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토론
순간 장목화가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화를 벌컥 내면서 말했다.
“돌발적인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상황은 마구 변하고 있어서, 굳이 머리를 쥐어짤 필요가 없었다고!”
곧장 고개를 홱 돌린 그녀가 얌전히 듣고만 있던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넌 뭐 보충할 거 없어?”
백새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황야 강도 대부분의 목적은 물자를 빼앗는 거지, 살인이 아니에요.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전 지프와 그 안의 물자를 포기하려고 했을 거예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차를 늪 안으로 밀어 넣어 그들의 시선을 돌리고, 기회를 틈타 다른 방향의 늪으로 숨어드는 거죠.
거대 늪에는 사람은 들어갈 수 있지만,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무게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상당히 많아요.”
그녀의 말에 장목화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황야유랑자 출신과 대형 세력 출신은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마련이야. 잘 배웠지?”
짝짝짝.
성건우가 때를 놓치지 않고 손뼉을 치자, 용여홍 역시 무의식적으로 그를 따라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얼른 정신을 차린 그가 멋쩍은 듯 답했다.
“네, 하지만 소화하고 흡수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낮에 있었던 전투의 복기를 마친 네 사람은 어제처럼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계속해서 내리고 있는 비로 인해 날씨는 어제보다 더 추웠지만, 전두하가 그들에게 무료로 제공한 목탄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트렁크에서 두꺼운 면 코트를 꺼내 몸에 걸쳤다.
* * *
비는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긴 와중, 만물을 씻어내다가 날이 밝아올 때쯤 완전히 멈췄다.
해자마을의 배수 시스템은 거의 완벽했기 때문에, 밤새 내린 비로 인해 물이 고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축축한 지면의 일부가 진창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백새벽은 물을 좀 마시고 압축 비스킷을 먹은 뒤 지프의 부품을 교체했다. 그다지 어려운 수리는 아니었다.
이때, 이른 아침의 엷은 안개를 헤치며 다가온 전두하가 웃으며 물었다.
“고칠 수 있겠냐? 고칠 수 있다면 경기관총과 오토바이를 대가로 받아 가도록 하지.”
“그러세요.”
백새벽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알겠다는 뜻을 표했다.
전두하는 곧장 주위의 경비대원을 불렀다.
“이리 와, 저 경기관총을 옮겨.
아이고, 내가 준 것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받아 가는 것 같은데, 뭐하면 텐트 하나를 더 줄까?”
“좋죠.”
장목화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 순간, 전두하의 시선이 지프의 지붕 위에 놓인 검은 늪 철갑뱀의 가죽에 닿았다.
“이건⋯⋯.”
그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너희들이 잡은 거냐?”
어제 지프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먹구름도 끼고 하늘도 어두워졌을 때라, 지프의 지붕 위에 무엇이 쌓여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는 이것을 그저 검은색 텐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주위 경비대원들도 전두하를 따라 극강의 위압감이 느껴지는 뱀 가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늪 철갑뱀⋯⋯.”
개중 누군가는 그 악몽 같은 존재의 이름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장목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커서 가죽만 벗겨왔어요.”
해자마을 사람들은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장목화가 느끼기에는 난감할 정도의 적막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일도 없었던 장목화는 점차 시끌벅적해지는 마을의 분위기를 느끼고 떠보듯 물었다.
“촌장님, 마을을 좀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해도 괜찮을까요?”
“그럼! 어디에 가보고 싶으냐? 내가 데려다주지.”
전두하가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아니면 교실에 한 번 가보는 건 어떠냐? 우리 학교에 꽤 관심이 있어 보이던데.”
밝은 햇빛 아래, 그의 얼굴 주름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좋아요.”
장목화는 고개를 돌려 성건우에게 말했다.
“넌 날 따라와. 여홍이 너는 새벽이 곁을 지키고.”
성건우는 거절하지 않고 장목화의 뒤를 따라, 전두하와 함께 역삼각형 대형을 이루고 있는 세 채의 건물로 향했다.
