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해자마을
다시 고개를 든 장목화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각성자는 모종의 이유로 기이하게 변이된 인간이야. 그들에게는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능력이 있지.
일찍이 어떤 사람들은 각성자의 능력을 우스운 것이라 여겼어. 하지만 나중에는 아무리 우스운 능력이라도 적합한 상황에서 사용한다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지.
지금까지는 어떤 세력에서도 각성자의 탄생 규칙을 밝혀내지 못했어. 인공적으로 각성자를 만들려 했던 모든 실험은 다 실패로 돌아갔지. 그래서 각성자의 수는 굉장히 적고, 만나기도 쉽지 않아. 그래서 여태 이들에 대한 설명을 생략했던 거야.
아 참, 이건 비밀 유지 사항이야.”
용여홍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팀장님, 그렇게 강한 각성자를 맞닥뜨리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하죠?”
성건우는 침묵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매우 강한 소수의 각성자를 제외한 나머지 각성자의 능력에는 범위의 제한이 따르고, 그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아.
그러니 만약 그들을 맞닥뜨리면, 일단 거리를 벌리고 총을 이용해 멀리서 처리하면 돼.”
“그렇구나⋯⋯.”
용여홍은 그러한 상황을 상상해보기 시작했다.
성건우 역시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내 장목화가 두 팀원을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그렇다고 그렇게 위험한 인간들에게만 너무 집중하지는 마. 우리의 육체는 나약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일고여덟 살의 꼬마에게도 살해당할 수 있으니까.”
* * *
대형 오토바이에 오른 백새벽은 한참을 우회한 끝에 진창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늪 안쪽으로 진입했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이동했을 무렵, 그녀의 앞쪽 노면에 붉은색의 작은 점 하나가 나타났다.
가볍게 흔들리는 붉은색의 광점.
경고였다.
백새벽은 곧장 오토바이의 속도를 낮추고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1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적갈색 벽이 세워져 있었다. 양옆으로 길게 뻗어있는 벽은 백새벽의 시야 끝에서 뒤쪽으로 꺾여 어딘가를 에워싼 듯 보였다.
벽을 이룬 벽돌 대부분은 얼룩덜룩하고 낡아 보였지만, 그중 일부는 최근 1년 안에 구운 새것처럼 보였다.
벽의 꼭대기와 외곽에는 녹이 잔뜩 슨 철망이 쳐져, 다닐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철망과 벽 사이, 그리고 벽 뒤쪽에 세워진 몇몇 나무 골조 위에는 더럽고 혼란한 양식의 옷을 입은 채 총을 든 순찰 경비대가 서 있었다.
백새벽에게 경고를 한 사람은 바로 맨 위쪽 골조에 선 경비대원이었다. 그는 빳빳한 누런색 셔츠를 입고 그 위에 군청색 재킷을 걸친 모습이었다. 면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 재킷을 입고 있으니 굉장히 부하고 비대해 보였다.
자동 소총을 맨 그 경비대원의 손에는 펜처럼 보이는 검은색의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백새벽의 전방에 나타난 작은 광점은 바로 그것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오토바이를 멈추고 헬멧을 벗은 백새벽은 귀를 겨우 가리는 단발머리를 뒤쪽으로 넘기려 애썼다.
자신이 여자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이는 매력을 발산하거나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긴장을 풀고 안심시키려는 행동이었다.
백새벽은 애쉬랜드에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남녀 모두 총기 앞에서는 똑같이 위험하나, 그래도 두 성별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체격으로 보나 침략성으로 보나, 남자는 여자보다 언제나 더 위험한 존재였다.
같은 낯선 사람이라고 해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경계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백새벽은 황야에서 유랑 생활을 하는 몇 년 동안 필요에 따라 위장을 해 성별을 속였다. 가령 폐허를 탐색할 때, 야외에서 사냥할 때, 비교적 위험한 지대를 관통할 때, 그리고 강도와 거래를 할 때는 긴 머리를 숨기고 얼굴에 칠을 해 남자로 위장했다. 반면 일정한 질서가 존재하는 거점이나 정보 및 구세계의 자료를 수집하려 하는 대형 세력의 유적 사냥꾼과 접촉할 때는 일부러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드러냈다.
