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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50화 (50/649)

50화. 단서

하나하나의 시체를 살피며 이동하던 성건우는 곧 자신을 등진 채 웅크리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은 뭔가를 짓누르다시피 꽉 끌어안은 듯 팔과 다리를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검은색의 거친 털이 난 등 부분에는 암적색 피가 굳어 있는 상처가 나 있었다. 누군가가 확인 사살을 한 흔적이었다.

허리를 굽히고 있던 성건우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손전등의 손잡이 부분으로 그 주민의 시체를 뒤집어 보았다.

손전등의 빛줄기가 흔들리는 사이, 그의 시야에 한 어린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아주 낡았지만 나름 깨끗한 흰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성인 여성의 가슴팍에 꼭 안겨 있었다. 언뜻 봐서는 다친 곳조차 없어 보였다.

성건우는 손전등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이의 상태를 살피려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를 안은 성인 여성의 손을 풀 수가 없었다.

본능적인 시도를 포기한 성건우는 이내 어린아이의 얼굴이 보랏빛을 띠고 있음을 확인했다. 성인 여성의 가슴팍과 맞닿은 부분에서는 암적색 피가 흐른 흔적도 남아있었다.

성건우는 손가락을 뻗어 아이의 코 아래에 대어보며 체온을 느껴보았다.

몇 초 후,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거두어졌다.

꼭 끌어안은 두 구의 시체를 뒤집는 과정에서 성건우는 여인의 시체가 원래 엎어져 있던 동굴 벽과 바닥의 경계 부분에 안쪽으로 팬 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손톱으로 파헤친 흔적이 또렷했다.

그 흔적을 응시하고 있노라니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는 듯했다.

적들의 기습을 마주한 순간, 검은쥐 마을의 여자 주민은 천부적인 굴착 능력을 이용해 다급히 아이를 피신시킬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행동이 폭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손을 뻗어 홈을 더듬던 성건우는 그곳에서 천연적으로 형성된 작은 구멍을 하나 발견했다. 그 구멍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서늘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이에 성건우는 얼른 그것을 끄집어내 보았다. 손전등의 불빛 아래 확인한 그건 중지만 한 크기의 네모진 검은색 물건이었다.

그 물건의 위쪽에는 액정 같은 작은 모니터가 부착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버튼 몇 개가 박혀 있었으며, 아래쪽에는 메시 소재로 덮인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전자과 출신인 성건우는 이 예스럽고 낡은 물건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이건 구세계의 녹음기였다. 검은쥐 마을의 주민이 고쳐서 사용하던 것인 듯했다.

미리 파헤친 땅속에 넣어져서 그런 건지, 폭발의 근원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데다가 주민의 시체로 보호되기까지 해서 그런 건지, 이 전자기기는 꽤 멀쩡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쪼그려 앉은 성건우는 녹음기를 잠시 살피다가 어떤 버튼을 하나 눌렀다.

탕탕탕, 총소리와 혼란스러운 각종 소리 속,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엄마, 엄마, 저 사람들은 왜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약간 거칠고 떨리는 목소리가 그 질문에 답을 했다.

- 그건 우리가 아류인이기 때문이란다.

앳된 목소리가 재차 물었다.

- 아류인이 뭔데요?

몇 초간의 침묵 끝에 거칠고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답했다.

- 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뜻이야.

앳된 목소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을 이어나갔다.

- 하지만, 엄마,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죽인다고요?

저, 저는 전자 설비를 고칠 수도 있어요. 제가 얼마나 쓸모 있는데요⋯⋯.

총소리가 돌연 가까워졌다. 이미 동굴 앞에 이른 듯했다. 뒤이어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쿵, 소리와 함께 녹음은 끊겼다.

묵묵히 녹음된 음성을 듣던 성건우는 다시금 시체 두 구를 바라보았다.

성인 여성도, 어린아이도 얼굴에는 검은 털이 없었다. 면도를 했을 것이 분명한 그들의 얼굴은 아주 깔끔했다.

반고 바이오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직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녹음된 소리는 작지 않았기 때문에 동굴 안쪽으로 들어간 장목화도, 반대편을 탐색하고 있던 백새벽도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성건우와 마찬가지로 침묵에 잠긴 그들은 한동안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한참 후에야 천천히 숨을 토해내던 장목화가 말했다.

