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아류인
몇 초 후, 장목화가 떠보듯 물었다.
“당신은 퍼스트 시티에서 그 교파에 가입한 건가요?”
갈루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영원한 세월 교파죠.”
그녀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막 돌아가셨을 때였어요. 저와 가족들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죠⋯⋯.”
이때 성건우가 갈루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네요? 오히려 웃기까지 하시고요.”
갈루란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완벽한 애쉬랜드어로 말했다.
“생로병사는 이 세계의 자연법칙이에요.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번갈아 가며 순환하죠. 저희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이 세상 속에 잠들어 계시고, 여전히 자연의 일부분이세요. 어쩌면 어느 날 다른 형식으로 새로운 시작을 맞게 될지도 모르죠.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요.
그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 있는데 왜 슬픔에 잠긴 채 울어야 하나요?
그럴 힘을 아껴서 그분을 더 추억하는 게 낫죠.”
성건우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론상 상대의 허점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그는 갈루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다만 지나치게 극단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갈루란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한 그 순간이었다. 웨이루 역 북쪽에서 또다시 거칠고 서늘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또렷한 변화가 느껴지는 이번 포효는 전보다 더 우렁차고 난폭했다.
고개를 돌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갈루란이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저도 저곳에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며 예를 갖췄다.
“지인은 무아(無我)하다. 신세계는 눈앞에 있느니라.”
뒤이어 가운을 툭툭 털던 그녀는 북쪽으로 흐르듯 떠났다.
“지인은 달지기의 또 다른 명칭이야⋯⋯.”
멀어져가는 도사 갈루란을 바라보던 성건우가 간략하게 설명했다.
일찍이 일어나 있던 장목화는 갈루란과 이두형이 떠난 쪽을 내다보다가 돌연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왜 차 한 대도 준비하지 않고 굳이 걸어서 가는 거야?
저들이 가진 능력이라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감히 어둠 속 황야를 걸어갈 엄두를 냈다는 것은 믿을만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유적에 먼저 도착한 자들이 대부분의 위험을 제거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늦게 도착할 필요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을지도 모르죠.”
백새벽은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했다.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고요.”
성건우는 정상인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가능성을 제시했다.
“⋯⋯어쩐지 그럴 듯하네.”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한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이두형이라는 역사 연구원 말이야. 갈루란이야 스스로 말했다시피 여정 중 갖가지 풍경을 즐기고 싶다고 했으니 당연히 걸어가는 편이 더 좋겠지.”
다른 팀원들이 입을 열기 전, 그녀는 짐짓 심각한 척 말을 이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은 따로 있어.”
“뭔데요?”
사주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용여홍이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
장목화는 더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성건우, 이번에는 왜 전처럼 합창에 동참 안 해?”
늪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 포효를 처음 들었을 때 그 소리를 따라 했던 성건우를 지적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팀장을 빤히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대꾸했다.
“정말 유치하시네요.”
“⋯⋯.”
백새벽과 용여홍은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했지만, 장목화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귀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어? 뭐라고? 부탁인데 좀 크게 얘기해주면 안 될까? 아, 됐고. 밥이나 먹자.”
앞장서서 압축 비스킷과 에너지바를 먹고 물 주머니 안의 물까지 새로 채운 장목화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은 더 조심해야 해.
방금 전의 소리, 너희들도 들었잖아.”
백새벽과 성건우, 용여홍이 알겠다고 답하자 장목화는 웃었다.
“하지만 휴식을 취할 때는 휴식을 취해야지. 내일도 계속해서 이동해야 하니까.
게다가 식량 찾기 훈련도 시작해야 해. 이 훈련은 사냥과 탐색에만 국한되지 않아. 먹을 수 있는 잎과 뿌리를 어떻게 판별하는지, 변이 동물 중 억지로라도 섭취가 가능한 부위가 어디인지, 그것을 먹은 후 얼마 내에 유전자 약을 주사해야 하는지, 어떤 진흙으로 한두 끼의 식사를 대체할 수 있는지도 훈련 내용에 포함되지. 지난 며칠 동안 애쉬랜드를 돌아다닌 것을 모험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식량이 풍족한 상황에서의 여정은 모험이라기보단 무장 여행에 가깝지.”
그녀의 말에 용여홍은 겁을 먹었지만, 성건우는 오히려 신나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덧붙였다.
“그리고 기괴한 종교 이론에는 미혹되지 않는 게 좋아. 종교는 어느 정도 정신적 위안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애쉬랜드와 같은 곳에서 그것에 빠지는 건 현실 도피와 다름이 없거든. 아주 큰 위험이 잠재되어 있어.”
고개를 끄덕이던 용여홍이 물었다.
“팀장님, 그런 기괴한 종교가 많은가요?”
이는 반고 바이오의 교과서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굉장히 많아.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인간이 가장 쉽게 찾고 의지할 수 있는 게 바로 종교니까.”
장목화는 피식 웃으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퍼스트 시티에는 적잖은 위험을 조성할 수 있는 지하 종교가 두 손으로도 못 셀 정도로 많대.”
경고를 마친 그녀는 용여홍에게 주위 순찰 임무를 맡기고 팀원들과 오늘 있었던 일들을 복기했다.
이날 밤은 무사히 지나갔다.
* * *
지프는 날이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목적지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 보조석에 앉은 장목화가 조원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검은쥐 마을의 주민들은 사실, 한 무리의 아류인들이야.”
‘아류인?’
그 말을 듣자마자 용여홍의 머릿속에는 흉악함, 악독함, 변이, 더러움, 오염의 원천, 인간 증오 등의 단어가 연달아 떠올랐다.
