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예전
그로부터 1분이 더 지났을 때, 성건우 역시 밖으로 나와 손을 씻었다.
그들은 서로 입을 다물자고 암묵적으로 합의한 듯, 공용 화장실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은 채 더럽고 난잡한 집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러던 그때, 한 여자아이가 돌연 성건우의 앞으로 달려왔다.
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보풀이 잔뜩 인, 옅은 녹색 스웨터에는 구멍 두 개가 나 있었고,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의 재킷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하얗게 바랜 데다가 곳곳에 기운 자국이 남아있었다.
알 수 없는 재질의 하의는 남회색이었지만 이 역시 곳곳이 다른 색의 천으로 기워져 있었으며, 헌 옷으로 만든 듯한 검은 양말을 발에 신고 있었다. 비쩍 마른 아이의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지만, 눈만은 밝고 맑았다.
아이의 손에는 실, 천 조각, 색이 바랜 단추, 끊어진 머리끈, 안에 꽃잎이 박힌 유리구슬, 빈 성냥갑, 그리고 지우개 똥 덩어리 등 각종 쓰레기가 들려 있었다.
고개를 든 아이가 성건우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이거를 오빠가 가지고 있는 먹을 것으로 바꿔주면 안 돼? 조금만. 안 돼? 안 돼?”
헛간이 자리한 구석진 곳에서는 소고기 조림 냄새가 솔솔 풍겼다.
말없이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성건우는 아이가 다시 입을 열기 전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뻗어 아이의 손에 들린 각종 쓰레기를 뒤적거렸다.
그중 노란색 꽃잎이 박힌 투명한 유리구슬 하나를 고른 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면 되겠다.”
“⋯⋯고마워, 오빠. 고마워.”
여자아이는 흠칫 놀라는가 싶더니 곧 연거푸 감사 인사를 했다.
성건우는 곧장 장목화를 비롯한 이들이 자리한 헛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자.”
여자아이는 응응, 하고 답하더니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용여홍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좌우를 살피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 * *
잠시 후, 그들은 지프 근처에 이르렀다.
“누구야?”
장목화는 성건우를 따라온 여자아이를 가리키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성건우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답했다.
“아주 좋은 물건 하나를 소고기 한 덩어리랑 바꾸기로 했어요.”
곧장 자리에 앉은 성건우가 자신의 그릇과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시작해도 될까요?”
“그래.”
얼떨결에 답을 한 장목화가 전두하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성건우는 얼른 소고기 한 덩어리를 건져 그릇에 담은 후 여자아이에게 건넸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그릇을 얼른 받아든 여자아이는 고기를 황급히 입에 쑤셔 넣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성건우는 그릇과 젓가락을 빼앗았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홱 들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입 데일라.”
성건우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작게 타일렀다.
허벅지 위에 그릇을 올린 그는 젓가락을 이용해 작지 않은 소고기 한 덩어리를 천천히, 세심하게 여러 조각으로 나누었다.
분할을 마친 뒤에는 그중 한 조각을 집어 여자아이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고기를 받아먹더니 허겁지겁 씹었다.
“맛있어?”
성건우는 아이가 그 고기 조각을 다 먹을 때까지 가만히 바라봐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맛있어!”
건우는 피식 웃으며 또 한 조각을 집어주었다.
“너⋯⋯.”
장목화는 이 광경을 보고 못 참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저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성건우는 각양각색의 집들이 난잡하게 자리한 광장 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스무 명 정도의 어린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의 손에는 각종 쓰레기가 한 움큼씩 들려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성건우는 흠칫 놀라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찬가지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웃으며 고개를 돌린 전두하가 큰소리로 외쳤다.
“다들 돌아가! 돌아가!”
슬금슬금 다가오던 아이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세 번씩 이쪽을 돌아보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고개를 돌린 전두하가 건우를 향해 놀리듯 말했다.
“이제 이런 거점의 질서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겠지?”
계속해서 성건우를 자극하고 싶지 않다는 듯 끼어든 장목화가 물었다.
“촌장님, 방금 저희가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이들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저 아이들도 어른을 따라 노동을 하나요?”
전두하는 몸을 돌려 역삼각형 대형으로 자리해 있는 건물 세 채를 가리켰다.
“아이들은 저곳에서 수업을 듣지. 수업은 어른들이 돌아올 때쯤 끝나고.”
“수업을 듣는다고요?”
장목화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직도 교실 수업 방식을 유지하고 계세요?”
이는 대형 세력을 제외한 애쉬랜드의 여러 황야유랑자 거점에서는 굉장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적어도 장목화가 이전에 가봤던 거점들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삶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힘든 사람들에게 힘과 자원을 들여야 하는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것은 상당한 낭비라고 할 수 있었다. 인력은 그들이 가진 자원 중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었고,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교사와 집이나 논밭에서 일을 돕지 않는 아이들은 많은 사람이 모인 거점에서는 사치스러운 것에 속했다.
이런 곳에서는 부모나 손윗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가끔 아이들에게 상식과 농사, 채집, 취사, 청소, 사격, 사냥, 출산 및 육아 등을 가르칠 뿐이었다.
전두하가 웃으며 답했다.