“계속 탐색해.”

녹음기를 주머니에 챙긴 성건우는 손전등을 들고 허리를 굽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전등의 빛으로 전방을 비추며 이동하자, 동굴 벽에 새겨진 글자들을 볼 수 있었다.

애쉬랜드 문자인 그 글자들은 아주 오래전에 새겨진 듯 곳곳이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검은쥐 마을 주민들이 습격을 받을 당시에 남긴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손전등을 가까이 댄 채 10여 초 동안 글자를 판별하던 성건우는 마침내 그중 몇 가지 글자를 알아차렸다.

“⋯⋯왔다 감⋯⋯

⋯⋯금과⋯⋯ 영원히 함께.”

이때 장목화 역시 비슷한 것을 발견한 듯 손전등을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에는 이런 곳에 놀러 온 모양이지? 이렇게 낮은 곳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말을 마친 그녀는 동굴 벽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선을 옮기며 단서 탐색을 이어나갔다.

10여 분 후, 세 사람은 동굴 입구 근처 자연광이 닿는 곳에 다시 모였다.

장목화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검은 쥐 마을 사람들은 이전에 대피용 통로 두 개를 뚫어놨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열압력탄과 그와 비슷한 폭탄 앞에서는 피할 틈조차 없었던 거야.”

“습격자는 어떠한 단서도 남겨놓지 않았고요.”

백새벽이 말을 받았다.

그러자 장목화가 고개를 저었다.

“남겨놓지 않은 게 아니라, 전투를 마친 후 시간과 수고를 들여 싹 치웠어.”

성건우는 그 말을 듣고 모종의 생각에 잠긴 채 입을 열었다.

“악랄하면서도 빠르고 깔끔한 기습입니다. 사전에 모의한 복수일까요?”

그가 보기에 복수는 아닐지 몰라도, 사전에 맞춤형으로 모의 된 것만은 확실했다.

장목화는 밝은 동굴 입구 쪽을 바라보며 답했다

“꼭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

특정 사건으로 인해 검은쥐 마을 주민들의 행적이 들통나면서 이 동굴의 위치가 발각당했을 수도 있지. 아류인이라는 신분도, 우리 회사와 무기, 탄약, 겨울을 나기에 충분한 저장 식량 등을 교환하는 종속 거점이라는 것도 다른 이들로부터 강한 악의를 살 수 있는 요소거든.

습격자들에게는 처음까지만 해도 정체를 숨기거나 흔적을 없앨 생각이 없었을 거야. 열압력탄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또렷한 특징이니까. 어쩌면 전투를 마친 후 물자를 뒤지다가 그 무선 통신기를 발견하고 나서야 검은쥐 마을이 어느 대형 세력과 연관된 종속 거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 그 대형 세력으로부터 보복당하지 않기 위해 황급히 현장을 청소한 거야.”

백새벽은 이 사건이 사전에 모의 된 것인지,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따지지 않았다. 그저 개인적인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확실한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동기에 대해서는 일단 내버려 두고,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하죠.

첫째, 습격자들은 상당히 질서가 잘 잡혀있어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전장을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이는 그들이 여러 강도단의 일시적인 연합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다는 뜻이죠.

둘째, 열압력탄과 개인 화기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들의 실력도 수준 이상이라는 의미에요. 유명세도 작지 않을 테고요.”

성건우가 약간 의아해하자, 백새벽은 이렇게 덧붙였다.

“애쉬랜드에서 실력을 숨기려 하는 팀은 많지 않아. 자신들의 강력함을 확실히 내보여야만 그들보다 약한 팀과 주위의 적들을 떨쳐내고 충분한 자원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

대형 세력과 독행자, 그리고 소수의 몇 사람으로 이루어진 작은 팀만 예외지. 하지만 대형 세력의 경우에도 보통 처음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세력을 설립하고, 어느 정도의 반열에 이른 후에야 전략적으로 그들의 실력을 숨겨. 나머지 둘도 전투 중에는 실력을 잘 숨기지 않아. 목격자가 적어서 상황을 통제하기 쉬울 때만 힘을 아끼지.”

장목화는 음, 소리를 내다가 의견을 제시했다.

