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만만치 않은
“어디로 가지?”
용여홍이 습관적으로 물었다.
성건우는 언덕 주위의 작은 개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줄기를 따라 이동하면서 강을 찾자. 강에는 물고기라도 있을 테니까.”
“그래, 맞아.”
용여홍의 얼굴에 한결 안심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내 잠시 망설이던 그가 물었다.
“근데 그것도 사냥이라고 볼 수 있나?”
“궁극적인 목적에서 보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성건우는 거리낌 없이 대꾸했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물고기를 찾기 위해 얼마나 멀리까지 가야 하느냐는 거야.”
“⋯⋯아니면 물고기를 찾는 동안 다른 동물을 사냥해볼까?”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던 용여홍은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성건우, 네 추리 광대 능력으로 사냥감을 꾈 수는 없냐?”
성건우는 용여홍을 위아래로 두어 번 훑어보았다.
“일단 사냥감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해. 다음으로는 사냥감이 가만히 서서 내 말을 들어야 하고.”
“⋯⋯하긴.”
용여홍은 또 묻고 싶은 게 있는 듯 벌렸던 입을 결국 다물었다.
잠시 후,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말했다.
“이렇게 맹목적으로 나서서는 안 돼. 일단 백새벽한테 가르침을 청하자.”
“좋아.”
곧장 돌아선 성건우가 모닥불 근처의 지프로 돌아갔다.
용여홍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묵하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지프 근처에 이른 건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백새벽, 이 근처의 어디로 가야 사냥감을 찾을 수 있을까?”
새벽은 드문드문 자라난 나무들을 가리켰다.
“저쪽을 찾아봐. 토끼 정도는 있을걸.
발자국과 배설물을 잘 살펴봐야 해.”
토끼를 사냥하는 기술까지 간략하게 설명한 그녀가 덧붙였다.
“만약 일반인이라면 함정을 설치하거나 도구를 이용하라고 제안했겠지만, 너희한테는 총이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할 거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침착함을 유지하는 거지.”
“알았어.”
용여홍와 성건우의 입가에 기대에 찬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1시간 후, 노을이 점차 힘을 잃어갈 때쯤 머리와 얼굴이 먼지투성이가 된 성건우와 용여홍이 모닥불 근처로 돌아왔다.
성건우의 손에는 회백색 산토끼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죽은 토끼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나 오래 걸려서 잡아온 게 겨우 토끼 한 마리야?”
모닥불 근처에서 쉬고 있던 장목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토끼가 되게 예민하더라고요. 달리기도 빠르고, 파놓은 구멍도 많고⋯⋯.”
여홍이 난색을 표했다.
장목화는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게다가 오늘은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서 잔뜩 놀라 있었을 테니 잡기가 더 힘들었겠지.”
“맞아요, 맞아요!”
용여홍이 얼른 동조했다.
성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토끼를 너무 얕잡아 보기도 했어요. 쉽게 잡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잘했어. 이번 경험을 발판 삼아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장목화는 모닥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가죽을 벗기고 피를 제거한 다음에 굽자.”
토끼는 금세 약간 굵은 나무꼬챙이에 꽂힌 채 모닥불에 구워졌다.
백새벽이 가끔씩 토끼 고기 위에 소금을 뿌리자. 그 표면이 점차 금빛으로 변했다. 성건우와 용여홍은 태어나 처음 맡아보는 냄새에 식욕이 자극됐다.
“맛있겠다⋯⋯.”
두 초짜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장목화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맛있지는 않아.
바를 기름도 없고, 뿌릴 향신료도 없는 상황인 데다가 토끼 고기는 좀 딱딱하기도 하거든. 그냥 먹을만한 정도지.”
“사치스럽네요.”
성건우와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대꾸했다.
고기를 구울 때 감히 기름을 바를 생각까지 하다니!
장목화는 크지 않은 토끼 고기를 빤히 응시하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가끔 배어 나온 기름을 담을 마땅한 용기가 없을 때는 그 자리에서 해치워야 했거든.
야외에서는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알아야 해.”
장목화는 말을 맺자마자 고개를 홱 쳐들며 언덕의 측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어.”
사방을 경계하고 있던 용여홍은 얼른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쳐들었다. 성건우와 백새벽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분 후, 그들의 시야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었다. 그중 키 180센티미터가 안 되어 보이는 사십 대 남자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채, 기품있어 보이는 수염도 기르고 있었다. 중년에 이르렀음에도 상당한 미남이었다.
한편 키 170센티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는 금발의 여인은 눈이 파란색인데다 이목구비가 또렷해 꽤 아름다워 보였다.
두 사람은 모두 품이 넉넉하고 보기 드문 가운을 입고 있었다. 남자의 것은 짙은 검은색이었고 여자의 것은 남색이었는데, 남색 가운의 표면에는 기이하고 추상적인 기호가 그려져 있었다.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던 장목화가 큰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남색 가운을 걸친 금발 여자가 곧장 걸음을 늦추더니,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고는 두 손을 미간에 댄 채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행복은 무량한 천존으로부터 오나니.”
금발 여자는 레드리버어를 사용할 것처럼 보였는데, 뜻밖에도 애쉬랜드어로 말했다.
중년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여인을 잘 모릅니다. 이 여인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쪽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누군가가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와봤죠.”
“자비를 베풀 여지는 없을 것 같은데요.”
