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림
성건우가 마지막 문장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이, 장목화는 빠르게 다음 문장을 덧붙였다.
「우리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칩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어. 그렇다는 건⋯⋯.」
그녀는 문장을 끝맺기 전 종이와 펜을 슬쩍 거두더니, 계속해서 턱을 받친 채 차으뜸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거둔 성건우는 한 가지 원인을 추측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모종의 힘이 그의 깊은 생각을 저지하면서 문제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 밝혀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 힘은 그로 하여금 모종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깨지 않기를 바라게끔 했다.
이 힘의 원천은 외부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었다.
현실은 이미 이렇게나 힘든데, 아름다운 꿈속에 빠져있으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쾅!
이때 지프차가 차으뜸의 지휘 아래 흑청색의 덩굴로 뒤덮인 공간을 뚫고 나갔다. 충돌과 마찰을 피할 수는 없었다.
미세하고 붉은 가시덩굴이 유리창을 훑고 지나가면서 적잖은 흔적을 남겼다. 곧 유리에는 가느다란 긁힌 흔적들이 생겨났다.
표면적인 생각만으로 대책을 찾던 성건우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돌아보다가, 어둡고 묵직한 하늘 아래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그는 눈동자의 색을 짙게 변화시키며, 자신을 향해 억지쟁이 능력을 발휘했다.
이 능력이 효과를 낸다면 그는 곧장 억지쟁이가 되어, 이미 존재하는 논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지는 행동을 하게 될 터였다.
예컨대 더는 장목화나 백새벽, 용여홍이 차으뜸을 바라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두 걸음 전진을 위해 한 걸음 후퇴하듯 떠나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고, 사방에 위험이 깔린 이 상황에서 언쟁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런 이상이 발생하면 상황에도 변화가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문제를 드러내며 성건우가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울 것이었다.
몇 초 후, 성건우의 눈동자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두 손과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피던 그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억지쟁이는 추리 광대와 달리,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해 그리 간단하게 영향을 미칠 순 없는 모양이었다.
시선을 거둔 성건우는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편 백새벽이 무시무시한 덩굴로 뒤덮인 늪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는 차으뜸은 성건우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성건우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어둡고 묵직한 환경 속에서 씩 웃는 그는 꼭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10초 후, 원래의 표정을 되찾고 미간을 살짝 구긴 채 고민하던 성건우의 눈빛이 점차 밝아졌다.
그는 또 한 번 차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장목화는 롱다리고, 나도 롱다리다⋯⋯.”
그 말을 들은 장목화는 의혹이 가득 어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왼쪽 귀에 꽂힌 금속 장치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녀는 방금 성건우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성건우는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장목화는 대단하고, 나도 대단하다⋯⋯.”
차으뜸도 성건우의 목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덩굴의 분포와 도로의 상황, 늪의 각종 장애물을 판별하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성건우가 한 말 자체에서 그 어떤 문제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질투심 많은 첩이 총애받는 다른 첩을 헐뜯는 말처럼 들릴 뿐이었다.
용여홍 역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건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을 까발리지도, 차으뜸을 보호하려 하지도 못했다.
차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성건우의 눈빛이 점차 깊어졌다.
“그러니까?”
다음 순간, 그가 자문자답을 했다.
“우리는 같다.”
성건우의 표정에 빠르게 변화가 일었다. 그의 얼굴은 뭔가를 애써 참고 있는 듯 미미하게 굳어졌다.
“쟤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장목화는 성건우를 바라보며 용여홍에게 물었다.
“팀장님도 롱다리고, 자신도 롱다리라고. 팀장님도 대단하고, 자신도 대단하다고. 그러니까 둘은 같다고 하는데요.”
용여홍은 들은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어 무슨 말인가 하려 했던 장목화가 곧장 그 입을 다물었다.
몇 초 후, 소리 내어 웃던 그녀가 성건우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구조팀의 팀원들 역시 성건우가 방금 한 말에 어떤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 대놓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에 원래부터 성건우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던 차으뜸은 그들의 대화에 완전히 신경을 껐다.
바로 그때였다. 엉덩이를 의자로부터 뗀 성건우가 앞으로 몸을 홱 기울이면서 차으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차으뜸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찬 연합202를 뽑아 들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른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도, 그의 어깨를 움켜쥔 성건우가 그의 관절을 움직일 수 없게 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마치 해당 기능이 애초에 없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동작을 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차으뜸이 뒷좌석의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열정적인 눈빛을 이글거리며 상대의 어깨를 움켜쥔 성건우가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외쳤다.
“너를 덮치려고!”
장목화는 입을 살짝 벌렸지만 욕을 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아니면 말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된 용여홍과 백새벽은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천신의 강림을, 아니, 악마의 강림을 목격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차으뜸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얼굴빛의 변화는 없었다.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경험해본 듯했다.
이어서 그의 금빛 눈동자 안에서 아주 미세한 파란이 일어났다.
차으뜸은 뒤쪽으로 자신을 잡아당기는 성건우의 힘에 사력을 다해 저항하는 한편, 고개를 돌려 부드러운 눈빛으로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에게 장난감을 줘.”
혼란에 빠진 백새벽은 습관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뒤이어 멍하니 콘솔 박스를 연 그녀가 그 안에서 종이 몇 장과 볼펜 하나를 꺼냈다.
