 장목화와 성건우, 백새벽의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 위험한 구역에는 접근하지 말자는 이전의 결정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는 현재 그들의 상황과 완전히 모순되었다.

눈빛을 살짝 떨면서 점차 묵직해진 표정을 드러낸 장목화가 무의식적으로 차으뜸을 바라보았다.

이때, 이미 이쪽을 향해 돌아선 차으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밖에는 없어.

동시에 가장 진귀하고 가장 보호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그 사이 잠시 초점을 잃은 그의 금빛 눈동자는 햇빛을 받은 깊은 호수 같았다.

입술을 살짝 깨물던 장목화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알겠어.”

성건우를 포함한 다른 이들 역시 의견을 나누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시선을 거둔 차으뜸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일단 저녁부터 먹고, 순서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자정이 되기를 기다리자.”

차으뜸의 말을 들은 장목화와 성건우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나⋯⋯.”

“저⋯⋯.”

말을 하려 하는 상대를 보고 또 동시에 입을 다문 두 사람 때문에 순간 이곳에는 기이한 침묵이 맴돌았다.

몇 초 후,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먼저 말해.”

성건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일단 화장실에 가고 싶습니다.”

“⋯⋯다른 생각은 없고?”

장목화는 하마터면 할 말을 잃을 뻔했다.

성건우는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으며 즉답했다.

“그 김에 다른 방들도 순시를 좀 해볼게요.”

“순시라⋯⋯ 순찰이라는 표현이 더 낫지 않겠어?”

습관적으로 반문한 장목화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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