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제안
그로부터 대략 15분 후, 성긴 숲에서 벗어난 성건우는 흑회색의 황야에 이르게 되었다.
돌과 잡초로 뒤덮인 이곳의 흙은 비교적 단단했으며, 자동자의 바퀴 흔적도 아주 많아서 이중 뭐가 지프의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성건우는 종합 경보 시스템을 이용해 아주 멀찍이 자리한 지프를 발견했다.
한쪽 바퀴가 연못 크기의 진흙 속에 빠진 지프는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언제든 아래로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프는 두 개의 밧줄로 회색 SUV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회색 SUV는 웅웅, 하는 엔진 소리를 내며 지프를 늪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용여홍은 돌격 소총을 멘 채 차 옆에 서서, 한 쌍의 남녀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때? 지프가 보여? 저쪽에서 여러 사람이 있는 게 느껴지는데.”
외골격 장치의 어깨를 붙잡은 장목화가 목을 쑥 내밀어 용여홍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입니다.”
“용여홍은 괜찮아?”
성건우의 발걸음이 전에 비해 느릿해진 것을 발견한 백새벽이 물었다.
성건우는 웃으며 답했다.
“아주 괜찮아. 그새 친구들도 사귀었네.”
피식 웃던 장목화가 말했다.
“가서 보자고.”
성건우는 곧장 속도를 높여 지프를 향해 질주했다.
쿵, 쿵, 쿵.
그는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크게 내, 용여홍과 그의 곁에 있던 한 쌍의 남녀가 이쪽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두 남녀와 용여홍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검은 군용 외골격 장치를 목격한 남녀는 급변한 표정을 드러내더니, 곧장 몸을 굴리듯 회색 SUV 근처로 돌아갔다.
이때 지프는 이미 회색 SUV에 의해 작은 늪으로부터 끄집어내어진 상태였다.
성건우를 발견하고 반색한 용여홍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됐어?”
뒤이어 그는 그제야 기억이 난 듯 회색 SUV를 돌아보며 외쳤다.
“걱정 마, 내 동료들이야!”
“누군데?”
근처로 다가온 성건우가 물었다.
회색 SUV 안에 있는 사람도, 밖에 있는 한 쌍의 남녀도 잔뜩 긴장한 채 그들을 경계했다.
용여홍이 얼른 답했다.
“길을 잘못 들어서 차가 늪에 빠졌어. 그런데 저 사람들이 그걸 보고 나서서 도와줬어.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야!”
장목화는 백새벽과 시선을 주고받다가 낮게 웃었다.
“일반적인 황야유랑자가 할 만한 짓은 아닌데⋯⋯.”
그녀는 성건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도 우리의 친절함을 보여줘야겠네.”
그 말에 성건우가 곧장 걸음을 멈췄다.
파워팩에서 뛰어내린 장목화와 백새벽이 각자의 총을 든 채 경계 태세를 갖추자, 그제야 용여홍의 곁으로 다가온 성건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외골격 장치를 좀 벗겨줘.”
성건우가 외골격 장치를 벗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회색 SUV 쪽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서로 잠시 상의를 하는 듯하던 그들 중 방금 전까지 용여홍과 대화하고 있었던 한 쌍의 남녀가 다시 이쪽으로 다가왔다.
삼십 대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은 각져있었고, 피부는 거칠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구세계에서 소위 정장이라고 불렸던 옷을 입은 채, 허리와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물론 그 정장은 움직이기 편하도록 개량되어 있었다.
구조팀이 이전에 마주쳤던 황야유랑자들과 달리, 그의 옷은 낡은 데다 곳곳에 기운 흔적이 있긴 했지만 너덜너덜해 보일 정도로 남루하지는 않았다.
스무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여자 역시 검은 머리카락과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국방색의 카무플라주 패턴이 들어간 옷을 입은 그녀의 생김새는 나름 괜찮은 편이었지만, 무표정한 얼굴이라 어딘가 쌀쌀맞아 보였다.
