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전장 정리
“이게 바로 애쉬랜드지.”
한참 후에야 장목화가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성건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스무 번은 더 넘게 펼쳐봤던 모양이에요.”
이는 편지의 접힌 흔적과 종이의 상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장목화는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상황이었으니, 너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듯 성건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모든 사람에게는 양면이 존재해. 심지어는 그 이상의 면을 가진 사람도 있지. 이 사람은 자신의 아이와 낯선 사람에 대해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던 거야.
낯선 사람인 우리는 아버지를 잃은 이자의 자식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저 내가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면 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나도 들은 게 있거든.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건, 우리 회사의 사람이라면 절대 황야 강도로까지 추락하진 않으리란 거야. 약탈을 하려거든, 오직 적대 세력의 물자 운송팀만 노리지.”
성건우는 말없이 편지를 다시 접더니, 그것을 황야 강도 두목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뒤이어 그는 잔뜩 구겨진 다른 편지를 펼쳤다.
「임무 : 웨이루 역 북쪽 구역 탐색, 목표와 관련된 정보 수집.
목표 : 남성, 내력 불분명, 키 약 180센티미터, 검은 머리카락, 금색 눈동자, 굉장히 잘생긴 편이며 매력적임. 트렌치코트, 부츠, 장갑을 착용하는 것을 좋아하며 머리는 언제나 말끔하게 빗어넘기고 다녀 황야유랑자답지 않아 보임. 위험도는 일단 ‘높음’으로 평가.
보수 : 보통 등급의 밀가루 1톤(길드에서 보장).
임무 등급 : C
신용 점수: 100점」
“사냥꾼 길드의 의뢰서야.”
장목화는 짧게 설명한 뒤 성건우가 찾아낸 배지를 집어 들었다.
“웨이루 역은 검은 늪 황야 안에 있는 구세계 유적 중 하나고. 그곳에서 더 북쪽으로 가면 거대 늪 깊은 곳에 이르게 돼.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지.”
그녀는 말을 하면서 제 손에 들린 배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황동색 배지 앞면에는 이목구비가 흐릿한 사람 얼굴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얼굴의 양 뺨에는 칼 한 자루와 창 한 자루가 각각 자리했다.
그리고 배지 뒷면에는 작은 칩이 새겨져 있었다.
사냥꾼 길드의 배지였다.
장목화는 만지작거리던 배지의 칩 부분에 왼손 검지를 댔다.
그러자 그곳에서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전류가 순간 번득였다.
몇 초 후 손가락을 거둔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정식 사냥꾼이네.”
정식 사냥꾼은 사냥꾼 길드 내부에서 유적 사냥꾼들을 구분하기 위해 쓰는 호칭이었다.
이런 구분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실력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오로지 신용 점수에만 근거할 뿐이었다. 사냥꾼 길드는 처음부터 모두가 정보와 물자를 더 잘 교환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지,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래에 있어서는 실력보다 신용이 더 중요했다.
그 때문에 사냥꾼 길드의 초대 회장은 구세계의 자료에서 영감을 얻어 신용 점수 체계를 세웠다.
유적 사냥꾼은 길드에 가입한 후 의뢰받은 임무를 완수하거나, 타인과 거래하거나, 길드에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각기 다른 신용 점수를 쌓았다. 이는 그들이 받는 보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신용 점수와 보수는 병행되는 관계였다.
신용 점수가 백 점 정도 쌓이면, 신입 사냥꾼은 정식 사냥꾼으로 승급할 수 있었다. 정식 사냥꾼 다음으로는 중급 사냥꾼, 베테랑 사냥꾼, 고급 사냥꾼, 그리고 마스터 사냥꾼이 존재했다.
이렇게 등급을 높이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임무와 거래를 완수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등급이 낮고 신용 점수가 부족한 사냥꾼이 받을 수 있는 임무와 참여할 수 있는 거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길드의 사냥꾼들은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신용도가 높은 사냥꾼이 보장하지 않는 한 그런 등급 낮은 이들을 믿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입 사냥꾼이라도 실력에 있어선 고급 사냥꾼이나 마스터 사냥꾼보다 강할 수 있었다. 다만 위험한 애쉬랜드에서 그렇게나 많은 임무를 완수하거나 거래를 달성하고도 목숨을 부지한 채 충분한 신용 점수를 쌓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급 사냥꾼과 마스터 사냥꾼은 실력과 팀의 세력, 그리고 장악하고 있는 자원 방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보다 뛰어나기 마련이었다.
