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5화 (35/649)

35화. 아무것도

“여긴 어디지?”

용여홍이 별다른 기대감 없이 물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성건우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성건우는 시선을 거두고 오른쪽 팔꿈치를 아래로 내리면서,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의 총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외래진료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말투는 단호했다.

“뭐?”

흠칫 놀란 여홍은 네가 어떻게 그걸 아냐고 물으려다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반고 바이오 내 생활 구역의 각 층에 하나씩 배치된 작은 의무실은 빌딩 주민들의 두통이나 발열 같은 일반적인 병증의 치료를 담당했다. 이러한 의무실은 안팎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바깥쪽 방은 약국과 의사의 진료소를 겸했고 안쪽 방은 수액실과 주사실을 겸했다.

그뿐만 아니라 반고 바이오 내부에는 대형 병원 세 곳이 존재했다. 이 병원들은 서로 다른 층에 자리했으며, 주로 의무실에서 처치할 수 없는 환자를 맡았다.

어렸을 때부터 건강한 편이었던 데다가 부모님을 비롯한 손윗사람들도 큰 병에 걸린 적이 없던 용여홍은 그가 거주하는 층의 의무실과 대학교의 의무실만 방문해 보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병원이나 외래진료실로부터 받은 직관적인 인상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성건우는 어머니가 병에 걸려 돌아가시기 전 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바 있었고, 매일 학교와 병원, 집을 전전한 경험이 있었다.

성건우가 외래진료실을 단박에 알아본 그 이유를 대충 파악한 용여홍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성건우는 턱으로 단층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에는 외래진료실과 주사실, 수액실이 있었을 거야. 각각 하나씩만 존재했을 리는 없고.”

뒤이어 그는 건물 쪽을 돌아보았다.

“통로로 이어지는 가장 바깥쪽의 두 방은 약국이었겠지. 창문에는 약을 주고받을 틈만 빼놓고 쇠창살이 처져 있었을 텐데, 지금은 다 뜯어가 버렸나 봐. 어쩌면 기계실, 재무실, 화학 실험실 따위였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

용여홍은 반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돌격 소총을 받쳐 든 채 하나하나의 방을 수색했지만, 쓸모있는 물건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남아 있는 나무 책상과 의자가 전부 박살 나 있는 것으로 볼 때, 누군가가 땔감으로 쓰기 위해 부숴버린 모양이었다.

단층 건물의 마지막 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반쯤 닫힌 문을 발로 차서 연 용여홍은 백골이 된 두개골의 시커먼 눈구멍과 1초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그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더욱 높이 쳐들며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성건우가 좌우를 한 번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지 아주 오래됐어.”

그제야 마음을 놓은 용여홍은 방 안쪽의 상황을 자세히 살폈다.

나무 탁자 하나는 쓰러져 있었고, 누렇게 바래고 찢어진 종이들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책상 옆에 기대어 있는 백골엔 살점도, 옷가지도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손가락뼈 몇 개가 사라져 있었다.

“이전에 이곳에 왔던 유적 사냥꾼들이 시체의 팬티까지 다 벗겨갔나 봐.  야수들도 이곳을 방문했던 모양이고⋯⋯.”

어쨌든 힘겨운 훈련을 받아온 용여홍은 몇 가지 흔적을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파악해냈다.

그때, 작은 검은색 그림자 하나가 구석에서 휙 튀어나와 벽으로 달려가더니, 잘 보이지도 않는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쥐다.”

하마터면 녀석에게 총알 세례를 안길 뻔한 용여홍이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야 가능하지. 하지만 세균과 병균이 너무 많잖아. 잘못 먹으면 심각한 병에 걸릴지도 몰라.”

용여홍은 친구가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애써 설명했다.

“팀장이 이곳에 있었다면 분명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면 저런 건 안 먹게 좋아’라고 했을걸.”

성건우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넌 주위를 살펴.”

이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간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누런 종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 위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으나,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건우는 그나마 완전한 종이 몇 장의 윤곽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 종이들이 같은 공책에서 떨어져 나왔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위에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면, 그것 역시 누군가가 이미 가져갔겠지.”

용여홍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성건우는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일단 주워가서 팀장한테 살펴보라고 하자.”

말을 마친 그는 봉투와 플라스틱 핀셋을 꺼내 종이 몇 장을 챙겼다.

두 사람은 이 건물의 끝까지 한 번 더 탐색해 보았지만, 더 이상은 어떤 것도 찾지 못했다.

* * *

비탈길 쪽으로 돌아간 성건우와 용여홍은 이내 작은 광장 쪽으로 올라갔다. 맞은편 건물은 이미 허물어져 있었고, 가장 오른쪽의 4층짜리 건물은 녹색 담쟁이덩굴에 잔뜩 뒤덮여 있었다.

이 건물의 1층 대문 위쪽에는 붉은색으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미 녹이 슬어 색이 옅어진 글자가 담쟁이덩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드러났다.

「입원 병동」.

“역시 병원이었네.”

용여홍은 고개를 틀어 비탈길 옆쪽의 건물을 살폈다.

“이것도 병원의 일부였어. 그럼 무너진 저 건물이 바로 라디오 방송국이었나보다.”

무너진 건물의 맨 위쪽 벽돌은 이미 파헤쳐져 있었다. 유적 사냥꾼들의 전문성과 인내심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들어가 보자.”

성건우가 먼저 입원 병동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쪽에는 유리 조각과 동물들의 배설물이 잔뜩 널려 있었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어떤 병실 안에서도 침대는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병원 침대가 얼마나 무거운데⋯⋯.”

용여홍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밀 수 있잖아.”

성건우가 짧게 대꾸했다.

“절단 도구를 이용했을지도 모르고.”