“현재 상황으로 추론해낼 수 있는 한 가지 사항이 더 있어.

습격자는 적어도 스무 명, 아니, 서른 명 이상일 거야. 그러지 않고서는 검은쥐 마을 주위의 경비대원들을 그렇게 완벽하게 처리하진 못했을 테니까. 검은쥐 마을의 주민들이 반격을 시도하지도 않은 채 동굴 안으로 물러나 대피용 비상 통로만을 노린 것도 그 때문이겠지.”

보기에는 간단한 추론이었지만, 방금 전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성건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쥐 마을은 이삼백 명의 규모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반고 바이오에서 제공한 각종 무기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만약 습격자의 수가 적었다면 아무리 그들이 강한 장비를 갖추고 있다고 한들, 검은쥐 마을 사람들은 상대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맞아요.”

백새벽은 손전등의 빛으로 밝혀지지 않은 구역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부 시체의 총상 흔적으로 봤을 때 습격자들의 무기는 비교적 다양한 편이에요. 그러니 대형 세력의 군대일 가능성은 배제해도 될 거예요. 물론 조사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확인 사살을 한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대형 세력의 군대였다면 보복을 두려워할 리 없으니,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작업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이러한 토론에 전보다 익숙해진 성건우도 한마디 보탰다.

“노예 포획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갖는 건 사람이에요. 검은쥐 마을 주민 모두를 학살해버리는 건 그들의 스타일이 아니죠.”

“맞아. 아류인도 광산에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으니까. 특히 검은쥐 마을의 주민은 그런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테고. 설령 심리적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 노예 포획대가 전염과 변이를 걱정스러워했다 한들, 이들을 일반 광산 노예와 분리시키고 멀리 떨어져서 무장한 채로 감독하려 했을 거야.”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 따위 개의치 않던 장목화가 물었다.

“다른 의견은?”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습격자들이 꼭 서른 명 이상인 건 아닐 수도 있어요. 제 말은, 핵심 구성원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일고여덟 명의 핵심 구성원 만으로도 수십 명의 종속 구성원을 완전히 포위할 수 있어요. 겉보기에 규모가 커 보이기만 하면 그들의 목표는 달성된 셈이죠.

전투가 끝난 뒤 전장을 수습하고 흔적을 처리할 때도, 이 일고여덟 명의 핵심 구성원은 직접 나서거나 종속 구성원들에게 시켰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도 현장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죠.”

장목화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네.

여태까지 토론했던 내용과 녹음기의 대화 내용을 종합하면, 습격자들의 특징들을 일차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첫째, 서른 명 이상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팀으로 가정한다면, 이들은 꽤 유명하고 행동에 거침이 없으며 경험이 풍부한 편일 거야. 열압력탄과 개인 화기 등의 강력한 장비를 갖추고 있지만, 대형 세력에 속하거나 의탁하지는 않았고 현재 식량이 부족한 상황도 아니지.

둘째는 핵심 구성원은 열 명이 안 되지만 대량의 종속 구성원이나 연합이 있는 팀일 가능성이고.”

말을 마친 장목화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첫 번째 상황일 경우 그런 팀은 애쉬랜드에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아. 부근에서 활동하는 팀, 혹은 최근 들어 이 근처에 온 팀을 추리면 그 수는 더 줄어들지. 주위의 황야유랑자나 유적 사냥꾼과 접촉하면 곧 주요 용의자를 선별할 수 있어. 그다음에는 하나하나씩 배제해 나가면 돼.

두 번째 상황일 경우에는, 종속 구성원과 연합이 있다는 건 진정한 비밀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뜻이야. 사람이 많을수록 의견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손에 넣은 물자 중 스스로 쓸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팔아버릴 텐데, 이 역시 단서가 될 수 있어.

아 참, 이따가 이 부근도 자세히 탐색해보자. 만약 두 번째 상황이라면 일고여덟 명의 핵심 구성원이 일을 마무리 지은 후 비밀 보장을 위해 종속 구성원과 협력자들을 죽여 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그와 동시에 동굴 입구 쪽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정말이지, 왜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지 않고 여기서 이래? 허리하고 무릎 안 아파?”

검은쥐 마을의 학살로 인한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성건우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벌써 정신을 차린 듯 보이는 팀장에게 놀라며 얼른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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