그녀가 좋아하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단발 길이로 머리를 자른 건, 반고 바이오에 영입되면서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생긴 이후의 일이었다.
헬멧을 앞쪽에 내려놓은 백새벽이 오토바이를 천천히 앞쪽으로 몰았다.
그 사이 붉은 광점은 시종일관 그녀의 전방에 머무른 채 이따금씩 오토바이를 훑었다. 거점에서 경계심을 낮추지 않은 채 여전히 그녀를 겨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거리가 30미터 정도로 좁혀졌을 때, 한쪽 발로 땅을 디디고 선 백새벽이 큰소리로 외쳤다.
“전두하 촌장님을 찾아왔습니다!”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지만, 그녀는 얌전히 기다렸다.
잠시 후, 목재 골조 위의 경비 중 하나가 비스듬히 놓인 나무판자를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로부터 5, 6분 정도 지났을 때 한 노인이 벽 꼭대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털이 복슬복슬한 짙은 파란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꼭 바리때를 머리 위에 엎어놓은 것 같았다.
그의 귀밑머리는 새하얬고, 눈자위는 움푹 꺼져 있었다. 주름이 질 수 있는 곳에 모두 주름이 진 홀쭉한 얼굴은 상당히 늙어 보였다.
하지만 짙은 갈색빛 눈동자는 여전히 밝았으며, 표정에서 꼬장꼬장한 기색이 묻어났다. 노인은 이 거점의 촌장인 전두하였다.
그는 쪼글쪼글한 데다가 곳곳을 기운 양복 재킷에 누렇게 바랜 흰 티셔츠를 받쳐 입었으며, 체형에 비해 크고 길어 어울리지 않는 국방색 코트까지 걸치고 있었다.
하의는 짙은 노란색으로 된 모직 바지였는데, 그 안에 다른 바지를 몇 겹이나 껴입은 것인지 다리 부분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전두하가 진지한 눈으로 백새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이내 상대를 알아본 듯 그녀를 부르려던 전두하는 백새벽과의 거리가 너무 먼 데다가, 자신이 이전만큼 큰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는 노기가 어린 목소리로 옆에 있는 경비대원에게 소리쳤다.
“확성기를 가져와야지! 정말이지, 머리는 뒀다 뭐에 쓰냐!”
경비대원은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촌장님의 확성기는 배터리가 다 됐습니다. 같은 배터리로 교체하지도 못했고요.
제, 제가 대신 외쳐드리겠습니다.”
전두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전해. 백새벽 이년, 지난 1년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냐? 난 네가 야수한테 잡아먹힌 줄 알았다!”
“백새벽⋯⋯.”
경비는 그제야 상대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전에 종종 방문했던 그 백새벽입니까?”
“그게 아니면 누구겠냐? 난 일흔이 넘어 눈썰미가 나빠졌는데도 알아봤는데, 넌 겨우 스무 살밖에 안 된 자식이 왜 눈 뜬 봉사처럼 굴어?”
전두하는 경비대원을 팩 노려보며 욕을 해댔다.
이 거점의 거주민들은 이미 전두하의 성질머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경비대원은 이러한 질책에도 개의치 않고 조그맣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전보다 훨씬 예뻐져서⋯⋯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못 알아봤겠는데요⋯⋯.”
전두하의 따가운 눈총을 맞으며 황급히 목을 가다듬던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백새벽 이년, 지난 1년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냐? 난 네가 야수한테 잡아먹힌 줄 알았다!”
백새벽은 저도 모르게 누그러진 표정을 드러내며 큰소리로 답했다.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촌장님, 물건을 교환하러 왔습니다!”
이곳은 해자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백새벽은 전두하로부터 이곳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구세계의 파괴와 오랜 혼란, 여러 차례의 지질 재해로 인해 부근의 물은 이미 늪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덕분에 해자 마을은 천연적인 방어벽 안쪽에 잘 숨겨졌다.