즉 신용 점수가 낮다고 해서 약하다고 볼 순 없지만, 신용 점수가 높을 경우에는 강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특정 방면에서의 능력이 뛰어나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러한 이유로 신용 점수를 중시하는 사냥꾼 길드에서는 계약 위반, 규칙 위반, 사기, 그리고 불성실 거래 등의 행위를 매우 엄격히 다스렸다. 이런 잘못을 저지른 사실이 발각되면 문제의 정도에 따라 신용 점수가 깎였으며, 배지의 칩에도 해당 행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문제 상황이 심각하다면 길드는 심지어 그 사냥꾼의 회원 자격을 박탈해버리고, 그를 각지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처리된 사냥꾼은 보통 블랙 사냥꾼으로 불렸다. 물론 통신망이 잘 깔려 있지 않은 애쉬랜드에서 블랙리스트를 모든 길드에 알리기 위해서는 몇 개월, 심지어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곤 했다.
유적 사냥꾼이 강도를 겸하고 있는지, 사람을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임무와 거래에 영향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길드에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사냥꾼 길드 내에는 수석 사냥꾼이라는 칭호도 존재했다.
명예 칭호라 볼 수 있는 수석 사냥꾼은 많은 경험이 있는 사냥꾼에게만 주어졌으며, 각 구역의 사냥꾼 길드에 단 한 명씩만 존재했다.
수업과 훈련을 통해 이러한 내용을 배운 적 있는 성건우는 정식 사냥꾼이라는 칭호에 대해 전혀 의아해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장목화를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더니 불쑥 웃음을 흘렸다.
“내가 어떻게 사냥꾼 배지의 칩을 읽을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사냥꾼 배지의 칩은 각지의 길드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기기가 있어야만 읽을 수 있었다.
성건우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장목화는 왼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전기뱀장어형 생체 공학 의수잖아. 장착하는 김에 전기를 이용하는 간단한 칩과 센서, 데이터 전송 라인 등을 설치하는 건 아주 합리적인 일 아니겠어?
칩 안의 내용을 읽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아. 음, 지우고 재기록하는 작업이야말로 어려운 일이지. 이건 사냥꾼 길드가 머신헤븐에서 공동으로 구입한 전용 칩과 특제 기기거든. 기술 수준이 낮지 않은 편이야.”
성건우는 그제야 깨달은 듯 호기심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생체 공학 의수에는 다 전자 및 기계 관련 장치가 설치되어 있나요?”
“그래. 너도 알다시피 우리의 이념은 ‘쓸모 있으면 장땡이다’잖아. 게다가 바이오, 전자, 기계의 교차점은 연구의 중점이기도 하고. 여러 대형 세력이 외골격 장치와 인공지능 헬멧의 결합을 시도해서, 더욱 실용적인 동력 갑옷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야.”
여유롭게 설명을 이어나가던 장목화가 순간 앗, 하고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성건우의 손이 곧장 아이스모스의 손잡이로 향했다.
“하하, 너무 오래 쪼그려 앉아 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저리네.”
장목화는 민망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나로 올려 묶은 긴 머리가 그녀의 뒤통수에서 흔들렸다.
성건우 역시 일어나 서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임무, 좀 이상해. 검은 늪 황야에서 특정한 한 사람의 정보를 찾는 건, 그야말로 바다에 그물을 던져놓고 특정한 물고기 한 마리가 잡히길 바라는 것과 다름없는 짓인데.”
성건우가 곧장 대꾸했다.
“바다에 가봤어요?”
“⋯⋯그 말이 아니잖아.”
장목화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답했다.
“적어도 진짜 호수는 본 적 있어. 바다는 그보다 훨씬 더 넓겠지.”
성건우는 그녀의 답을 무시한 채 이전의 화제를 이어나갔다.
“어쩌면 한 사냥꾼에게만 주어진 임무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그물이야 많이 던져놓을수록 좋으니까.”
장목화도 동조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와 성건우의 입에서는 동시에 같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완전 부자네!”
유효한 정보를 가져다줄 모든 사람에게 보수를 지급하려면, 밀가루 1톤으로도 부족할 터였다.
장목화는 늪 안쪽, 웨이루 역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뭘까, 이 녀석? 이렇게나 관심을 받고 있다니.”
이때, 수리를 마치고 운전석에 앉은 백새벽이 지프에 시동을 걸어보았다.