“해자마을에 들어온 외부인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굉장히 의아해하더군. 분명 우리가 갖춘 조건으로 학교를 유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아. 다들 아끼고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야만 이러한 전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지.”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비가 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기억을 더듬으며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맨 처음에 아이들에게 정식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던 건, 선유심이라는 아저씨였어.
그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쳐 글을 읽게 하고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지. 그래야만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해자마을의 주민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지, 어떤 문화와 역사를 가졌는지 기억할 수 있다는 거야. 또한 언제나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이렇게 끔찍한 환경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살 수 있다고도 했고.
나 역시 선 씨 아저씨의 제안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내가 했던 생각은 아주 간단했어. 매번 폐허 도시에서 가져온 물건과 설명서에 모르는 글자가 조금씩 있더라고. 설령 다 아는 글자라고 해도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했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을 때가 있었어. 글을 모르면 그 물건을 제대로 이용할 수가 없는 거야.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지. 최근에 들어서야 난 당시 선 씨 아저씨가 했던 말의 뜻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어.”
자리에서 일어난 전두하가 역삼각형 대형의 건물 세 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예전에는 어떤 곳이었는지 아나?”
백새벽과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은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저곳은 예전에는 해자마을의 학교였어. 저기는 농구장, 저기는 게양대, 저기는 교사 숙소, 저기는 학생 숙소, 저기는 컴퓨터실, 도서실, 그리고 실험실이 있는 곳이었고 저기가 학습동이었지⋯⋯.”
하나하나 설명해나가는 전두하의 얼굴에 어렴풋하게 화로의 불빛이 비쳤다.
장목화와 성건우를 비롯한 이들은 어두운 하늘 아래 건물 세 채의 윤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인데도, 전두하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시선으로 열심히 쫓았다.
이내 손을 거두고 돌아선 전두하가 맨 처음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저곳은 예전에는 학교였어.”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고 또 엄숙했다.
장목화나 다른 이들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 자리에 다시 앉은 그가 자조하듯 웃었다.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해. 저 작은 학교를 없애고 싶어 하는 건 아니지만, 교육은 원래 있던 주민들에게만 제공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지. 나중에 들어온 황야유랑자들에 대해서는 먹을 것만 제공해줘도 큰 관용을 베푸는 셈인데, 왜 그 이상의 자원을 낭비해야 하느냐는 거야.
그들은 원래 주민, 그중에서도 경비대원의 핵심 구성원이 토지를 분배해 나눠 갖고, 나중에 들어온 황야유랑자들은 그 땅을 빌려 쓰면서 일정한 수확량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해.
또한 그들은 황야유랑자들이 경비대에 들어와서는 안 되고, 그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무기를 손에 넣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
이 대목에서 전두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위엄과 명망을 이용해 그런 여론을 억누를 수 있어. 누구도 감히 내 의견에 반대하지 못하지. 기껏해야 사적인 원망만 품고 말 거야. 하지만 내가 죽고 난 뒤에 해자마을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군.
이제 그만 하지. 먹자고, 먹어.”
해자마을의 내부 사정에 대해 장목화와 백새벽은 어떠한 의견도 제시할 수 없었다. 그저 손님의 태도를 유지한 채 압축 비스킷과 에너지바, 그리고 전두하가 사람을 불러 가져오게 한 잡곡빵에 냄비 안의 소고기 조림을 곁들여 먹을 뿐이었다.
성건우는 다급히 식사에 끼어드는 대신 잘게 자른 고기 한 점 한 점을 옆쪽의 여자아이에게 먹여주었다.
눈치가 빠른 꼬마 아가씨는 제 몫을 다 먹은 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성건우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고마워, 오빠!”
인사를 마친 아이는 남은 쓰레기들을 가지고 폴짝폴짝 뛰어 각양각색의 집들이 난잡하게 세워진 구역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원래는 몇 개의 농구장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던 자리였다.
“인사법이 아주 정석이네.”
성건우는 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칭찬했다.
“선생님한테 배운 거다.”
전두하가 뿌듯하다는 듯 대꾸했다.
성건우는 아이가 떠난 뒤에도 소고기 조림은 건드리지 않고, 물과 함께 누르스름한 잡곡빵만 먹었다.
장목화는 그런 그에게 소고기 조림도 먹으라고 권하는 대신, 식사를 이어나가며 전두하에게 구세계 파괴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전두하의 경험 대부분은 긴장감 넘치지도 않고 아주 건조하기만 했다. 해자마을이 지리적으로 좋은 곳에 위치한 덕분에, 외부에서 기인하는 시련에 거의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장목화를 비롯한 이들은 그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었고, 이러한 반응에 신이 난 전두하는 심지어 사냥을 나갔다가 아내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도 해주었다.
모든 이들의 배가 거의 불러왔을 무렵, 성건우는 그제야 남은 소고기 조림을 건드리며 손에 들린 잡곡빵을 그 소스에 적셔 먹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이로군.”
전두하는 배를 두드리며 땅바닥에 떨어진 담뱃재를 바라보았다.
“난 이만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내 결재를 기다리는 마을의 일들이 있거든.”
순간 뭔가를 떠올린 장목화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촌장님, 질문이 있어요.”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