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7화 (47/649)

47화. 자연에 맡기다

이두형과 갈루란은 네 명의 구조팀원을 재차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을 거둔 이두형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단하시네요.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승려교단에서 붉은 가사를 걸친 기계 승려는 각성자일 확률이 낮지 않다고 하던데요.”

갈루란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각성자였어요.”

장목화는 두 사람의 추측을 확신시켜 주었다.

뒤이어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그녀는 누구에게도 시선을 고정하지 않은 채 웃으며 물었다.

“두 분, 각성자에 대해 아는 게 많으신 것 같네요?”

이두형이 대화를 권했고 갈루란은 뛰어난 환경 적응력을 보였으니, 장목화도 개의치 않고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정보를 캐낼 작정이었다.

상대가 답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답을 해준다면 토끼 다리 정도는 나눠줄 의향이 있었다. 그렇게 작은 토끼 한 마리로 구조팀 넷의 배를 채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주메뉴는 에너지바와 압축 비스킷이 될 예정이었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군용 통조림 몇 개를 꺼내면 되었다.

이두형이 입가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런, 쉽지 않은 질문이군요.”

그러면서도 그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여도사 갈루란이 입을 열기 전, 이두형이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제게는 각성자 친구들이 몇몇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길, 각성자는 마음속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고 추적한다더군요. 애쉬랜드의 모두가 굶주림과 질병, 변이 등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현실에서 신세계로 통하는 대문을 찾는 것처럼요.

그래요, 승려교단에서는 그곳을 극락정토라고 부르죠.”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건우는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이때,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갈루란이 끼어들었다.

“승려교단 내 붉은 가사를 입은 로봇 승려들은 기원의 바다에 진입했을 확률이 있어요.”

“맞습니다, 맞아요. 기원의 바다! 제 친구들도 그 단어를 언급한 적이 있죠.”

이두형은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치며 맞장구를 쳤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가 생각에 잠긴 채 물었다.

“기원의 바다를 넘으면, 그다음에는 어디에 도착하죠?”

“모릅니다.”

갈루란이 침착하게 답했다.

이두형은 웃음을 머금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모른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장목화는 2초 간 더 고민하다가 질문을 바꿨다.

“그럼 어디에서 기원의 바다에 진입하는 건데요?”

갈루란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곳에 대한 명칭은 각 사람들마다 달라요.”

이두형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비교적 공인된 명칭은 ‘뭇별 홀’이죠.”

성건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렇군요.”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는 만나본 각성자가 몇 없어서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없네요.”

그러고는 이두형과 갈루란에게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얼마나 구워졌어?”

“거의 다 됐어요.”

백새벽이 토끼가 꽂힌 꼬챙이를 거두며 말했다.

“손님들부터 대접해드려.”

장목화가 지시했다.

방금 전 들은 정보가 얼마나 귀한 지 알고 있었던 백새벽은 순순히 장목화의 지시에 따랐다. 구워진 토끼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시기를 기다리던 그녀가 뒷다리 두 개를 뜯어 이두형과 갈루란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애쉬랜드에서 오랜 시간 유랑생활을 했던 그녀에게 기원의 바다와 뭇별 홀은 생전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거절하지 않고 토끼 다리를 받아든 이두형은 다리뼈 끝부분을 쥐고 후후 불다가 먹기 시작했다.

“맛있네요. 아주 잘 구워졌어요⋯⋯.”

그는 입에 고기를 문 채 웅얼거리며 칭찬했다.

갈루란은 그보다 훨씬 점잖았다. 그다지 뜨겁지 않은, 툭 튀어나온 뼈 부분을 쥔 그녀는 토끼 다리 고기를 조금씩 조금씩 뜯어먹었다.

그 사이 백새벽은 남은 토끼를 네 부분으로 나눠 자신을 비롯한 팀원들의 도시락통에 나눠주었다.

