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나름의 의식
이때, 진현오의 부하 직원이 그의 도시락통을 가지고 직원 식당으로부터 돌아왔다.
성건우는 한 손엔 부하 직원으로부터 받은 도시락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한 진현오를 가만히 바라보다 불쑥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 어르신은 이 층에서 사는 모든 사람을 다 아시나요?”
진현오가 모호하게 답했다.
“100퍼센트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95퍼센트 이상은 안다.”
성건우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할 말을 고민하던 그때였다. 그의 시선에 익숙한 한 사람의 인영이 들어왔다.
오늘 새벽 A동 35호에서 만난 생명 제례의 교도, 이 이모였다.
“혹시 저 사람도 아세요?”
성건우가 손가락으로 아름다운 이 이모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진현오가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정현이군. 너도 알고 있겠지? 이전에는 이웃이었으니까.
하지만 뭐, 어렸을 때였으니 기억 못할 수도 있겠구나.
휴, 저 여자도 불쌍한 사람이야. 결혼하고 두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후 남편과 함께 다른 직무로 전출되었다가 오염되는 바람에 더 이상은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어. 그 두 아이 역시 몇 년 전 뜻밖의 사고로 모두 죽었고.”
성건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 * *
성건우는 활동 센터에서 한참을 앉아있다가 B구역 196호로 돌아갔다. 그러곤 언제나처럼 어둑한 침대 위에 반쯤 누운 듯 앉아 라디오 방송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생활 구역의 각 층에는 아름답고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올해의 이상 기후로 인해 애쉬랜드 위의 괴물들은 이미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회사 부근의 황야에 승려 교단의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내부 생태 구역 59목장에 돌던 가축 설사병이 해결되었습니다.
⋯⋯오락부에서는 이번 주말 휴일에 활동 센터에서 직원 농구 대회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 * *
눈 깜짝할 사이 두 달이 지났다.
647층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 안, 테릴렌 셔츠를 입은 용여홍은 금속 재질의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근육이 두드러지는 동작을 취해보았다.
“그간의 고강도 훈련이 정말 효과가 있긴 있나 봐. 대학을 막 졸업했을 당시의 나 다섯 명, 아니, 세 명은 충분히 이길 수 있겠어.”
전에 비해 체격이 꽤 좋아진 그에게서는 어느 정도 남성미가 느껴졌다.
성건우는 엘리베이터의 문 틈새를 응시하며 말했다.
“휴,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키가 175센티미터 밖에 안 되고,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니고, 성적도 겨우 중간 정도고⋯⋯.”
“⋯⋯.”
용여홍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곧 묵직하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두 달 동안 매일 고기를 먹었는데 어떻게 1센티미터도 안 클 수가 있어?”
그 사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익숙하게 14호로 향했다.
이들은 아직 오늘 어떤 훈련을 할지 모르는 까닭에, 안전부의 제복을 입어야 할지 격투하기에 편한 옷을 입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일단 장목화를 만나 훈련 내용을 확인한 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이때 이미 14호에 도착해있던 장목화와 백새벽은 고동색 사무 탁자 주위에서 뭔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성건우와 용여홍은 이제 큰 소리로 인사하는 게 습관이 되어있었다.
장목화는 고개를 들고 손짓을 하며 말했다.
“둘 다 이리 와봐. 할 얘기가 있어.”
용여홍은 성건우를 힐긋 바라보았지만, 성건우 역시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했다.
이윽고 책상 쪽으로 다가간 두 사람은 고동색 사무 탁자 위에 펼쳐진, 정확도가 상당히 낮은 지도 한 장을 볼 수 있었다.
장목화는 주먹으로 그 지도를 가볍게 치며 빙그레 웃었다.
“오늘 훈련은 야외 야영이야!”
“예?”
놀란 용여홍이 물었다.
언젠가 야외 야영을 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조짐도 없이,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시작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숨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장목화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원래는 한 이틀 더 있다가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상부에서 작은 임무가 하나 내려왔어. 어느 황야유랑자 거점에 정수 장치의 필터 칩을 배달해야 한다더라고. 그래서 오늘 출발하려고.
새벽아, 네가 저 둘에게 최종 목적지와 대략적인 경로를 설명해줘.”
여전히 낡은 회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백새벽은 한쪽 손을 책상 가장자리에 대고, 반대편 손으로 지도 위의 한 장소를 가리켰다.
“이곳은 하비스트 타운이야. 회사에서는 대략 2, 3백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 복구된 길이 있고, 중간에 아무런 위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대로 운전해서 이동할 경우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어. 하지만 문제는 검은 늪 황야에는 온전한 길이 없다는 거야. 도중에 짧은 구간이긴 해도 보존이 잘 된 구세계의 길이 있을 순 있어. 물론 잡초가 무성하고 노면에는 균열이 나 있겠지. 하지만 특수한 사례에 불과한 이 길만 믿고 갈 순 없어.”
성건우와 용여홍은 검은 늪 황야가 회사 밖의 위험 가득한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면적이 굉장히 넓은 그 지역의 최북단은 얼음에 뒤덮여있었고, 동북쪽으로는 구세군과 접했다. 동쪽은 화이트 기사단의 세력 범위였으며, 동남쪽으로 한참을 가면 퍼스트 시티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에는 또 다른 황야와 몇 개의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새벽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너희도 이미 봤겠지만, 우리와 하비스트 마을 사이에는 고도로 위험하단 걸 의미하는 기호가 잔뜩 표시된 거대한 늪이 있어. 내 경험에 따르면 그곳은 근본적으로 길이 없는 순수한 늪이거나, 변이한 괴물들의 근거지이거나, 구세계의 폐허가 남아 있어 한 번 들어갔다가는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그런 곳일 거야.