그 건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각양각색의 집이 난잡하게 세워진 구역을 지나갔다. 어떤 집은 벽 뚫린 구명을 나무토막과 마른 풀로 억지로 메워놓았으며, 어떤 주민은 차가운 물 한 바가지로 배를 채운 뒤 황급히 마을 뒤쪽의 밭으로 향했다. 또한 어떤 천막은 밤새 내린 비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얼굴이 누렇고 비쩍 마른데다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각자의 일터로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성건우 일행이 이른 곳은 바로 시멘트로 만들어진 작은 광장이었다. 게양대에는 여전히 깃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그 위에는 어떠한 깃발도 걸려있지 않았다.
전두하를 따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던 성건우와 장목화는 맨 앞쪽 건물을 우회하여, 왼편에 자리한 뒤쪽 건물에 들어간 후 3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한쪽에는 난간이, 다른 한쪽에는 작은 교실들이 자리해 있었다. 빛은 나름대로 충분히 들어왔고, 통풍도 양호한 편이었다.
몇 걸음 더 나아가던 전두하가 두 사람을 이끌고 약간 큰 교실 앞에 이르렀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창 너머로 교실 안쪽에 놓인 스무 개 정도의 책걸상을 볼 수 있었다. 책상과 책상 사이의 간격은 매우 좁았으며 공간도 협소했다.
그 책걸상을 채운 것은 낡고 더러운 옷을 입은, 열 살이 채 안 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단상 위의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고 있었다.
개중 더러는 이른 아침의 추위에 아직 적응이 덜 된 듯 몸을 살짝 떨었고, 더러는 가슴팍에 안은 어린 동생을 수시로 달랬다.
남녀를 불문한 아이들의 생김새는 서로 달랐지만, 모두 허리와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 아주 정석적인 자세로 앉아있었다.
건우는 교실 안의 아이들을 슥 훑어보다가 벽에 붙은 시간표를 살폈다.
“아침체조⋯⋯ 상식, 어문, 수학, 역사⋯⋯.”
“중학년 학생들이야.”
진두하는 수업을 듣는 아이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잔뜩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장목화는 교실 안의 광경에 집중하고 있다가 네, 하고 답했다.
“애들 방해하지 말고, 가죠.”
* * *
전두하를 따라 해자마을 구경을 마친 두 사람이 헛간으로 돌아갔을 때, 백새벽은 지프의 수리를 마친 상태였다.
해자마을에선 식량이 너무나 부족했으며, 고기는 더더욱 부족했다. 이에 장목화는 더 이상의 거래를 시도하는 대신 전두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촌장님, 저희는 이만 갈게요.”
전두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
“저도요.”
장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수 있을 거예요.”
백새벽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들은 빠르게 짐을 싸고 지프에 올랐다. 이번 운전자는 장목화였다.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지프가 철망이 처진 대문으로 향하던 그때, 성건우와 용여홍을 비롯한 이들은 여러 집이 난잡하게 세워진 구역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주민들 대부분은 이미 경작이나 사냥을 하러 나간 터라, 그곳에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덕분에 그곳의 남루함과 쇠잔함은 더욱 짙게 느껴졌다.
이어지는 침묵 속, 구조팀원들은 그 역삼각형 대형의 건물 안쪽에서 입을 모아 책을 읽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침상 앞 밝은 달빛, 땅에 내린 서리 같구나.
고개 들어 밝은 달 바라보다, 고개 숙여 고향을 그리네.” *
(*이백, 「정야사(靜夜思)」)
해자마을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에 용여홍은 입을 벌렸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 명 모두 그 소리를 경청하고 있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프는 그렇게 대문을 지나 마을 밖으로 향했다.
“뭘 읽은 거야? 제대로 안 들려서.”
장목화는 백미러를 힐끔 바라보며 약간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상 앞 밝은 달빛.”
성건우는 《정야사》의 첫 구절을 반복했다.
“그렇구나⋯⋯.”
한숨을 내쉬던 장목화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운전에 집중한 채 늪과 구분하기 어려운 길을 따라 지프를 몰았다.
* * *
그 구역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무렵에서야 전방으로 고개를 돌린 백새벽이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회사의 정식 직원이 되려고 하는 건, 그래야 더 많은 책을 빌려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해.”