그녀의 목과 옷의 경계 부분에서 흑청색 문신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각각 자동소총을 메고 검은색 권총을 든 그들은 구조팀과 4,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도와줘서 고맙군!”
장목화가 큰소리로 외쳤다.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이었어.”
삼십 대 사내가 덤덤하게 답했다.
그러자 장목화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애쉬랜드에서 도덕성은 사치품, 아니, 레어템이잖아.”
“구세계가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도덕성까지 포기할 수는 없지.”
사내는 도덕성을 유지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내 그가 큰소리로 물었다.
“너희들도 웨이루 역 북쪽으로 가는 거냐?”
“사람을 찾으러 가는 모양이지?”
장목화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이름이 뭐지?”
사내가 솔직하게 답했다.
“오수혁, 중급 사냥꾼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덧붙였다.
“모르는 것 같은데, 웨이루 역 북쪽에서 폐허가 된 구세계 도시가 하나 발견됐어. 이전까지는 발견된 적 없던 곳이지.”
이전까지는 발견된 적 없는 폐허 도시?
성건우와 용여홍, 그리고 백새벽은 저도 모르게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미간을 살짝 구긴 장목화가 물었다.
“너희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제 밤, 늪 안쪽에서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어.”
오수혁은 동료를 힐끔 바라보며 숨김없이 답했다.
“누군가가 그 폐허 도시에 들어가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발견하고, 무선 통신기로 그 사실을 위드 시티의 회사에 전했어.
발견된 적 없는 도시 유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알고 있겠지?”
장목화를 비롯한 구조팀이 답을 하기도 전, 그는 자문자답을 하듯 말을 이었다.
“위험과 행운!
그곳에 있는 물건과 자료, 비밀은 수많은 유적 사냥꾼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해. 너무나 많아서 쟁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지.
하지만 도시 폐허에 존재하는 자체적인 위험은 더욱 무시무시하고 직접적이야. 그런 위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힘을 모을 수 있는 동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새롭게 발견된 구세계 도시 유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안에 남아 있는 무심자가 어떤 변이를 했는지, 그 안에 어떤 위험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유적 사냥꾼들은 연합을 결성하여 함께 탐색하는 편이었다. 이들은 서로 경계하지도, 경쟁 상대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 폐허 도시에 있는 풍부한 각종 자원은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굳이 남의 몫을 욕심낼 필요까진 없기 때문이었다.
유적 사냥꾼 집단 안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개척이라고 불렀다.
장목화는 오수혁의 제안에 전혀 놀라지 않으며, 일단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비롯한 팀원들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한테는 다른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오수혁이 대꾸하기 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웨이루 역 북쪽에 이상 현상이 적잖게 발생했다고 들었어.
너희도 알고 있을 심야의 포효뿐만 아니라, 기묘한 죽음을 맞은 이들도 몇몇 있었다더군. 겉보기엔 어떠한 외상도 없었지만 일그러진 표정, 혹은 괴이한 웃음을 드러낸 채 죽어있었대.”
그녀는 해리스 브라운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오수혁에게 전했다. 늪에 빠질 뻔한 지프를 꺼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장목화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오수혁은 고개를 돌려 냉담한 표정의 여자 동료에게 말했다.
“여향, 네가 보기에는 어때?”
카무플라주 패턴이 들어간 국방색 옷을 입은 여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겠어.”
오수혁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목화를 돌아보았다.
“알려줘서 고마워. 주의하도록 하지.
하지만 이건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야. 게다가 앞으로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지. 그러니 절대 놓칠 수 없어.
애쉬랜드에선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쟁취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몇 일찍이든 몇 년 늦게든, 죽음을 면치 못하니까.”
굳은 의지를 드러낸 그가 장목화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대에게 새로운 폐허 도시를 탐색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도록 하지. 다음에 또 볼 수 있기를 바라자고.”
