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도시
지고 있는 태양 아래, 마천루의 외벽을 장식한 수천, 수만 장의 유리는 황금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불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번쩍거렸다.
성건우와 용여홍은 그 반사광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사이 지프차의 속도는 빠르게 느릿해졌다. 장목화 역시 그들과 같은 충격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인 경계심 때문에 속도를 늦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해가 점점 저물어가자, 이에 따라 하나하나의 고층 빌딩 표면을 뒤덮은 황금색, 혹은 주황색 빛은 점차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금까지만 해도 눈부시던 건물들은 색이 바랜 오래된 사진처럼 어둠 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온 도시가 점점 어두워졌다.
용여홍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어떠한 말로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사실 눈앞에 있는 건물들보다 더욱 웅장하고 기적 같은 건물을 접해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고 바이오가 자리 잡은 지하 건물은 2천 미터가 넘는 높이를 자랑하는 빌딩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빌딩이 지표면 위에 올라와 있었다면, 재료 부족으로 인해 진즉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 지하 건물 안에서 살아온 데다가 바깥에서 해당 건물을 전체적으로 볼 기회가 없던 용여홍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그 건물의 대단함을 실감하지 못했다.
이에 눈앞에 즐비한 고층 빌딩들은 그에게 지울 수 없을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게 바로 구세계입니까?”
성건우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부드러워져 있었다. 스스로에게 묻는 것 같았다.
“맞아, 교과서에서 구세계 사진 못 봤어?”
운전석에 앉아있던 장목화가 물었다.
군용 외골격 장치의 종합 경보 시스템 덕분에, 듣는 데 약간의 문제가 따르는 그녀도 성건우가 한 말을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사진이 주는 느낌과 현실에서 받는 느낌은 완전히 다르니까요⋯⋯.”
용여홍은 차으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제야 마음을 약간 가라앉힌 그와 건우는 빌딩 근처에 이른 지프차 안에서 더 많은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고층 빌딩 중에는 검은 것도 있었고, 짙은 파란색인 것도 있었으며, 어두운 노란색을 띤 것도, 여러 색이 알록달록 뒤섞인 것도 있었다. 각각의 빌딩은 서로 다 달랐다.
하지만 그 겉면을 장식한 유리와 일반적인 외벽은 모두 부연 먼지가 낀 채 잔뜩 오염되어 있어 지나치게 지저분하거나, 이미 녹슨 채 일부가 파손되어 있기도 했다.
어떤 건물의 틈새에서 자라난 녹색 식물은 완강하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갔고, 각종 새는 마지막 노을 속에서 빌딩 모처의 둥지로 돌아갔다.
길 양옆에 자리한 나무의 무성한 잎 중 반 이상은 이미 낙엽이 되어 바람이 불 때마다 촤르륵 떨어져 내렸고, 바닥에 쌓인 낙엽 일부는 벌써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길가에 붙은 간판 중 더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며, 더러는 입구에 매달려 있었고, 더러는 몇몇 글자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송건우와 용여홍은 그런 간판들로부터 ‘족욕’, ‘미용실’, ‘슈퍼마켓’, ‘튀김’, ‘바비큐’, ‘훠궈’, ‘애견샵’, ‘경찰’ 등의 남은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간판들을 달고 있던 점포는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거나 먼지에 뒤덮여 있었으며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길 위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여러 대의 차들은 운전에 심각한 방해가 되었다. 그 차들의 외곽과 차 유리에는 오염되었다가, 빗물에 씻겼다가, 또 새롭게 굳어진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사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가볍게 부는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 도시는 오래 전에 이미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뭔가 이상해⋯⋯.”
장목화는 전방을 직시하는 한편 외골격 장치의 종합 경보 시스템을 이용해 디테일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백새벽이 뭐가 이상하냐고 묻기도 전, 한 채 한 채의 마천루 사이로 멀찍이 떨어진 곳과 석양을 살피던 차으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곧 밤이 돼.
문제가 없는 안전한 집을 찾아 들어가기 전까지는 최대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아.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목소리를 낮춰야 해.”
뒤이어 왼쪽을 가리킨 그가 덧붙였다.
“저쪽 문으로 들어가.”
그가 가리킨 건 두 대의 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큰 문이었다. 중간에 자리한 초소를 기준으로 한쪽은 입구, 다른 한쪽은 출구로 보였다.
차량의 진입을 막는 데 썼을 금속 철책도 있었지만, 알 수도 없을 만큼 오래 전에 이미 쓰러진 듯한 그 문의 표면 곳곳에는 녹이 슬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 대문을 바라보던 여홍은 문의 형태가 교과서에서 봤던 황갈색 벽돌 패방(牌坊)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패방의 중앙에 걸려 있던 금색 글자는 반 이상 떨어져 나간 터라, 힘겹게나마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두 글자에 불과했다.
“⋯⋯양 ⋯⋯원.”
지프는 빠르게 그 패방을 관통하여 대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고여덟 채의 빌딩으로 둘러싸인 이 구역에는 잡초가 가득 자란 잔디밭도 있었고, 수많은 쓰레기가 둥둥 떠 있는 더러운 연못도 있었으며,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와 열매를 맺은 듯한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도 있었다.
“오른쪽으로 꺾어서 첫 번째 건물.”
차으뜸은 이곳에 아주 익숙한 듯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버려진 차 사이의 협소한 길을 따라 차를 몰던 장목화가 황갈색 외벽으로 된 첫 번째 건물 밖에 차를 세웠다.
“먹을 걸 좀 챙겨서 적당한 방에 들어가자고.”
차으뜸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성건우와 백새벽 역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지프에서 내린 뒤 트렁크에서 한 무더기의 음식을 챙겼다.