성건우도 고기를 한 입 베어먹었다. 장목화의 말대로 육질이 상당히 딱딱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씹다 보니 회사 내부에서 나오는 고기반찬과는 비교도 안되는 풍미가 느껴졌다.

용여홍은 사주 경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뿐, 그 맛을 직접 즐길 순 없었다.

얼마 안 되는 토끼 고기를 다 먹었을 무렵, 모양 빠지게 손가락에 묻은 기름까지 쪽쪽 빨아먹는 이두형을 보고 웃던 장목화가 물었다.

“이⋯⋯ 선생님, 역사 연구원이자 박학다식한 분이라고 하셨죠?

그럼 웨이루 역 북쪽에서 발견된 그 폐허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는 게 있나요? 그곳이 구세계의 어느 도시였는지 아세요?”

이두형은 쭈글쭈글하게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 두 손을 닦으며 웃었다.

“모릅니다. 정밀도가 높은 지도를 포함한 구세계의 자료 대부분은 구세계 파괴 당시, 그리고 혼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유실되었으니까요.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새롭게 발견된 그 도시 폐허가 범상치 않다는 겁니다. 연구 가치가 아주 높아요.”

“왜죠?”

장목화는 백새벽과 성건우를 비롯한 이들을 대표해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이두형은 고개를 들어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세계 파괴 당시 도시 주위의 작은 마을과 촌락에서는 적잖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그중 그 도시 폐허를 언급하거나 탐색하려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음, 이건 해당 유적을 발견한 유적 사냥꾼으로부터 얻은 정보에요.”

이 점에 대해 장목화와 백새벽은 깊이 동의했다. 해자마을의 전두하는 한참 어렸을 당시에도 도시로 돌아가 부모님을 찾으려 했다고 했다.

“이러한 세부 사항은 그 도시 폐허가 절대 범상치 않은 곳임을 뜻하죠.”

이두형은 재차 결론을 내렸다.

그의 말이 막 떨어진 순간이었다.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돌연 거칠고 싸늘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고요한 밤에 악몽이 강림한 듯했다.

* * *

그 포효가 잠잠해지기 전, 거대 늪의 다른 장소들에서도 그것과 비슷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이러한 흐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두형의 얼굴에서 여태까지 가신 적 없는 웃음기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검은 늪 황야의 밤에 다시 고요가 찾아들자, 골동품 학자이자 역사 연구원인 이두형이 장목화와 성건우를 비롯한 구조팀을 돌아보았다.

“저쪽의 상황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픈 것 같네요.

저는 밤에도 쉬지 않고 움직여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심하세요.”

장목화는 떠나려는 그를 만류하지 않고 공손하게 말했다.

곧장 대답하는 대신 웃음을 지어보인 이두형은 작별을 고하기 전 못다 한 말을 마쳤다.

“어린 아가씨, 아가씨의 이름을 들으니 제 과거가 생각나네요. 당시 저희 고향 근처에는 목화밭이 아주 많았답니다. 매해 이맘때, 혹은 조금 늦은 때가 되면 바닥 곳곳에 떨어진 작은 구름들을 볼 수 있었어요. 장관이었죠.”

장목화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를 지었다.

“저희 아버지는 목화 개량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셨어요. 제가 태어났을 때는 마침 목화를 추수하는 시기였고요. 그래서 저한테 이런 이름을 지어주셨다더군요.”

여기까지 말을 잇던 그녀는 웃음을 머금은 채 항의하듯 덧붙였다.

“선생님은 분명 저희보다 나이가 많으시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한테 어린 아가씨라는 호칭을 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이두형은 소리 내어 웃었다.

“저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답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꽤 많이요.”

그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났으면 좋겠군요.”

“다시 만나기를 바라요.”

장목화와 성건우를 포함한 다른 이들도 예의 바르게 답했다.

손을 몇 번 더 흔들다가 돌아선 이두형은 언덕을 빙 돌아, 해는 졌지만 달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어두운 황야의 북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갔다.