예의 바르게 작별을 고한 오수혁이 동료와 함께 회색 SUV로 돌아갔다.
“그래, 다음에 또 볼 수 있기를 바라자고.”
장목화가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은 애쉬랜드에서 가장 훌륭하고 간절한 기원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는 누구라도 굶주림, 질병, 기습, 그리고 천재지변으로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가 있었다. 그만큼 누군가와 재회하는 것은 매우 진귀한 일이었다.
멀어져가는 회색 SUV를 눈으로 배웅하던 장목화는 그제야 돌아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다.
이전까지는 발견된 적 없는 도시 유적이라면, 진귀한 1차 자료들을 잔뜩 찾을 수 있을 텐데.”
백새벽이 북쪽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정말 안 가실 거예요?”
“내가 그렇게 앞뒤가 다른 사람으로 보여?”
장목화가 웃으며 반문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성건우와 백새벽, 그리고 용여홍을 볼 수 있었다.
“하하.”
어색하게 웃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건 전술이었잖아, 알지? 전술.”
동시에 그녀는 세 팀원에게 반박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백새벽을 놀렸다.
“왜? 황야유랑자의 피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그 폐허 도시에 가보라고 충동질을 해?”
백새벽은 잠시 침묵하다가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렇다기보다는, 습관에 가까워요.
이 사실을 접한 황야유랑자라면 누구라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거든요.
입을 옷도 없고 식량도 다 떨어진 채로 겨울을 보내다가 얼어 죽느니, 그곳에 작은 희망이라도 걸어보는 거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장목화가 성건우와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만약 우리 구조팀이 구성된 지 반 년 정도 지나서 여러 임무를 완수한 상태였다면, 나도 계획을 완전히 수정해 웨이루 역 북쪽으로 돌아가려 했을 거야.
하지만 우리 중 두 명은 땅 위로 처음 올라온 신입이고, 그곳에 이상 현상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야. 난 초짜인 너희 둘을 데리고 모험을 할 수 없어. 너희들의 목숨을 내 기대감의 포석으로 깔 수 없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얌전히 듣고 있던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까진 저더러 아주 잘해왔다고 그러셨잖습니까. 제가 땅 위로 처음 올라온 신입이라는 것을 깜빡했을 정도로요.”
“⋯⋯뭐라고? 잘 안 들리네.”
장목화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성건우가 했던 말을 반복하기 전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우리 구조팀의 팀원 하나하나는 다 소중하고 귀한 자원이야. 그런 너희들을 함부로 희생시킬 순 없어.”
뒤이어 장목화가 진지한 얼굴로 백새벽에게 지시했다.
“지도를 보고 우리의 현재 위치를 파악해.
우리는 새로 발견되었다는 그 도시 폐허로 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소식을 회사에 전달하기는 해야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회사에 의탁하고 있는, 동시에 무선 통신기를 갖춘 황야유랑자 거점을 찾아야겠어.
해리스 브라운이 제공한 정보와 로봇 승려 정법에 관련한 정보도 다 회사에 전달할 거야.”
“네.”
백새벽은 조악하게 그려진 지도를 꺼내며 답했다.
이때, 용여홍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했다.
“팀장님, 정법은 처리했나요?
그자가 또 저희를 추격해올까요?”
장목화는 피식 웃었다.
“그가 언제든 추격해올 상황이었다면, 내가 여기에서 오수혁이랑 편하게 수다나 떨고 있었겠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용여홍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정법을 완전히 처리한 건 아냐.”
순간 용여홍의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자, 장목화는 그 모습을 보고 또 웃었다.
“우리가 중상을 입혔으니, 당분간은 쫓아오지 못할 거야.
그가 수리를 마칠 때쯤 우리는 그의 추격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겠지. 검은 늪 황야는 굉장히 넓으니까, 그에게 따라잡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