“그렇지⋯⋯.”
어렸을 때부터 반고 바이오에서 자라온 터라, 원하는 책을 마음껏 빌려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권리인지 알지 못했던 용여홍이 물었다.
“폐허가 된 구세계 도시에는 책도 없고, 도서관도 없어?”
백새벽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답했다.
“있어. 처음에는 꽤 많았대. 하지만 그때는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어.
그 후 대부분의 책은 대형 세력과 특정한 사람들이 가져갔어. 나머지는 일부 유적 사냥꾼과 황야유랑자들에 의해 땔감으로 쓰였고, 일부는 쥐나 벌레들에게 갉아 먹혀 못 쓰게 됐지. 그중 읽을만한 책은 극소수에 불과했어.
몇 차례 탐색되지 않은 폐허 도시에는 아직 대량의 책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지역은 굉장히 위험하지.”
잠깐의 침묵 후, 성건우가 불쑥 물었다.
“너, 글을 알아?”
“응,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어. 돌아가신 후에도 좋은 선생님을 한 분 남겨주셨고.”
백새벽의 표정은 점차 누그러졌고,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약간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한밤중 꿈에서 깨어나 무릎을 안은 채 앉아서, 초점 없는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돌려 백새벽을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전방을 주시하며 웃었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겠어?
내 형편없는 청력을 무시하는 거야, 뭐야? 너희들이 내 뒤에서 뒷담을 하는 건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라고.”
약간 즐거워진 용여홍이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팀장님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팀장님 앞에서 얘기하고 있어요.”
그와 동시에 성건우가 장목화의 질책에 대꾸했다.
그 대답에 용여홍은 조금 더 즐거워졌다.
“하하, 어때? 네 생각도 이제는 빤해!”
“내가 의도적으로 널 따라 한 건지도 모르잖아?”
성건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맞섰다.
“훌륭해. 야외 훈련을 할 때는 무엇보다 팀의 분위기가 중요하지. 조금 심각해진다 싶으면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정신이 과하게 긴장되고, 스트레스에 금세 짓눌려 버리니까.”
장목화가 말했다.
“좋아,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전 촌장의 경험에 대해 한 번 토론해볼까? 그가 설명했던 세부 사항으로부터 유용한 단서들을 뽑아내 보는 거야. 그러니까, 구세계 파괴에 관련된 것 위주로.”
성건우는 이미 생각해뒀던 듯 곧장 입을 열었다.
“무심자는 주로 비교적 큰 도시에서 나타났고, 촌락과 작은 마을에는 거의 없었다고 했어요.”
“촌락과 작은 마을의 파괴는 전쟁과 지질 재해의 결합으로 인한 결과 같아요.”
백새벽이 덧붙였다.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전쟁과 지질 재해는 어쩌면 같은 것인지도 몰라.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에 지질 무기가 생산되었을 수도 있지. 물론 이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니, 탐색을 통해 특정 폐허 도시에서 관련된 증거를 찾아야겠지만.”
용여홍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무심자의 출현과 전쟁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그들의 출현이 전쟁을 야기한 걸까요, 아니면 전쟁이 그들의 출현을 유발한 걸까요?”
“그건 지금으로서는 답할 수 없는 문제야. 아직 관련 자료와 정보가 매우 부족하니까.”
장목화가 웃었다.
“우리 구조팀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주요 방향이기도 하고.”
길을 살피다가 핸들을 돌리던 그녀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가며 팀원들의 생각을 이끌었다.
“무심자는 왜 초기엔 대도시에서 주로 나타났을까? 왜 촌락과 마을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도시에 인구가 더 밀집되어 있기 때문인가요? 그게 중요한 전파 조건일까요?”
성건우는 교과서에서 보았던 도시의 정의를 떠올리며 답했다.
그러자 백새벽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도시가 더 중요하니까 주요 목표가 된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장목화는 부정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이렇게 문답 형식의 토론을 계속해서 진행했다.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이를 통해 사고를 확장해 나가며 앞으로의 조사와 자료 수집의 방향을 더욱 잘 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