“갈루란 여사님, 당신은요? 당신도 곧바로 웨이루 역 북쪽으로 갈 건가요?”

다시 자리에 앉은 장목화가 갈루란을 향해 물었다.

갈루란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절 여사라고 부르지는 마세요. 도를 찾는 길 위에 남녀의 구분은 없으니까요.

호칭을 통해 존경을 표하고 싶으시다면, 그건 막지 않겠어요. 대신 도장(道長)이라고 불러주시면 좋겠네요.

물론 갈루란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호칭이란 구도의 길 위에서 보게 되는 다양한 풍경과 같아서, 귀천 따위는 없거든요.”

“상당히⋯⋯ 소탈하시네요.”

한참 시간을 들인 끝에야 적당한 형용사를 찾은 장목화가 말했다.

“애쉬랜드어 실력도 굉장하신데요.”

“제가 원한 건 아니었어요.”

갈루란은 구조팀이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놓은 다음, 변함없이 웃음을 머금은 채 설명했다.

“도와 관련한 서적은 전부 애쉬랜드어로 쓰여있거든요. 레드리버어로 번역해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죠.”

말을 마친 그녀는 다 먹은 토끼뼈를 바닥에 던진 뒤, 기름이 묻은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그러곤 축축한 손가락을 옷에 쓱쓱 닦았다.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와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귀족적인 기질의 묘한 조화에 장목화와 성건우를 비롯한 이들은 모두 넋을 놓고 말았다.

물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 안에 든 물까지 두어 모금 마신 갈루란은 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작게 웃었다.

“때때로 우리는 진실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해요. 심지어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차 보장하지 못하죠. 그런데 중요하지도 않은 세세한 것들에 신경을 써서 뭐하겠어요? 그러느니 차라리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하게 살면서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는 게 낫죠.”

이내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응시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퍼스트 시티의 원로원 귀족들은 대개 그런 식이에요. 그들은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황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던 유랑자였어요. 깨끗한 수원지가 없을 때 동료의 오줌까지 앞다퉈서 핥아먹던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각종 예절을 따지고, 귀천을 따지고, 실질적인 의미라고는 하등 없는 자질구레한 격식을 따지죠.

하하, 도시 내의 하층민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갈 때 연회의 요리 하나당 커트러리 한 세트가 필요하다는 규정을 세운 게 바로 그들이에요.”

몇몇 소문만 들었을 뿐, 퍼스트 시티에 가본 적 없는 성건우와 용여홍, 백새벽은 이 말에 어떤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장목화는 모종의 생각에 잠긴 양 고개를 끄덕였다.

“퍼스트 시티 출신이신가 보네요.”

갈루란은 웃기만 할 뿐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을 때, 성건우가 화제를 전환했다.

“갈루란 도장, 도사란 무엇인가요?”

갈루란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설명하기 어렵네요⋯⋯.

승려를 만나본 적 있다고 했죠? 도사는 또 다른 종류의 승려라고 보시면 돼요. 다른 종교에 소속되어 있고, 다른 달지기를 믿는 승려.”

달지기라는 단어에 장목화와 용여홍을 비롯한 이들의 관자놀이 핏줄이 살짝 꿈틀거렸다.

가장 먼저 나서서 물은 것은 성건우였다.

“당신은 어떤 달지기를 믿는데요?”

갈루란은 엄숙한 표정으로 답했다.

“장생이요.”

구조팀 전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법을 따돌린 뒤 용여홍과 성건우는 교리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로봇 승려가 알려준 정보를 장목화와 백새벽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정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승려교단은 이 세상이 세자재여래라는 과거 부처의 한바탕 꿈이며, 그렇기 때문에 각종 고통으로 가득한 것이라 믿는다. 세자재여래는 한 해와 윤달을 대표하는 달지기이다. 승려교단은 세자재여래를 다른 이름으로도 부르는데, 그 이름은 바로 장생이다.

갈루란은 그들의 이상한 반응을 눈치챘으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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