심각하게 오염된 구역까지 배제하고 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아. 게다가 회사에서 흔히 사용하는, 초소가 설치된 두 갈래의 길도 배제해야 해. 그런 길을 따라 이동하는 건 야영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이상의 조건과 거대 늪의 지리적 상황을 모두 종합해, 두 가지 노선을 계획해봤어. 두 노선 모두 거대 늪 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횡단하는 길이고, 하비스트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도 1, 2주로 비슷해. 구체적인 상황은 아마 날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너희는 어느 노선이 더 마음에 들어? 아니면 거대 늪 주위를 빙 돌아가는 건 어때? 근데 그렇게 하면 소요 시간만 늘어날 뿐, 위험도가 그렇게 낮아지지도 않아.
음, 나도 거대 늪에 대해 그다지 상세하게 알지 못하고, 안 가본 곳도 많거든. 그러니까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제시해도 좋아.”
성건우는 장목화가 입을 열기 전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그중 하나의 노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이 좋겠어.”
“왜?”
백새벽은 무의식적으로 묻자마자,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깊이 후회했다.
“선이 유려해. 아름답잖아.”
성건우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자 백새벽은 도움을 바라듯 고개를 돌려 팀장을 바라보았다.
장목화가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건우의 의견에 동의해. 두 개의 노선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이왕이면 예쁜 노선을 선택하는 게 낫지.
자, 그럼 이렇게 결정!”
말을 마친 그녀는 성건우와 용여홍을 바라보며 자신의 전자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준비할 시간 15분 준다.”
“겨우 15분이요?”
용여홍의 얼굴이 팩 찌푸려졌다.
“14분 55초.”
장목화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답했다.
곧장 돌아선 용여홍이 성건우의 뒤를 황급히 쫓아갔다.
“야, 같이 가!”
* * *
재빨리 근처 목욕탕의 탈의실에 들어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로커를 열었다.
매일 훈련을 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푹 젖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미 적잖은 옷들을 이곳에 넣어둔 상태였다.
햇빛도 없고 밤에는 매우 춥기까지 한 회사 내부에서는 옷을 말릴 방법이 없었다. 직원들의 옷은 모두 훈련 보장부에 의해 일괄적으로 수거, 세탁, 및 건조된 뒤 반환되었다. 그리고 속옷은 직접 빨아 각자의 방 싱크대, 혹은 물을 받을 그릇 위에 널곤 했다.
성건우는 안전부에서 기본적으로 나눠준 카모플라주 배낭을 꺼내 지퍼를 연 뒤, 제복 한 벌을 그 안에 쑤셔 넣었다.
뒤이어 그는 머리를 감고 몸을 닦는 데 쓸 수 있는 노란 비누 하나를 비닐 팩에 담더니 그것 역시 배낭 안에 던졌다.
치약, 칫솔, 속옷 등의 물건까지 꼼꼼히 챙긴 후, 성건우는 입고 있던 옷을 빠른 속도로 벗어 로커에 넣었다.
어느새 팬티 바람이 된 그는 남은 회색 제복을 꺼내 빠르게 입기 시작했다.
허리띠와 가죽 부츠의 끈까지 단단히 매고 나서 똑바로 선 성건우는 반신 거울 앞으로 다가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거울 속 그의 눈썹은 곧았고, 짙은 갈색 눈동자는 맑았다. 검은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얼굴선은 굵고 단단했다.
세련되면서도 군인다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안전부 제복을 입은 그는 평소보다 더 멋지고 강인해 보였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던 성건우는 주머니 안에서 천천히 꺼낸 표찰 하나를 왼쪽 가슴팍에 달았다.
붉은색 바탕의 표찰 위에는 황금색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반고 바이오」.
* * *
탈의실에서 나온 성건우는 2분을 더 들인 끝에야 겨우 준비를 마친 용여홍과 함께 14호로 돌아갔다.
용여홍은 성건우를 힐끔힐끔 바라보더니 결국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나 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그를 쓱 훑어본 건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용여홍이 팔을 치켜들며 말했다.
“내가 긴장을 안 하고 있잖아! 내가 완전 여유만만인 거 모르겠어?
예전같았으면 분명 겁을 잔뜩 집어먹고 징징거렸을 텐데, 지금은 야외 야영 훈련 정도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 두 달간의 훈련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나 봐.”
걷는 속도를 약간 늦춘 성건우가 용여홍을 아래위로 살피다 불쑥 웃음을 흘렸다.
“다리가 떨리고 있는데.”
“⋯⋯.”
용여홍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성건우는 그런 용여홍을 내버려 둔 채 14호로 향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용여홍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두 다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안 떨리는데! 안 떨리는데!”
한 차례의 법석을 떨고 난 후, 용여홍은 자신이 정말로 긴장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장목화는 14호로 돌아온 두 사람을 살피다 성건우의 왼쪽 가슴팍을 응시하곤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
“표찰을 달 필요는 없어. 회사 차원의 작전도 아니니까.
게다가 참여 인원이 적은 상황에서 표찰은 오히려 위험 요소로 작용해. 애쉬랜드의 강도와 유랑자들은 상대가 대형 세력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아. 아무것도 훔치지 못하면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삶을 사는 그들에게, 대형 세력의 구성원을 건드렸을 때의 결과를 고민하는 일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
성건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름의 의식입니다!”
“⋯⋯회사에서 나가면 바로 떼. 지금 출발한다.”
장목화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