실제로 아류인을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교과서와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장목화는 용여홍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류인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같아. 적어도 생식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지.”
용여홍을 비롯한 팀원들이 끼어들기 전, 장목화가 자문자답하듯 말했다.
“검은쥐 마을의 주민들은 쥐를 잡아먹으면서 구세계 파괴 이후 첫 번째 겨울을 났어. 소문에 따르면 당시 그 구역의 쥐들은 전부 미친 것처럼 땅속에서 기어 나와 산과 들에 널렸다더군. 개중에는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녀석도 있었고, 눈이 빨갛게 변한 녀석도 있었고, 주위의 생물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녀석도 있었대.
음, 이야기가 잠깐 샜네. 검은쥐 마을 주민들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첫 번째 겨울을 보낸 후, 그들이 원래 살던 구역의 오염이 지나치게 심각해지는 바람에 수많은 이들이 사망한 거야. 그들은 결국 그곳을 떠나 이쪽으로 이주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악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 그들의 신체에 점차 변이가 생기기 시작한 거야. 게다가 변이된 쥐를 지나치게 많이 섭취했기 때문인지 그들은 점점 쥐 같아졌지. 하, 나야 이쪽 방면의 전문가도 아니고 이런 연구를 해본 것도 아니니까, 그냥 하는 말이야.
아무튼 그들의 털은 점점 검어지고 또 많아졌어. 그러면서 등이 굽는가 하면, 손톱은 점점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졌지.
그렇게 몇 대를 거친 후, 현재 검은쥐 마을 주민들의 키는 140센티미터 정도고, 구멍 안에서 사는 것을 좋아해. 굴을 파는 데 상당히 뛰어나고, 이에 따라 그들의 음식 취향 역시 상당히 잡다해졌어. 동시에 그들은 강렬한 햇빛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이나 저녁 무렵, 깊은 밤에만 활동해.
그렇다고 나쁜 쪽으로만 변이된 것도 아냐. 예컨대 그들은 기계와 전자 방면에서는 천부적인 능력을 보이지. 모양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구세계의 전기 설비라도 그들이 한동안 손을 보면 사용할 수는 있게 될 정도야.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에 맞는 전선과 부품이 갖춰져 있어야겠지만.”
이 대목에서 장목화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너희들한테 알려주는 걸 깜빡했는데, 그들 앞에서는 절대 검은쥐 마을이라는 단어를 꺼내서는 안 돼. 이건 황야의 어느 유랑자들이 그들의 거점에 제멋대로 붙인, 매우 차별적인 이름이니까. 게다가 검은쥐 마을 사람들은 자존심이 꽤 센 편이거든. 회사 내부에서야 아류인들에 대한 원한이랄 게 없는데도 이런 이름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야.”
“그럼 회사에서 그들을 끌어들인 이유는 뭔데요?”
운전 중이던 새벽이 물었다.
황야유랑자 출신인 백새벽은 아류인들의 미움과 이유 없는 습격을 수 차례 받아본 경험이 있었다. 거기다 그들의 악몽 같은 외형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던 그녀는 그들에 대해 별다른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때때로는 그들이 그저 지능을 가진 위험한 생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검은쥐 마을의 주민들은 인간에 대한 원한이 그다지 깊지 않아. 그들은 평소에도 본인을 정상인이라 여기니까.
만약 그들의 예민함, 열등감, 아류인에 대한 회사 내부 직원들의 편견이 아니었다면, 회사는 그들을 점차 외부의 종속 거점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조금씩 흡수했을지도 몰라.
엄밀히 따지자면 그들은 종속 거점이라기보다는 협력 파트너에 가까워. 우리는 무기, 탄약, 오래된 옷, 일정한 식량을 그들이 수집한 가치 있는 물건으로 교환하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무선 통신기를 이용해 검은 늪 황야의 중요 소식을 회사에 전달하는 거지. 그래, 회사에서 너희들이 입던 낡은 옷을 수거해가는 것도 다 이런 거래를 위해서야.”
잠시 뜸을 들이던 장목화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회사는 검은쥐 마을에서 특정 실험의 지원자를 모집하기도 해.
이런 방면에서 검은쥐 마을의 주민들은 상당히 적극적이야. 그들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후손을 정상인으로 만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지.”
장목화는 이러한 설명에 자신의 주관을 섞지는 않았지만, 백새벽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애쉬랜드에서 회사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은 전부 생물 실험과 관련되어 있어요.
저도 회사와 깊은 접촉을 하기 전에는 적잖은 소문을 듣고 그런 실험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죠. 어느 날 갑자기 반고 바이오에 잡혀 비밀스러운 장소로 보내진 뒤 사악한 실험의 희생양이 되는 건 아닌가,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무너지고 신체가 변해 괴물이 되는 건 아닌가, 그러다가 인간 같지 않은 모습으로 죽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요.
그런데 검은쥐 마을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실험에 지원한다니⋯⋯.”
성건우와 용여홍은 백새벽의 말을 듣고 나서야 외부인이 보는 회사가 그런 이미지였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반고 바이오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어느 이야기 속 대형 빌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회사 내부는 유토피아고, 외부는 지옥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그들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장목화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공포를 꽤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모양인데, 단숨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걸 보면.”
이내 그녀는 왼팔을 들며 팔꿈치를 굽혔다.
“이 전기뱀장어형 생체 공학 의수도 실험의 결과야. 유전자 개조도 그렇고.
어때? 이런 것들을 직접 보고 나서는 좀 덜 무섭지 않아?”
백새벽은 침묵한 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