그러자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성건우 역시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새벽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장목화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팀장님, 뒤쪽에도 망가진 부분이 있어요. 그 외의 다른 곳도요. 이 상태로는 억지로 움직일 수는 있지만 속도를 낼 순 없어요. 게다가 언제 시동이 꺼질지도 모르겠고요.”
장목화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못 고쳐?”
백새벽은 고개를 저었다.
“고칠 수는 있는데, 필요한 부품이 없어요.
팀장님, 이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황야유랑민 거점이 하나 있는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아마 두세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곳으로 가서 필요한 것들을 교환할 수 있는지 보는 게 어떨까요?
중간에 지프가 고장난다면 제가 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올게요.”
백새벽이 나름 온전한 편인 대형 오토바이 한 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머지 한 대는 폭발로 인해 파괴되어, 쇠붙이 더미로 변해 있었다.
장목화가 2초 정도 고민하다가 답했다.
“좋아.”
* * *
백새벽과 성건우는 곧장 나머지 두 구의 시체도 뒤졌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최종적으로 얻은 수확은 다음과 같았다.
약간 파손된 대형 오토바이 한 대, 소형 기관단총 두 자루, 기관단총 총알 약간, 폭발한 오토바이의 잔해로부터 얻은 유용한 부품 일부, 빵 반 덩어리, 담뱃잎으로 말아 만든 담배 몇 개.
그리고 두목에게서 나온 폭우 기관단총도 한 자루 있었다.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는 용여홍이 경량형 기관총을 안은 채 돌아왔다.
“이 기관단총 세 자루는 전부 9밀리미터 총알을 써. 가장 흔히 쓰이는 종류야. 우리가 넉넉히 준비해온 그 총알 말이야!”
장목화는 확보한 물건들을 살피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뒤이어 그녀가 경량형 기관총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7.92밀리미터짜리야. 당분간은 못 쓰겠다.
일단 차에 실어. 가서 교환해버리거나 회사로 가져가야지, 뭐.”
백새벽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걸 다 트렁크에 실으면 외골격 장치를 넣을 자리가 없겠는데요?”
그들의 트렁크는 통조림, 비스킷, 총알, 필터칩 등의 각종 물건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외골격 장치는 보조석에 싣고, 다들 돌아가면서 오토바이를 몰면 돼. 게다가 뒷좌석에 세 사람이 끼어 타도 되잖아. 넓으니까.”
장목화가 대꾸했다.
백새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토바이에는 연료가 필요한데, 우리가 때맞춰 연료를 공급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거래할 수 있을 때 넘겨버리는 편이 좋겠어요.”
장목화는 곧장 답하는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아, 이제 다들 흩어져서 보이는 탄피를 주워 와. 그것도 다 전략자원이야.
용여홍, 너도 이만 외골격 장치 벗어. 배터리 아껴야지. 우리가 가져온 예비용 고성능 배터리는 하나뿐이라 최대한 아껴서 써야 해.”
차의 지붕 위에 달아놓은 태양열 충전기는 매일 한 번, 지프차를 충전할 때만 쓸 수 있었다.
“예, 팀장님!”
곧장 답을 한 용여홍이 순간 뭔가가 떠오른 듯 돌아서더니 길가를 가리켰다.
“저건 어쩌죠?”
그가 가리킨 것은 검은 늪 철갑뱀의 거대한 시체였다.
시체를 본 장목화의 아름다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저걸 가져갈 방법은 없는데⋯⋯ 고기는 필요 없어. 오염으로 인해 변이된 생물이라, 정 먹을 게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먹지 않는 게 나아.
입 안의 독샘도 필요 없고. 우리한테는 밀폐 용기도 없고, 독샘 안의 액체는 쉽게 휘발되니까. 자칫 잘못하면 검은 늪 철갑뱀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우릴 향한 복수에 성공하게 될지도 몰라.
그냥 껍질만 벗겨가자. 그건 가져갈 수 있으니까. 음, 잘 접어서 차 지붕 위에 실으면 돼. 철갑뱀의 껍질은 꽤 훌륭한 생물 재료야. 아마 연구부가 되게 좋아할 걸? 이전부터 줄곧 그것과 비슷한 생체 모방 갑옷을 만들어왔으니까.
용여홍, 네가 외골격 장치를 입고 있으니 그 일을 맡아. 외골격 장치의 헬멧에는 방독 효과가 있어.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장치에는 고온 절단 기능도 있을 거야. 기억해, 눈과 입에서부터 시작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