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마을에 들어가다
아직 저녁이 되지 않은 이때 해자마을의 주민 중 일부는 마을 뒤쪽의 밭에서 경작 중이었고, 다른 일부는 무리를 이루어 밖으로 사냥을 나가 있었다. 그래서 마을 안에 있는 주민은 얼마 되지 않았다.
주민들은 빽빽하게 자리한 집에서 나와 있거나 유리창에 붙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다들 공통적으로 얼굴이 깨끗하지 못했고,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했으며, 체형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눈은 백새벽이 다른 지역에서 만난 황야유랑자들보다 훨씬 맑았다.
“촌장님, 최, 최근에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백새벽은 다른 이들을 보고도 개의치 않고 전두하를 보며 어색하게 물었다.
그러자 전두하가 자조하듯 웃었다.
“아직은 괜찮지만, 점점 추위가 두려워지는구나. 이거 봐, 아직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옷을 껴입고 있잖냐. 하, 이번 겨울을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 그럴 수 있을 거예요.”
백새벽은 전두하와 함께 빽빽하게 자리한 집들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역삼각형 대형의 건물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답은 단호했으나, 그 말투에선 확신이 느껴지지 않았다.
“위로할 필요 없다.”
전두하는 흰 수염이 돋아난 턱을 쓸며 말했다.
“난 벌써 일흔일곱이다! 구세계의 파괴를 직접 겪고 여태까지 살아온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게다가 내 자식들도 다 떠났지. 기어코 몇 년을 더 살아 신세계를 찾아낸다 한들,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휴, 남이가 여태 살아있었다면 딱 너만 했을 텐데⋯⋯.”
“⋯⋯적어도 신세계를 보실 수는 있잖아요.”
한동안 침묵하던 백새벽이 말했다.
동시에 그녀는 곁눈으로 주위에 난잡하게 자리한 집들을 살폈다. 그 문과 창문 앞에는 플라스틱병, 유리병, 오래된 종이 판자, 단추, 낡은 헝겊,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부품들, 길고 짧은 전선들, 금속 병뚜껑, 버튼이 빠진 컨트롤러, 금이 간 거울집, 탄피, 스코프, 녹슨 안경테 등의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꼭 쓰레기장이나 분리수거장에 온 것 같았다.
전두하가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세계라⋯⋯. 그게 어디 있는지 누가 알겠냐⋯⋯.
젊은이들이야 믿을 수 있겠지. 적어도 희망을 품게 해주니까. 하지만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됐다.”
* * *
한동안 말이 없던 백새벽이 좌우를 한 번 두리번거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아직도 외부에서 온 황야유랑자들을 받아 주고 계세요?”
전두하는 그녀를 따라 난잡한 주위의 집들을 둘러보았다.
“아니.”
그는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황야유랑자를 받으면 경작지가 부족해져.”
그는 자조하듯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처럼 마음 약한 사람이야 남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하고, 그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하지. 하지만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사실 황야유랑자를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해. 지형 때문에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할 수 없고, 전체적인 수확량에 한계가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사람이 많아지면 한 명에게 돌아가는 양이 자연히 줄어드니까.
이전에야 노동력이 부족하면 밭을 놀리게 된다는 이유로 그들을 압박했지만, 지금 우리는 뒤쪽에 있는 숲에서 버섯까지 재배하고 있다. 하하, 나도 늙어서 몸이 갈수록 예전 같지 않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볼 기회가 없으니 동정심을 느낄 이유도 없더구나.”
백새벽이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늙었다는 얘기 좀 그만 하세요. 겉보기에는 너무 정정해 보이시거든요?”
“알겠다, 알겠어.”
전두하는 머리에 쓴 털모자를 고쳐 쓰며 웃었다.
“구세계의 도시 폐허에는 정말이지 좋은 물건들이 있어. 이전에 만식이랑 우찬이를 비롯한 이들이 그곳에서 《버섯 종식 및 재배 기술》이라는 책을 찾아왔는데, 그 책에 나온 대로 해 보니 정말로 뭔가가 길러지더라고.”
백새벽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대꾸했다.
“버섯 좋죠. 맛있고.”
이내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촌장님, 약속할 순 없어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기회가 생기면 생산량이 높은 종자와 밭에 쓸 비료를 팔아드리겠다는 것뿐이에요.”
전두하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거 좋지!”
말을 하는 사이 광장을 통과한 이들은 역삼각형 대형으로 놓인 세 채의 건물 부근에 이르렀다.
시멘트로 지어진 작은 광장 오른쪽, 그러니까 가로로 놓인 공용 화장실 전방의 텅 빈 공간에는 대여섯 대의 낡은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유백색의 세단, 은색 소형트럭, 차체가 높은 대형트럭, 10명이 넘는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중형버스, 독특한 모양의 전기차⋯⋯.
그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적잖은 이륜차와 삼륜차도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더러는 전기 에너지를 이용했고, 더러는 연료가 필요했으며, 더러는 순수하게 사람의 힘만을 요구했다.
모든 차량 위쪽에는 거대한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왼쪽으로는 세 개의 방이 나란히 자리해 있었다. 서로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 방들에는 각양각색의 부품들이 채워져 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망가진 것도 있었고,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것도 있었으며, 상태가 양호한 것도 있었고, 바람 빠진 축구공, 농구공과 함께 뒤섞여 있는 것들도 있었다.
“필요한 게 있는지 살펴봐라.”
전두하가 세 개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부 폐허가 된 도시에서 뜯어온 것들이야.”
백새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창고에 들어가 슥 한 번 훑어보았다.
