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8화 (38/649)

38화. 한바탕의 꿈

성건우와 용여홍이 듣기에 로봇 승려 정법의 말은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으로도 분명했지만,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도리어 더 아리송해졌다.

정법은 두 사람의 이런 마음의 소리를 알아차렸는지 어쨌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부처님 세자재여래께는 또 다른 이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요?”

용여홍이 물었다.

그러자 정법이 금속으로만 이루어져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장생(莊生)입니다.”

“장생⋯⋯. 달지기 장생⋯⋯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성건우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법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장생이 꾼 꿈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두 시주님도 꿈을 꾸실 테니 꿈속의 만물이 전부 허상이며, 그 안에서 느낀 모든 것과 만난 모든 것 역시 거짓 인연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만약 이 점을 깊이 깨닫지 못하신다면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생고, 노고, 병고, 사고,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성음고에 계속해서 허덕이게 됩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성건우와 용여홍은 어째서인지 맞은편에 자리한 로봇 승려의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이 세상이 정말로 어느 신령의 한바탕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때 정법이 화제를 전환했다.

“두 시주님, 잠시 기다리십시오. 소승에게 해야 할 일이 좀 있습니다.”

“⋯⋯.”

멍한 얼굴의 성건우와 용여홍은 승복과 가사를 걸친 로봇 승려가 복부의 금속 덮개를 열고 그 안에서 플라스틱병 하나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뒤이어 정법은 쇄골 부분의 나사를 풀어 그곳에 달린 작은 뚜껑을 연 후, 플라스틱병 안에 든 조금 진득해 보이는 노란색 기름을 그 안에 흘려 넣었다.

“그건⋯⋯.”

호기심이 인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그는 정법이 답을 해주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정법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전용 윤활유입니다.”

성건우와 용여홍의 표정은 동시에 굳어버렸다. 방금 전 상대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여겼던 게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전용 윤활유를 제자리에 돌려놓더니, 붉은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시주님은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성건우와 용여홍은 상대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몰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반고 바이오의 교과서 내용은 고문(古文)이 아니라 시와 성어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법은 개의치 않은 듯 흔히 쓰는 단어를 넣어 다시 물었다.

“두 시주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스물한 살이요.”

건우와 여홍이 동시에 답했다.

그러자 정법이 붉은 가사를 당겨 무릎을 덮으며 말했다.

“두 분 모두 아직 나이가 어리시니, 소승이 방금 했던 말을 듣고도 별생각이 안 드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삼십 년, 사십 년, 오십 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늙어가고, 육신이 허약해지고, 앓게 되는 병도 많아지고, 겪게 되는 비극 또한 많아지면 삶은 고통이라는 말을 마음으로 깨닫게 될 겁니다.”

성건우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살짝 벌렸던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가 진지한 목소리를 낸 건 그로부터 몇 초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유전자 개량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십 년이 흐른다 해도 육신은 아주 건강할 거예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던 정법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요. 긴 세월 속 오십 년과 백 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용여홍은 반박을 하려다가 정법의 왼팔에 달린 유탄발사기를 보고 방금 했던 생각을 얼른 포기했다.

“맞는 말씀이네요.”

성건우 역시 유탄발사기에 닿았던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정법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득였다.

“두 분은 꿈속의 무엇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소에 꿈을 꾼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해보세요.”

성건우와 용여홍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법은 감정 따위 어려 있지 않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진실은 있습니다. 꿈속의 진실은 단 하나, 그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인지입니다. 모든 사람은 꿈을 꿀 때도 자신이 자신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죠.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만물은 허무하지만, 의식만은 진실이라는 겁니다. 육신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의식을 장악해야만 이 꿈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리되면 정토에 진입하여 영생과 극락을 얻을 수 있지요.”

성건우가 습관적으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진정한 자신의 의식을 장악할 수 있는 겁니까?”

정법은 스스로를 가리켰다.

“장치를 이용해 의식을 로봇에 업로드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주 간단하게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하지만 일반적인 종교라면 자아의 수행을 강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용여홍은 반고 바이오의 교과서에 드문드문 나온 단어들을 조합해 질문했다.

정법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조롭고 기복이 없었다.

“정도(正道)가 삼천 개라면 샛길은 사만 개입니다. 각각의 길은 서로 다르더라도 모두 정토를 향해 있지요.

우리 승려 교단이 선택한 것은 삼천 개의 정도 중 과학 기술의 증도(證道)였고요.”

성건우와 용여홍은 복잡해지는 생각에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로봇 승려 정법의 말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육체라는 가죽 껍데기를 벗고, 자신의 의식을 로봇의 바이오닉 칩에 이식하면 극락정토를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애쉬랜드에서 말하는 신세계인 겁니다.