이때 성건우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두 손의 위치를 바꿨다.
동시에 그는 왼손으로는 차으뜸의 목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어 상대의 귀 아래쪽을 노렸다. 상대를 기절시켜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차으뜸의 육신이 극도로 유연해졌다.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뱀이 된 듯했다.
몸을 꿈틀거리던 그의 목이 기이하게도 성건우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이어서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그림 그리는 거, 재미있잖아?”
성건우의 동작은 순간 멎어버렸고, 그 얼굴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의혹과 혼란한 기색이 드러났다.
백새벽을 바라보다 상대로부터 펜과 종이를 받아든 성건우가 점점 환하게 웃었다.
종이와 펜을 쥔 성건우는 얼른 자리에 앉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받침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그림 그리기에 흠뻑 빠진 채 온 정신을 집중한 그는 극도로 조용해졌다.
차으뜸은 이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늘한 눈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그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중에도 각성자가 있었구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 역시 각성자야.”
그의 두 손은 이미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으며, 그 오른손에는 연합202가 들려 있었다.
그건 그가 가지고 있던 권총이었다.
몇 초간 망설이던 차으뜸은 결국 성건우를 쏘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내 인자함과 관대함을 찬미해야 할 거야. 넌 앞으로도 쓸 데가 있거든.
네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해. 전에 나를 쫓아 1백 킬로미터를 넘게 달려왔던 말도 있었거든.”
그 말에 홀딱 빠져있던 장목화가 진심이 어린 목소리로 상대를 칭찬했다.
“정말 대단해.”
“정말 대단해.”
성건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리는 한편 장목화의 말을 반복했다.
장목화는 곧장 물었다.
“어디 출신이야?”
성건우는 또 다시 장목화의 말을 반복했다.
“어디 출신이야?”
그러자 장목화는 짜증스럽다는 듯 그를 노려보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코웃음을 쳤다.
“나한테는 네가 갖지 못한 가슴이 있어.”
그 말마저 반복하려다 멍한 표정을 드러낸 성건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어느새 자리에 똑바로 앉은 차으뜸이 묵직한 목소리로 장목화의 질문에 답했다.
“그건 네가 알아야 할 문제가 아냐.”
“이해해.”
장목화는 고집을 피우는 대신 예쁘게 웃음을 지었다.
차으뜸은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계속 가.”
백새벽은 아무런 이의도 표하지 않고 차으뜸의 지시에 따라 거대 늪 깊은 곳의 덩굴 숲 사이를 달렸다.
그러는 동안 내내 그림에 몰두해 있던 성건우는 마침내 한 작품을 완성했다.
그 후에야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린 그가 의아한 눈으로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차으뜸의 뒤통수를 응시하던 그는 침묵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는 가운데, 성건우의 상태는 또 다시 용여홍을 비롯한 다른 팀원들과 비슷해졌다.
하지만 그는 손에 쥔 그림을 잘 접어 주머니에 넣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목화는 그의 그림을 힐긋 훔쳐보려 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 * *
그렇게 몇 시간을 더 달렸을 때, 흑청색 덩굴 사이에서 손가락 하나 크기의 암적색 모기가 떼로 나타났다.
“재수가 더럽게 없군⋯⋯.”
모기떼를 발견한 차으뜸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뇌까렸다. 백새벽의 몸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
한 무리, 두 무리, 세 무리. 점점 더 많아지는 거대 모기떼는 각기 다른 덩굴 사이에서 날아올라, 하늘의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빽빽하게 채운 검은 안개처럼 허공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그것은 마치 지옥에서 온 대군, 혹은 구세계에서 기인한 저주 같았다.
“창문 닫고 돌진해!”
차으뜸이 묵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장목화를 비롯한 팀원들은 백새벽을 통해 변이된 모기떼에 대해 들어본 적 있기에, 그 모기들이 공격에 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떼로 움직이는 녀석들의 비행 속도는 매우 빨랐다.
또한 그들은 일정 범위 내에서는 고온도 저온도 잘 견뎌냈다.
게다가 떼를 이루고 있는 모기의 크기는 아주 작아 총으로 대적하기도 어려웠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체 수 때문에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의 팀이 휴대할 수 있는 총알과 일반 폭탄의 수는 이런 모기떼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녀석들은 평소엔 식물의 즙을 주식으로 삼으면서도 피를 갈망하며 강력한 생존력과 무시무시한 공격성을 가졌다.
뇌가 없는 모기들에게는 두려움 역시 없었다. 그 때문에 설령 무리 중 반 이상이 죽었다고 해도 물러나려는 기색 없이 계속해서 피를 탐했다.
독성을 가진 녀석들은 사람과 동물을 마비시키고 사고회로마저 경직시켰다.
또한 녀석의 주둥이는 변형되지 않은 일반 모기에 비해 훨씬 더 길고 단단하고 예리해, 입고 있는 옷은 물론 살가죽까지도 꿰뚫을 수 있었다.
수많은 유적 사냥꾼과 황야유랑자들에게 변이된 모기는 생명을 빨아들이는 지옥의 늪으로 여겨졌다. 한번 발을 들인 이상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다 해도 빠져나오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