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편지
지프 근처로 돌아간 장목화가 백새벽에게 말했다.
“난 곳곳에 찰과상이 좀 생겼어. 아이오딘 좀 줄래?”
그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성건우와 용여홍에게 지도를 하기도 했다.
“황야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험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감염과 오염이야. 유전자 개량자가 강한 면역 능력과 자가 회복력을 가졌다고 해도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성건우와 용여홍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목화는 아이오딘을 받아 상처를 소독하며 웃었다.
“어때? 재미있지? 신나지?”
용여홍은 살짝 미간을 구기며 창백한 낯빛으로 말했다.
“팀장님, 어떻게 이런 상황을 재미있고 신난다고 표현하세요?”
그는 그저 두렵고 힘겹고 긴장될 뿐이었다. 더는 이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죽은 동료가 없어서 다행이지, 사망자까지 생겼다면 그는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급기야 그는 각각 끔찍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세 강도의 모습으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이 자신의 동료가 아닌데도 그랬다.
장목화는 자신의 말에 반박한 용여홍에게 화를 내는 대신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게 바로 애쉬랜드야. 회사 내부와는 완전히 다르지.
각양각색의 전투를 경험하고 나면, 전투를 할 때마다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될걸? 특히나 곁에 있는 전우들도 살아남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고 최대한 빨리 PTSD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어.
하, 건우랑 비교하지는 마. 저 녀석이 앓고 있는 건, PTSD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더 심각한 문제인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성건우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벌렸다. 그런데 그때 백새벽이 보닛 아래로 밀어버린 두목의 시체가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쿵 소리를 냈다.
백새벽은 곧장 보닛을 열어 차의 상태를 확인했다.
보닛 안쪽에는 여러 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어때?”
장목화가 물었다.
“손상이 있긴 하네요.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는 해볼게요.”
백새벽은 목에 둘러놓은 회색 스카프를 당기며, 트렁크에서 수리 공구가 든 플라스틱 상자를 꺼냈다.
“고쳐지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장목화는 성건우와 용여홍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는 전장을 정리하면서 가치 있는 물건들을 챙기도록 해. 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계를 맡을 테니까. 음, 이쪽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예.”
성건우와 용여홍은 동시에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두목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최대한 빨리 외골격 장치를 벗겨내고 그 사용법을 파악한다면, 나중에 또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리더라도 훨씬 더 쉽게 대응할 수 있었다.
* * *
군용 외골격 장치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착용자가 사망했을 때의 회수 문제를 고려해서 만들어졌다. 성건우와 용여홍은 지난 두 달 동안 훈련을 받으며 이와 비슷한 장치를 다뤄본 경험이 있었다. 덕분에 성건우는 어느 정도의 탐색 끝에 버튼을 찾아, 결합 시스템과 파워팩을 종료할 수 있었다.
이 단계를 마무리한 후의 작업에는 아무런 기술도 필요치 않았다. 그저 보조 관절 부위에 달린 금속 버클을 풀기만 하면 되었다.
용여홍 역시 팔꿈치와 손목 부분의 버클을 풀며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할 말이 있는 듯한 몇 차례나 머뭇거리던 그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잔뜩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까 전에 전혀 긴장도 안 되고 무섭지도 않았어?”
다리 부분을 맡고 있던 성건우가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용여홍은 약간의 짜증이 섞인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백새벽은 뒤쪽에서 지프를 수리하고 있었고, 장목화는 권총을 쥔 채 저쪽을 순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체 주위에는 그의 말대로 성건우와 그, 단 둘뿐이었다.
성건우가 시체의 허벅지를 툭 치며 말했다.
“이 자도 있잖아.”
“⋯⋯.”
맞은편에 자리한 상대에게 욕을 퍼부어 주려 했던 용여홍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종종 하는 이야기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웃음을 거둔 성건우는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분명 약간 긴장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지.”
“전혀 안 그래 보이던데.”
용여홍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성건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건 내가 마음속으로, 내 목표는 전 인류를 구하는 거라고 계속 되뇌어서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건우의 생각에 이미 익숙해진 용여홍이 물었다.
“그런 생각이 두려움과 긴장감을 없애주는 이유가 뭔데?”
성건우는 엄숙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목표를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 중에 희생은 불가피하니까.”
용여홍은 성건우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좀 힘들지 않아? 네 손으로 직접 두 사람이나 죽였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하고, 웃고, 걷고, 뛸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음, 뭐 꼭 힘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뭐 특별한 감정은 안 들어?”
성건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어.”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성건우의 말이 이어졌다.
“두 발 더 쐈어야 했다는 생각이.”
“⋯⋯왜?”
용여홍은 성건우의 생각을 따라잡아 보려는 시도조차 포기한 채 물었다.
성건우는 그를 슥 훑어보더니 뒤쪽의 지프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뭔가를 빼앗을 생각도 없었고, 다치게 하거나 죽일 생각도 없었어. 그런데도 이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악의를 품고서 계속 우리를 쫓아오다 기회가 생기자마자 공격했지.
우리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거나 이자들이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이곳에 쓰러진 채 몸수색을 당하고 있는 건 이자들이 아닌 우리였을 거야. 그 상황에서 이들이 무슨 특별한 감정을 느꼈을 것 같아?
내 생각엔 아닐걸. 이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우리에게 침을 뱉고, 우리의 에너지바와 압축 비스킷, 군용 통조림을 먹어 치우고, 우리가 죽인 검은 늪 철갑뱀을 끓여 먹었을 거야. 너라면 그걸 참을 수 있겠어?”
조건반사적으로 그러한 광경을 상상하다가, 어렸을 때부터 내내 시달렸던 강렬한 굶주림을 떠올린 용여홍은 순간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못 참지!”
