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대가
장목화는 폐허가 된 철강공장의 구조를 어느 정도 또렷하게 파악하고 있었기에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 정도 거리라면 안전을 보장할 순 없겠는데⋯⋯? 로봇 승려의 감청 시스템은 상당히 뛰어나.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소리도 포착할 수 있지.
새벽아, 소모될 전기량이나 차가 뒤집힐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지금의 속도를 유지해.”
용여홍은 그제야 장목화가 이미 꽤 무거운 유탄발사기를 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그 발사기에는 폭발력이 더욱 강한 유탄이 장착되어 있었다.
“팀장님, 정법은 우리가 승려 교단과는 인연이 없다고 말했어요. 이렇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는 얼른 중요한 정보를 보고했다. 장목화에게 과민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장목화는 백미러를 살피며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냐.
너희들도 배웠겠지만, 영생인의 기술에는 특정한 결함이 존재해. 모든 로봇 승려에게는 많건 적건 정신적인 문제가 따른다는 거야.
이러한 문제는 승려마다 서로 달라. 그리고 회사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애쉬랜드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는 로봇 승려 중 하나인 정법은⋯⋯.”
장목화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여자를 증오해!”
“예?”
성건우와 용여홍은 그 말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까지 인지하지는 못했다.
장목화가 운전을 하는 백새벽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정법은 여자를 마주치기만 해도, 심지어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발작을 하면서 주위의 모든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특정한 시체에 남은 흔적은 그에게 가학적인 강간범의 성향이 있음을 시사하기도 하지.”
“그저 로봇일 뿐이던데⋯⋯.”
용여홍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장목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 더 무시무시하다는 거지⋯⋯. 아 참, 외골격 장치는 누가 착용할래?”
성건우와 용여홍이 뭐라 답을 하기도 전, 돌연 진지한 표정을 드러낸 그녀가 말했다.
“조용.”
성건우와 용여홍 역시 뭔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틀어 창밖을 내다보며, 붉은 가사를 걸친 로봇 승려 정법의 인영을 찾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성긴 숲과 진창이 된 잿빛 흙, 검은 늪과 크기가 서로 다른 돌들밖에 없었다.
전방에는 수많은 웅덩이와 돌이 널려 있었다. 그래서 백새벽은 어쩔 수 없이 지프의 속도를 늦춰야 했다.
정말로 차가 엎어지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기 때문이었다.
장목화는 유탄발사기를 쥔 왼손을 슬쩍 내리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백새벽의 오른쪽 팔꿈치를 톡 건드렸다.
그러자 백새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왼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차의 속도를 더욱 늦췄다. 지프의 속도는 거의 평소와 같았다.
그러는 사이 지프의 양쪽 차창이 전부 활짝 열렸다.
그 순간이었다. 남루한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친 검은 인영이 길가의 나무 위에서 장목화가 자리한 조수석을 향해 펄쩍 뛰어내렸다.
로봇 승려 정법이었다.
하지만 미리 뭔가를 느낀 듯 유탄발사기를 들어 올린 장목화가 정법을 겨냥했다.
마치 정법이 곧 발사되려는 유탄을 향해 알아서 달려든 것 같았다.
그리고 유탄발사기에 장착된 유탄의 위력은 로봇 승려에게 상해를 가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했다.
장목화가 손가락에 힘을 주며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한 그때였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정법의 얼굴에서 붉은빛이 번쩍 발산되었다.
순간 장목화의 눈앞에 수많은 사람이 떠올랐다.
약간 흐릿해보이는 그들은 주위 바닥에 엎어진 채 미친 듯이 박박 긁어모은 흙과 자갈, 나뭇잎들을 입안에 쓸어 담고 있었다.
높이 솟아있는 배는 금방이라도 찢어져 버릴 것 같았지만, 그들은 배부름 따위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듯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려 했다.
장목화 역시 그들 중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생리적인 배고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도, 몇 년을 굶은 것처럼 무엇이라도 먹고 싶었다.
이러한 충동과 생각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어진 그녀가 방아쇠에 얹은 오른손 검지를 거두고 유탄발사기를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압축 비스킷 한 봉지를 꺼내 포장을 찢어버리더니 그 안의 내용물을 입에 쑤셔 넣었다.
물을 마시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이 뒤집힐 정도로 목이 막혀 오는데도 그녀는 계속해서 비스킷을 삼켰다.
그녀뿐만 아니라 백새벽 역시 브레이크를 밟더니 미친 듯이 에너지바를 씹어먹었다. 성건우와 용여홍도 각자가 가지고 있던 식량을 꺼내 광기 어린 만찬에 참여했다.
그들은 바깥에서 다가오고 있는 위험한 적에 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도 않았다.
로봇 승려 정법은 작은 소리와 함께 지프 옆에 깔끔하게 착지했다.
왼손으로 보조석의 문을 연 그가 오른손으로 장목화와 백새벽을 겨냥했다. 그 공격 범위에는 성건우와 용여홍도 포함되었다.
그와 동시에 장목회가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났다.
배가 불룩 부풀어 있던 주위의 흐릿한 인영들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같은 시각, 성건우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고개를 숙였다.
2초간 그대로 멈춘 정법은 레이저 무기를 사용하지도, 화염을 방사하여 네 사람을 정화하지도 않았다. 그는 붉은 눈빛을 몇 번 번득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소승이 너희들을 제도하려 할 것 같으냐?
소승은 너희들의 원대로 해주지 않을 것이다. 소승은 일단 너희들을 늪 깊은 곳으로 데리고 가, 누구의 방해도 없을 그곳에서 너희들을 충분히 즐길 것이다.”