한발 늦게 내린 용여홍은 음식을 챙기는 일에 나서지 않고 차으뜸과 장목화의 뒤를 따라 빌딩의 맨 오른쪽 입구로 들어갔다.
* * *
바닥에 깔린 갈색 벽돌 사이사이는 아주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잡초로 가득 차 있었다.
홀을 통과한 뒤 황급히 앞으로 나아간 용여홍은 나란히 자리한 세 대의 실버블랙 색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고는 차으뜸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버튼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빛도 발하지 않았다.
용여홍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전기가 없구나⋯⋯.”
한편 장목화는 굉장히 낡아 보이는 엘리베이터와 녹이라고는 전혀 슬지 않은 버튼을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해⋯⋯.”
그녀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성건우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 바닥 벽돌의 상태와 그 사이에 가득 자라난 잡초로 볼 때, 여긴 수십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 같지가 않았다. 이곳이 버려진 지는 기껏해야 일 년, 혹은 그 정도도 채 되지 않은 듯했다.
“이전에 황야유랑자들이 이곳에서 살았던 것 아닐까요?”
백새벽이 한 가지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판단을 부정했다.
“아니에요. 황야유랑자들은 쓸모없는 것을 유지하려 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이곳은 최근에 새로 발견된 도시 유적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뿐만이 아냐.”
장목화는 아무런 저지도 하지 않는 차으뜸의 모습을 보고 덧붙였다.
“거리에 쌓인 낙엽의 양과 각 건물의 파손 정도는 전부 누군가가 얼마 전까지 이 도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해.”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자신의 추측을 밝혔다.
“어쩌면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이 도시를 유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인공지능 로봇일까요?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인공지능 로봇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용여홍이 말했다.
장목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가능해.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 진정한 인공지능 로봇 기술은 막 대대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어. 그 기술로 만들어진 상품은 비교적 사치스러운 물건으로 여겨졌지. 머신헤븐 같은 곳이 아닌 이상, 인공지능 로봇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는 없었을 거야.
그래, 어쩌면 이곳이 다른 곳보다 특별한 곳일 수도 있지.”
차으뜸은 구조팀의 토론을 가만히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돌아서더니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번에 6층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멈춘 그는 오른쪽 복도로 진입해 가장 안쪽 방에 들어갔다.
짙은 붉은색 방문은 닫혀있기만 했을 뿐, 잠겨 있지는 않았다. 또한 문고리는 칠이 벗겨진 채 녹슬어 있었다.
은색 소총을 메고 연합202 권총을 찬 차으뜸은 문을 통과한 뒤 고개를 돌려, 차례대로 방 안에 들어오는 성건우를 비롯한 일행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으뜸의 얼굴에는 습관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이상하리만치 냉담했다.
“이곳에서 쉬도록 해.
잠을 자는 동안 한 명은 통창을 지키면서 터널의 출구를 감시하고, 다른 한 명은 방을 순찰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상태를 살펴야 해. 이상한 점이 보인다 싶으면 곧장 모두를 깨워야 하니까.”
그 말에 장목화가 호기심을 보였다.
“너도 실제적인 악몽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
그건 대체 어떻게 생겨난 거야?”
“가위말이라는 일종의 특수한 변이 생물 때문이야. 네 꿈이 녀석의 영향을 받은 순간, 그 안에서 죽음을 맞게 되면 현실에서도 죽게 되지.”
차으뜸은 여유롭게 답했다.
“녀석은 나를 무려 1백 킬로미터 넘게 쫓아왔어.”
“왜?”
이전까지 그렇게 끈질긴 괴물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백새벽이 물었다.
차으뜸은 답을 하는 대신 문을 떠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때, 성건우는 차마 숨기지 못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난 그 이유를 알아!
녀석은 저자를 덮치고 싶었던 거야!”
용여홍을 포함한 다른 이들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간을 살짝 구기던 차으뜸이 성건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뭇별 홀에서 뇌나 사고력을 바치고 능력을 얻기라도 한 거냐?
지금이야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기원의 바다에 들어가고 나면 네 증상은 점점 더 심각해질 거다. 뭐, 됐어. 너한테는 그곳에 들어갈 기회조차 없을 테니.”
“넌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네⋯⋯ 정말 대단해.”
차으뜸의 말을 들은 장목화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상대를 칭찬했다.
“넌 대체 어디 출신인 거야?”
몇 초간 고민하던 차으뜸은 걸치고 있던 검은색 트렌치코트의 매무새를 정돈한 뒤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했다.
“그럼 내 소개를 다시 하도록 하지.
제8연구원 특파원, 차으뜸이야.”
“제8연구원⋯⋯.”
장목화가 낮게 상대의 말을 반복했다.
이전까지 그런 조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새벽과 건우, 여홍도 마찬가지였다. 차으뜸을 향한 그들의 눈빛에는 약간의 숭배심이 더해졌다.
신비로운 내력과 강력한 실력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혹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마련이었다.
헬멧을 착용한 장목화는 할 말을 생각하고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제8 연구원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기술을 계승했으며, 구세계와 무슨 관계인지, 어째서 특파원을 거대 늪 깊은 곳에 있는 도시 폐허로 보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묻기도 전 몸을 돌려 오른쪽으로 향하던 차으뜸이 가볍게 한 마디 남겼다.
“외골격 장치는 벗어. 배터리를 아껴야지.”
“그래.”
장목화는 단박에 동의했다.
이는 그녀가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오늘 하루 동안 태양열 충전기로 축적한 에너지는 전부 지프차를 충전하는 데 썼고, 지금은 이미 밤이었다.
그들에게 아직 예비용 고성능 배터리가 하나 남아 있긴 했지만, 이렇게 괴이한 구세계의 도시 안에서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최대한 많은 에너지를 비축해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