또한 이를 통해 불법을 깨닫고, 일정한 신통력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소승이 아까 전 두 시주님의 마음속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자비로우신 우리 부처님 보리께서 소승에게 신통술을 부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승의 과위(果位)가 아직 부족한 까닭에, 아주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까지는 들을 수 없지만요.”

‘왜 이런 결점까지 다 알려주는 거지?’

성건우와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법은 합장하며 부처의 명호를 낮게 읊조린 뒤 말했다.

“불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과위라는 건 뭔가요?”

성건우가 또 다른 질문을 내뱉었다.

그러자 정법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의식 업로드는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과학 기술 증도에서 과학 기술은 핵심이 아닌 보조 수단입니다. 기술은 우리가 더 좋은 조건에서 불법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지요.

육신이라는 가죽 껍데기를 버리고 나면,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불법과 모든 것의 공허함을 더 잘 깨닫게 되지요.

이것은 곧 하나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의 단계가 바로 과위입니다. 시주님이 대아라한(大阿羅漢)이라는 과위에 이르시면, 그제야 극락정토에 진입하여 이 세상을 초탈할 수 있는 겁니다.”

설명을 마친 정법이 성건우와 용여홍을 슥 훑어보았다.

“두 시주님에게는 심오한 이야기일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요.

소승이 보기에 두 분은 애쉬랜드 곳곳을 돌아다니게 될 것 같군요. 두 분께서 갖가지 세상사를 경험하시며, 삶은 고통이며 육신은 공허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되면, 소승이 두 분을 제도하여 유리 정토로 데려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정법이 자기가 알아서 설법을 마치는 걸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더는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후, 옆으로 물러나 길을 비켰다.

“소승의 법명을 직접 부르기 뭐하다면, 선사라 부르셔도 좋습니다.”

정법이 합장하며 말했다.

이내 가사를 홱 젖히며 원래의 길로 돌아간 그가 곧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떠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건우와 용여홍은 시선을 주고받은 뒤, 왔던 길을 따라 녹이 잔뜩 슨 강철 숲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대문 앞에 이른 용여홍이 주위를 둘러보며 거리를 가늠하더니, 황급히 무전기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팀장님, 승려 교단의 승려를 만났습니다!”

성건우 역시 팀장과 곧장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굳이 용여홍을 막지는 않았다.

- 뭐? 법명이 뭐였는데?

지직거리는 전파와 함께 장목화의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한편, 높이 솟은 굴뚝 부근.

폐허가 된 철강공장 깊은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던 로봇 승려 정법이 돌연 우뚝 멈춰 섰다.

붉은 눈빛을 확 밝히며 뻣뻣하게 목을 돌린 그의 입에서 극도로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인의 목소리⋯⋯.”

* * *

철강공장 대문.

용여홍이 무전기에다 대고 장목화의 질문에 답했다.

“정법이요! 정법이라고 했어요!”

무전기에선 2초간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지직, 지직, 하는 전파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뒤이어 장목화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장 철수해!”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무전기를 꺼버렸다.

성건우와 용여홍은 팀장이 왜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앞뒤 상황도 묻지 않고, 인연인으로 확정되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곧장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팀장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이는 안전부에 속한 그들이 외부 작전 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수칙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팀장의 경험과 판단을 굳게 믿을 뿐만 아니라, 기묘한 이론을 늘어놓았던 로봇 승려 정법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말없이 돌격 소총을 받쳐 든 후, 허리를 살짝 굽힌 채 철강공장 밖으로 빠르게 달렸다.

유전자 개량도 한 몸이고 오랜 시간 동안 훈련까지 받은 덕분에,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빠른 속도를 유지하면서 금세 망가진 시멘트 길로 나왔다. 그들은 곧장 지프가 숨어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더니, 그제야 속도를 조금 늦추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시동이 걸려있던 지프는 그들을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 운전석에 앉아있는 것은 백새벽이었다.

쾅! 쾅!

성건우와 용여홍은 곧바로 뒷좌석에 몸을 던지며 차 문을 닫았다.

한동안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전속력으로 밟아.”

백새벽에게 지시를 한 뒤 고개를 돌린 장목화가 뒷좌석에 탄 두 사람에게 물었다.

“무전기를 사용했을 때, 정법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어?”

“아주 멀리요. 우리는 철강공장, 헉, 대문 쪽으로 나와 있었고, 정법은, 아마, 헉, 아마 굴뚝 뒤쪽에 있었을 거예요. 서로를 볼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용여홍이 헉헉대며 답했다.

그는 공장에서 나오면서 정법이 어디에 있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는 상대의 방향과 헤어지고 난 후부터의 시간, 대략적인 속도에 근거하여 추론한 결과였다. 정확한 사실은 아니었으니 그저 참고 정도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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