그의 시선은 장목화와 백새벽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미미하게 변한 안색을 드러낸 장목화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이때 허리를 세운 성건우가 확인하듯 물었다.
“각성자입니까?”
“그래.”
서로가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여자 때문에 발작한 상황에서도 정법은 ‘불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모양이었다.
성건우의 자리를 관찰하던 정법은 계속해서 오른손의 레이저 무기와 화염방사기로 장목화와 백새벽을 겨냥하는 한편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소승이 중간에 앉아야겠군.”
정법은 감정 따위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차 안의 모두를 감시할 수 있으면서, 지프를 순조롭게 자신의 목적지로 몰 수도 있었다.
성건우는 민첩하게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상대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법은 그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거리낌 없이 뒷좌석의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성건우는 그런 그의 옆에 앉더니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여자에 대한 증오가 당신의 결함인가요?”
그는 ‘대가’라는 단어 대신 일반인들이 로봇 승려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하는 ‘결함’이란 단어를 말했다.
정법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
“아니, 내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바로 색욕이다.
원래는 로봇의 체내에 의식을 업로드하면 평정심을 얻어, 더 이상 그러한 욕망에 영향을 받지 않을 줄 알았어. 하지만 그렇지 않더군.”
성건우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대꾸했다.
“거짓말을 못 하는 게 대가인 줄 알았는데.”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교단의 계율이다.”
정법은 그의 질문에 착실하게 답해주었다.
“너희들은 곧 모두 해탈하게 될 것이니 알아도 상관없지.”
성건우가 지프의 문을 닫으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방금 그건 무슨 능력이었던 거죠?”
“육도윤회 중 아귀도다.”
붉은빛이 번득이는 정법의 눈이 백새벽에게로 향했다.
“운전해. 앞으로.”
성건우와 정법의 대화를 듣던 용여홍과 백새벽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허망함을 느꼈다.
정법은 그들을 학살할 곳으로 가도록 강요하고 있었지만, 성건우는 그와 마치 오랜 벗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백새벽이 엑셀을 밟은 그때였다. 장목화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알았다!
네가 여자를 증오하는 건, 지금의 육신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야. 의식 업로드라는 도피 행위는 오히려 네 결함을 몇 배로 증폭시킨 거지. 네 정신은 이미 뒤틀려 있어. 육체적인 폭력 행위를 통해서만 그런 결함을 완화할 수 있는 거야!
하하, 너희 교단에서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을 가르치지 않던가? 그 교단에 속한 중이면서 그렇게나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니!”
의식 파동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던 정법은 순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된 듯, 두 눈으로 붉은빛을 밝게 번득이며 몸을 앞으로 홱 기울였다. 당장 보조석에 앉아있는 장목화를 덮치려는 것 같았다.
그를 피하는 대신 기다렸다는 듯 왼팔을 뻗은 장목화가 검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정법의 목을 단번에 틀어쥐었다.
일찍이 준비하고 있던 왼손 검지가 곧 길게 늘어나더니, 미세한 은백색 전류에 휩싸인 채 정법의 목에 있는 작은 구멍을 파고들었다.
전기뱀장어형 생체 공학 의수에 달린 일종의 도구인 그것은 칩과 회로, 센서 등의 부품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컴퓨터 따위의 데이터를 읽어내고, 어느 정도 급의 방화벽을 파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봇 승려는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본질적으로는 인공지능 로봇과 다르지 않았다.
장목화가 왼손 검지를 정법의 목에 난 구멍에 쑤셔 넣자, 정법의 금속 몸뚱이가 전력을 잃은 가전제품처럼 그대로 멈춰버렸다.
백새벽은 엑셀에 얹었던 오른발을 떼고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장목화의 허벅지 위에 놓인 유탄발사기를 집어 들려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용여홍과 성건우 역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곧바로 반응했다.
용여홍은 빠르게 메고 있던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들어 정법의 뒤통수를 겨냥했다.
한편,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인 성건우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선사님⋯⋯.”
그때였다. 장목화의 몸이 보조석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러자 그녀의 왼손도 힘을 잃으면서 정법의 목을 놓았다. 멍한 눈빛을 드러낸 장목화가 기이한 말을 중얼거렸다.
“난 누구⋯⋯.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반면 원상태를 회복한 로봇 승려 정법은 왼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백새벽의 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녀가 유탄발사기를 쥐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탕! 탕!
용여홍이 쏜 총알은 정법의 뒤통수에 명중했으나, 사방으로 불똥을 튀기며 두 개의 작은 홈만 낼 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튕겨 나온 총알은 용여홍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쳐서는 지프차의 쿼터글라스를 긁고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광경을 목격한 성건우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아까 전에 못다 한 말을 마무리했다.
“당신에게도 인간의 의식이 있지만, 제게도 인간의 의식이 있어요.”
한쪽 무릎을 콘솔 박스에 얹은 정법이 한 손으로는 백새벽의 목을 틀어쥔 채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건우가 이전까지 그와 우호적으로 대화를 주고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인지, 정법은 그를 저지하는 대신 붉은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성건우가 빠른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각성자지만.
저도 각성자예요.
그러니까⋯⋯.”
그 말에 놀란 용여홍이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장목화의 멍한 눈빛도 약간 돌아온 듯했다.
정법의 눈에서 번득이던 붉은빛은 한동안 빠르게 깜빡거리더니 금세 차분해졌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친한 친구라는 건가?”
“맞아요!”
성건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