“정말 아무것도 없네⋯⋯. 이게 바로 유적 사냥꾼의 위력인가?”

용여홍은 한숨을 내쉬며 성건우를 따라 2층, 3층, 4층으로 올라갔다.

병원 안의 분위기는 언제나 음침하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들이마시는 공기에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함이 섞여 있는 듯했다. 뭔가가 아주 오랫동안 썩고 남은 냄새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다 봤지? 아무것도 없어.”

용여홍은 못 참겠다는 듯 성건우를 채근했다.

“응.”

계단 근처의 화장실을 힐끔 살피던 성건우가 종이와 펜을 들고 벽에 붙어 병원 구역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가서 그리면 안 될까?”

용여홍은 주위를 서성거리며 물었다.

“다 됐어, 다 됐어.”

성건우의 손놀림은 나는 듯 빨랐다.

그가 입원 병동의 지도 안에 마지막으로 그려 넣은 것은 쪼그려 앉은 사람과 같은 기괴한 부호였다.

“그게 뭐야?”

여홍이 물었다.

성건우는 그에게 답하는 대신 옆쪽에 그것과 비슷한 부호를 다시 그리더니 선을 그은 후 설명을 달았다.

「화장실 있음.」

“⋯⋯.”

용여홍은 정말이지 더 이상 성건우와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 * *

지도를 마무리 지은 뒤 입원 병동에서 나온 두 사람은 비탈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주요 도로에 이른 그들은 다음 목표를 설정하기도 전, 철강공장 안쪽에서 나오는 두 개의 인영을 목격했다. 각자 자전거를 몰고 있는 그들의 등에는 소총이 한 정씩 매여있었다.

성건우와 용여홍은 자전거를 타고 있는 두 사람 역시 자신들을 발견할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덜컹! 덜컹!

등에 소총을 맨 두 사람은 곧장 자전거를 내버리더니 허둥지둥 부근의 장애물 뒤로 몸을 숨겼다.

이 광경을 보고 난 후에야 정신을 차린 성건우와 용여홍 역시 상대를 경계하기 위해 돌격 소총을 쳐들었다. 동시에 옆쪽으로 몸을 날린 그들은 병원의 입구인 두 개의 기둥 뒤쪽에 몸을 숨겼다.

주위는 순간 극도로 고요해졌다. 저 멀리 자리한 까마귀 소리만 이따금씩 들려올 뿐이었다.

성건우는 곧장 무전기를 집어들려 하는 용여홍을 보고 돌연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너희들을 해칠 생각은 없다!”

짧은 침묵 후, 저쪽에서도 가래가 낀 듯 약간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건우는 곧장 답했다.

“정보나 교환할까!”

몇 초 후 저쪽에서 답했다.

“이런 방식으로 대화하기는 불편할 것 같은데!”

“그럼 우리가 그쪽으로 가지!”

성건우는 깊은 고민도 하지 않고 제안했다.

장애물 뒤쪽에 숨은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성건우와 용여홍은 그 대화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쪽에서 답을 해온 것은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좋다!”

성건우는 그 말을 듣고 용여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앞에, 네가 뒤에. 백업과 엄호를 부탁해.”

“응.”

용여홍은 총의 손잡이를 들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알겠다는 수신호를 해 보였다.

성건우는 상대측으로 하여금 먼저 숨은 곳에서 나오게 하지 않았다. 돌격 소총을 쥔 그는 온몸에 잔뜩 힘을 준 채 숨어있던 기둥 뒤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 나왔다.

고도로 긴장한 그는 언제든 옆쪽으로 몸을 굴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그쪽에서도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상대는 30대로 보이는, 키 170센티미터 정도의 사내였다. 쪼글쪼글하고 더러운 데다가 서너 군데를 기운 짙은 남색 다운재킷은 무릎을 살짝 가릴 정도였으며, 머리가 벗겨진 까닭에 헤어라인은 심각할 정도로 높았다.

옅은 노란빛 머리카락과 연한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그의 이목구비는 비교적 또렷했다. 성건우나 용여홍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다른 생김새를 통해, 그가 레드리버인임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황야에서 활동을 해서 그런지, 그의 피부는 곳곳이 갈라져 있었으며 손톱은 거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소총을 쥔 채 조금씩 조금씩 성건우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내 그 둘의 거리가 대화를 나누기 편한 정도에 이르자, 용여홍과 상대편의 또 다른 사람도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슬금슬금 그들의 동료 곁으로 다가갔다.

“뭐라고 부르면 되지?”

머리가 벗겨진 사내는 방금 전처럼 레드리버어가 아니라, 성건우와 용여홍의 모국어인 애쉬랜드어로 물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마음을 놓지 않고 고도의 경계심을 유지했다.

“성건우.”

성건우가 침착하게 답했다.

“정식 사냥꾼이야, 당신은?”

성건우의 답을 가로채려 했던 용여홍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건우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의 유머를 이해해줄 이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 또 그 고질병이 도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머리가 벗겨진 사내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해리스 브라운, 중급 사냥꾼이다.”

그는 자신의 사냥꾼 배지를 제시하지도, 성건우에게 배지를 내놓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특수한 기계가 없는 이상 배지의 칩에 기록된 내용을 읽을 수도 없으며, 그 배지가 소지자의 것이 정말로 맞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야에서는 누구라도 사냥꾼으로 등록하거나, 적의 시체에서 찾아낸 배지를 가지고 사냥꾼이라 사칭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단순히 배지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상대를 사냥꾼 길드에 속한 이라 믿을 순 없었다.

배지에 이름을 새기는 기술도 아주 원시적이라 흉내 내기 쉬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배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 배지에 자신의 진짜 이름이 아닌 가명을 새겨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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