장목화는 모닥불 위의 작은 토끼를 가리키며 침착하게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중년 사내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가 여태 만난 모든 이들은 저의 박학한 지식과 넓은 식견을 칭찬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장목화는 성건우를 비롯한 팀원들에게 비밀 수신호를 보냈다.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뜻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좋습니다.”
그 말에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품이 넉넉한 검은색 가운을 입은 중년 사내는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편하게 앉았다. 아주 대범한 모습이었다.
남색 가운 차림의 금발 벽안 여자도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았다. 구조팀이 앙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한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장목화가 못 참겠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별로 무섭지 않으신가 봅니다?”
백새벽과 성건우, 용여홍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두 사람, 배짱이 장난 아닌데!’
“얼마 전에 구세계 도시의 폐허가 발견되었다죠? 다들 바삐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상황에 서로를 죽일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년 사내가 두 손을 뻗어 모닥불의 온기를 쬐며 말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장목화가 제자리에 앉으며 솔직하게 답했다.
“장목화입니다.
우리는 특정 세력에 속해 있습니다. 검은 늪 황야에는 임무를 수행하러 왔죠.”
그녀는 자발적으로 신분을 드러내며 숨겨야 할 부분은 숨겼다. 이를 통해 상대가 자신들을 두려워하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오늘 밤을 평화롭게 보내고 제 갈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장목화가 두 사람을 모닥불 주위에 앉도록 허락한 것은 성건우의 각성자 능력에 따르는 한계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를 가까이에 두는 것이 더 나았다.
상대 역시 각성자일 수 있겠지만 그들의 주요 목표는 누가봐도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장목화일 테니, 성건우는 그 틈을 타 반격을 가하면 되었다. 설령 상대에게 아귀도와 같은 범위형 능력이 있다 한들, 이 정도 거리라면 미리 준비하고 있던 성건우가 때맞춰 반격에 나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터였다.
“어쩐지.”
중년 사내는 장목화의 자발적인 소개를 듣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생김새, 체형, 피부, 옷, 무기, 어느 모로 보나 황야유랑자 같지는 않더군요. 하하. 저 어린 아가씨만은 약간 의심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는 토끼를 굽고 있는 백새벽을 가리켰다.
장목화는 자신들의 나이가 어리지만은 않다고 반박하려 했지만, 중년 남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는 이두형이라고 합니다.
역사 연구원이자 골동품 학자죠. 부끄럽지만 사냥꾼 길드에 가입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는데도 줄곧 신입이다가, 최근에서야 정식 사냥꾼으로 승급했습니다. 하, 의뢰는 거의 받지 않고 그들의 자원과 소식에 의지해 제 연구에만 집중했거든요. 짐작하셨다시피 여태까지 발견된 적 없는 구세계 도시 폐허가 발견되었다기에 그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두형은 말을 잇는 내내 선량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답을 들은 구조팀은 감히 그를 얕잡아 볼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권총 한 자루밖에 없어 보이는 골동품 학자 겸 역사 연구원이 혼자서 애쉬랜드의 도시 폐허를 탐색하면서도 그 나이에 이르도록 살아있다는 것은 그가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금발의 여인도 스스로를 소개했다.
“저는 갈루란이에요. 도사죠.”
그녀는 애쉬랜드어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가 내뱉는 특정 발음은 약간 어색하게 들렸다. 그래서 구조팀의 눈에 그녀는 더욱 이상해 보였다.
갈루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곳에 온 건 아주 많은 사람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무슨 일이 있나 한 번 보려고 쫓아왔죠.”
“막무가내네요⋯⋯.”
장목화가 사정없이 평가했다.
그러나 갈루란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안 그러면요?
구세계 파괴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됐죠.
우리 인간은 스스로를 고등 생물로 여겼지만, 세계와 운명 앞에서는 거친 바람에 굴러다니는 낙엽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말을 하는 사이 그녀는 멀찍이 자리한 성긴 나무들을 가리켰다.
“우리는 바람에 따라 흩날릴 뿐, 어디로 갈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어요.
운명의 안배에 저항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러기를 포기하는 거예요. 바람을 따라 움직이며 생각을 바꾸고, 그러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갖가지 풍경을 감상하면서 도의 존재를 찾는 거죠. 그러면 진실과 허상을 구분하면서 질곡에서 벗어나 영원한 세월을 기대할 수 있어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말처럼요.”
아름다운 금발 여인이 내뱉은 당당하고 차분한 말에, 용여홍을 비롯한 이들은 약간 멍해지고 말았다.
상대는 분명 애쉬랜드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상대의 행동 방식까지 다 포함하여 살핀 다음,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저 여인은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만족하는구나.’
“대충 알겠어요.”
장목화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두형은 생각에 잠긴 양 갈루란을 힐긋 바라보더니 토끼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이쪽으로 오면서 산토끼 두 마리를 봤습니다. 이쪽에 사냥감이 꽤 많다는 뜻이죠. 그런데 왜 한 마리만 잡은 겁니까?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그 질문에 성건우와 용여홍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곁눈질로 두 사람을 살핀 장목화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살아있는 것을 함부로 살생해서야 쓰겠습니까.”
이두형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승려교단의 교도였습니까? 아니면 수정의식교인가요?”
“아닙니다.”
장목화는 여유롭게 설명했다.
“얼마 전에 승려교단의 로봇 승려 한 명을 만나 갈등을 빚으면서 크게 싸운 적은 있지만요.”
입을 살짝 벌린 이두형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 승려가 혹시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나요?”
“네.”
장목화는 사실대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