그 때문에 해자마을의 주민과 그들이 이전에 초대했던 손님만이 거대 늪 안쪽, 진창처럼 보이는 숨겨진 길을 찾아 미궁 같은 환경 속에 자리한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시로 이동하는 다른 거점들과 달리, 깨끗한 수원지도 있고 경작지도 충분한 해자마을은 구세계의 파괴 이후부터 한 번도 이곳에서 옮겨진 적이 없었다.
전두하는 큰 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도 전 간지러워진 목구멍 때문에 못 참겠다는 듯 두어 번 기침을 했다.
“들어와라, 들어와.”
그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손을 흔들었다.
옆에 있던 경비대원이 곧장 외쳤다.
“들어와라! 들어와! 총은 문 앞의 사람한테 맡기고!”
퍽!
전두하가 그를 한 대 때리며 일갈했다.
“누가 너더러 뒷말을 붙이라든? 백새벽 저년은 믿을만한 사람이야!”
“하지만 무려 1년 만이지 않습니까.”
경비대원이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2초간 침묵하던 전두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목재 골조 아래로 내려갔다.
백새벽은 거부하지 않고 등에 매고 있던 총과 벨트에 찬 권총, 그리고 대형 오토바이까지도 전부 대문을 지키고 선 경비에게 넘겼다.
곧이어 두 짝으로 이루어진 검은색 대문이 열렸다.
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전두하가 백새벽을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며 웃었다.
“보아하니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이전에는 진흙투성이였는데.”
백새벽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어느 팀이 절 받아줬거든요.”
전두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잘했어.”
그는 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네 로봇은? 그, 뭐더라, 35인가 뭔가 하던.”
백새벽은 눈을 내리깔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망가졌어요.”
전두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몇 초가 지난 후에야 숨을 들이마신 그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었다.
“원하는 물건이 뭔데?”
“차에 들어가는 부품⋯⋯.”
백새벽이 침착하게 답했다.
“그만!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 없다. 난 어차피 못 알아들으니까. 가서 직접 보여줄 테니 네가 알아서 골라.”
전두하는 웃으며 백새벽의 말을 끊더니, 홱 돌아서서는 백새벽과 함께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 * *
마을이라고는 해도 이곳의 면적은 넓지 않았으며, 구세계에서의 마을과는 개념이 완전히 달랐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백새벽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멀찍이 자리한 3층짜리 건물 세 채였다. 높지는 않지만 옆으로 긴 건물들의 각 층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세 채의 건물은 나란히 놓여 있지 않고, 약간 기울어진 역삼각형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백새벽이 아는 바에 따르면 개인, 혹은 공용 화장실이 딸린 저곳에서 사는 사람은 바로 경비대의 대원과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총을 수리할 줄 알거나 구세계의 농업 기술을 파악하고 있는 중요한 기술자도 저곳에서 살 수 있었다.
삼각형 대형을 이룬 건물 세 채의 양쪽에는 대형 화장실 두 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가로로, 다른 하나는 세로로 놓여 있었다. 세 채의 건물 전방에는 시멘트로 만든 작은 광장이 자리했으며, 그 광장 바깥쪽으로는 땅을 달구질해서 만든 크지 않은 광장 세 개가 나란히 자리했다.
광장 좌우로는 집들이 각각 한 줄씩 늘어서 있었다. 외벽과 멀지 않은 이 집들은 해자마을의 원래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해자마을의 인구수로 볼 때. 주민 대다수의 가족 중에는 경비대원이 존재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마을의 경비대가 유지되지 않았다.
네 개의 광장 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집이 멋대로 지어져 있었다. 개중에는 진흙으로 만든 집도, 벽돌로 만든 집도 있었으며 천막에 가까워 보이는 집도 있었다.
이 건물들은 여태까지 해자마을에서 받아들인 황야유랑자, 혹은 원래의 마을 주민 중 규칙을 어긴 이들의 거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