이내 그녀가 손가락으로 각각의 부품을 가리켰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요⋯⋯.”
전두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다.
뭘로 교환할 생각이냐?”
그는 촌장이었지만 마을 안의 물건을 무료로 내어줄 자격은 없었다.
물론 그의 권위와 그를 향한 마을 주민들의 존경심을 볼 때,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전두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원칙을 어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이렇게 존경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백새벽이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음식?”
전두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필요 없다.
올해 줄곧 이어진 이상 기후 때문에 수확량이 썩 좋지는 않지만, 고작 20퍼센트만 감소했을 뿐인 데다가 지난 3년 동안 남겨놓은 것도 있으니 이번 겨울을 버티는 데에는 문제없겠지.
만약 너희가 돼지 몇 마리와 소 몇 마리를 가져와 준다면 나야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서 덤까지 얹어주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해자마을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고기였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밖으로 파견을 나간 사냥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마을 안에서 키울 수 있는 닭과 오리, 거위 등의 수는 사람 먹을 음식조차 부족한 상황에 계속해서 줄어들었으며, 때때로 도는 병으로 인해 한순간에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
백새벽은 음, 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제가 타고 온 오토바이는 어떠세요?
연료를 넣어야 하긴 하는데, 마을에서는 연료를 얻을 곳을 찾을 수 있잖아요.”
“폐허가 된 몇몇 도시의 유류 창고에는 아직 적잖은 기름이 남아 있지.”
전두하가 늙은 여우처럼 씩 웃었다.
“다른 건 없냐? 그 오토바이야 우리한테는 보기 좋은 것 외에 무슨 쓸모가 있겠어? 한 번에 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백새벽은 일찍이 준비해뒀던 대로 답했다.
“경기관총 한 대요. 7.92밀리미터짜리.”
“경기관총?”
전두하의 주름진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거라면 마을을 지키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지. 그 규격에 맞는 총알도 가지고 있거든.”
백새벽이 답하기 전, 그는 급기야 손뼉까지 치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거래하는 걸로!”
“좋아요, 하지만 일단 돌아가서 팀원들과 상의해야 해요.”
백새벽은 장목화와 소통하고 협상할 수 있음에도 단번에 응했다. 그들에게 그 경기관총은 쓸모도 없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전두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미간을 살짝 구겼다.
“곧 비가 올 거다. 시간도 늦었고. 계속해서 황야 위에서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음, 네 동료들을 데리고 와 이곳에서 하룻밤 쉬었다 가라. 무장을 해제할 필요는 없어.
너한테 인정받은 동료들이라면 나쁜 녀석들일 리 없으니까.”
백새벽은 약간 의아하다는 듯 전두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 끝에서 점차 밀려들고 있는 먹구름을 보았다.
“일단 팀원들의 의견을 물어볼게요.”
그녀가 답했다.
전두하는 머뭇거리는 백새벽을 질책하지 않고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얼른 가봐. 더 꾸물거렸다가는 비를 맞게 될 게다.”
* * *
곧장 해자마을에서 나온 백새벽은 총을 챙긴 뒤 오토바이를 타고 장목화와 성건우, 그리고 용여홍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거래 내용과 전두하의 호의에 대해 전달했다.
“팀장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새벽은 대형 오토바이에 기댄 채 장목화의 결정을 기다렸다.
장목화는 전두하와 해자마을 사람들이 앙심을 품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은 채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촌장이 일흔일곱 살이라고? 구세계의 파괴를 직접 경험하기까지 했고?”
백새벽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확실해요. 오랜 시간 줄곧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게다가 수시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고요.
오랫동안 해온 이야기라고 해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해봤자 이득도 없는 거짓말에 공을 들일 필요는 없죠. 촌장님이 그 이야기를 해준 대가로 제게 뭔가를 바라신 적도 없고요.”
장목화는 고개를 돌려 성건우와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그럼 가자.”
“팀장님, 위험하지 않을까요? 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황야유랑자는 언제든 강도로 변할 수 있다고요.”
용여홍은 마음 속 걱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러자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훌륭하네. 그런 걱정을 한다는 건 네가 성장했다는 거야. 하지만 우리의 화력이라면 미리 대비만 잘해도 그들은 감히 어쩌지 못해. 우리를 잡아먹으려면 서른 명 정도에서 쉰 명 정도의 희생이 필요할걸? 겨울까지 한 달이 조금 더 남은 이때, 아무리 먹을 것이 얼마 없는 상황이라고 한들, 그렇게까지 큰 대가를 치르려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우리와 황야의 야수들 중에 뭐가 더 위험할까?
물론 겨울이 되어서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에게는 이렇게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겠지.
하지만 거점 안은 좁기도 하고 환경에도 제약이 따라. 수가 적고 정예인 우리에게는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지.”
말을 하는 사이 장목화는 웃음기가 어린 눈으로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곧장 고개를 돌린 성건우가 용여홍을 바라보며 일부러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가 무슨 팀인지 잊었어? 우리의 직책이 뭔지 잊은 거야?”
“구, 구조팀이지.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팀⋯⋯.”
바보가 아닌 용여홍은 순간 장목화가 백새벽에게 했던 두 가지 질문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팀장님, 해자마을의 촌장에게 단서를 얻으시려는 거에요?”
“단서가 있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지. 전 촌장은 당시 어렸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 물어보기는 해야지 않겠어?”
장목화가 백새벽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네가 해자마을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면 나도 믿을게. 난 널 믿으니까.”
백새벽은 눈을 아래로 깔며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가요.”
“좋아, 그럼 출발하자!”
장목화는 곧장 운전석으로 돌아가 지프에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