그러나 그렇게 외친 후, 그는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축 처졌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
그 말을 들은 성건우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과장된 웃음을 드러냈다.
“이곳은 애쉬랜드야. 익숙해져야 해.”
“꼭 땅 위로 올라온 게 처음이 아닌 것처럼 말하네.”
중얼거리던 용여홍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작업에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모든 금속 버클을 다 풀고, 군용 외골격 장치를 시체로부터 분리해냈다.
어느새 지프 근처로 돌아온 장목화가 모종의 생각에 잠긴 양 입을 열었다.
“용여홍, 한 번 착용해봐. 다룰 수 있는지 없는지 한 번 보게.”
남자 중 이러한 장치를 보고 열광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용여홍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외골격 장치에 묻은 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성건우를 재촉했다. 그러곤 상대의 도움 아래 보조 골격의 길이를 조절하고, 파워팩을 매고, 검은 헬멧을 쓰고, 금속 버클을 채웠다.
결합 시스템이 자체 검사를 마치자, 용여홍은 고글에 표시된 내용을 살핀 뒤 얼른 보고했다.
“남은 배터리는 23퍼센트입니다. 1시간 55분 더 사용할 수 있다고 나와 있네요.”
“그건 믿을 게 못 돼. 그 잔량은 네가 정상적인 운행을 유지하면서 기본 조작만 했을 때를 기준으로 계산된 시간이거든. 아까 이 자식처럼 장치를 이용해 하늘을 날고, 땅속으로 숨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면서 미친 듯이 각종 시스템을 사용하면 30분도 채 못 갈 거야.”
장목화는 들어 올린 왼쪽 발끝으로 두목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각종 기본 동작을 취해보기 시작하던 용여홍이 일련의 조작을 마친 후 살짝 놀란 듯 입을 열었다.
“팀장님, 이거 회사에서 제작한 것보다 훨씬 유용한데요?”
장목화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회사에서 만든 건 모조품이니까. 줄곧 생물에만 집중한 회사가 기계와 전자 부분에서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어?”
“하긴 그렇네요.”
용여홍은 약간 흥분한 채 군용 외골격 장치의 나머지 기능들을 시험해보았다.
성건우는 여전히 제자리에 쪼그려 앉은 채 시체의 주머니를 뒤졌다. 심지어는 속옷 안쪽까지도 놓치지 않고 훑었다.
“비스킷 두 봉지뿐이네.”
탐색을 마친 그가 불쾌한 얼굴로 앞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압축되지 않은 비스킷 봉지에는 한 줄 한 줄의 레드리버 문자가 적혀 있었다. 다만 심각하게 손상이 되어 있어, 성건우로서는 ‘쪽파’와 ‘소다’라는 글자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애쉬랜드에서 가장 주류를 이루는 두 종류의 언어는 바로 애쉬랜드어와 레드리버어였다.
애쉬랜드어는 반고 바이오, 구세군 등의 세력에서 통용되었고, 레드리버어는 보통 레드리버 유역과 그 근처의 세력인 퍼스트 시티, 화이트 기사단, 그리고 오렌지 컴퍼니 등지에서 사용되었다.
이윽고 그는 편지지 두 장과 배지 하나를 발견했다.
두 장의 편지지 중 한 장은 가지런히 접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무렇게나 포개어져 있었다.
성건우가 가지런히 접힌 편지지를 펼치며 중얼거렸다.
“엄청 여러 번 접었다 폈다 했던 모양이네.”
장목화는 용여홍에게 사주 경계를 지시한 뒤, 성건우의 옆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으면서 그와 함께 편지를 읽었다.
애쉬랜드 문자로 쓰인 편지였다.
「사랑하는 아빠,
저는 퍼스트 시티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글을 읽는 것은 아직 좀 어렵긴 하지만, 기본적인 대화를 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더는 누구도 제가 황야 출신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해요.
이곳의 계급 제도는 굉장히 엄격하지만, 바깥에 비하면 천국이에요. 그들의 규칙을 잘 따르고,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복종하고, 자신의 계급과 지위를 찾기만 하면 비교적 무탈하게 지낼 수 있어요.
제 학업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분의 도움 덕분에 전 이미 정규 학교로 옮겼어요. 제대로 졸업만 하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주민이 될 수 있어요.
마을에 있는 저장 식량이 충분한지 모르겠네요. 아직 여름이지만 몇몇 학우들의 말에 따르면 올해 겨울은 유난히 더 견디기 힘들 거래요. 그들이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빠께 말씀드려서 마을의 모두가 그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낭설일 뿐이라도 무시하는 것보다는 믿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지난번에 그러셨죠, 유적 사냥꾼이 되셨다고. 잘된 일이에요. 강도보다는 그쪽이 훨씬 안전하니까요. 물론 유적 사냥꾼 일도 위험하긴 하지만요. 새로 발견되었거나,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적은 도시 유적에는 가지 마세요. 그리고 더는 강도 일도 하지 마세요. 그게 겨울에 대비하기 위한 식량을 가장 빠르게 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도요.
전 도시 안에서 식량 암거래 상인을 찾아볼 생각이에요. 사실 자신도 없고, 교환할 자원도 충분치 않긴 하지만요. 저를 원로원 장로들에게 소개해준 자손들로부터 기회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마지막으로 아빠가 언제나 건강하길, 굶주리지 않길 바라요. 길선 삼촌, 금호 삼촌, 하윤 오빠, 진영 오빠도 다 잘 지내면서, 각자의 집에 충분한 음식을 갖고 돌아가기를 바라고요. 모두가 원로원의 인정을 받아, 노예가 아닌 주민의 신분으로 퍼스트 시티에 들어올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분은 어머니한테도 잘해주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아빠의 연지.」
편지를 다 읽은 장목화와 성건우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