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선택받은 자
침묵한 채 성건우를 따라 걷던 용여홍은 돌연 입술을 비죽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적어도 진짜 하늘은 볼 수 있으니까⋯⋯.”
용여홍은 성건우가 자신에게 맞춰 몇 마디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주리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심지어 용여홍의 말을 듣지도 않은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입을 벌린 용여홍은 방금 전에 했던 이야기를 한 번 더 반복하고 싶었지만, 끝내 꾹 참은 채 소리 없는 한숨만 내뱉었다.
묵묵히 걷던 두 사람은 C 구역의 한쪽 구석에 자리한 네 번째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렀다.
용여홍에게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1분 1초가 고통스러워 숨까지 막혀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마침내 도착한 왼쪽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 들어간 성건우가 전자카드를 긁고 647층의 버튼을 누르자, 문이 닫히며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표시된 층수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던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명이 있어.”
잠시 멍하니 있던 용여홍이 쓰게 웃었다.
“난 그저 회사 내부에 머무르면서 좋은 아내를 만나 귀여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우리 가족들이 일주일에 세 번은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고 싶을 뿐이야.”
그의 목소리는 점차 낮게 가라앉았다.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순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건우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용여홍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입을 다문 두 사람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내 엘리베이터 안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버린 듯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엘리베이터가 647층에 멈췄다.
용여홍은 밖으로 나가면서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너 방금 무슨 생각했어? 난 내 남동생하고 여동생을 생각했는데.”
성건우는 전방을 주시하며 답했다.
“멍 때렸어.”
그러자 용여홍이 감탄하듯 말했다.
“⋯⋯마음가짐이 좋네.”
“내가 스스로 신청한 거니까.”
성건우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방 번호를 살폈다.
“⋯⋯,”
용여홍도 말없이 14호를 찾았다.
495층과 달리, 647층은 여러 개의 거리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방과 방 사이의 간격도 2, 3미터보다 훨씬 넓었다.
이곳은 하나하나의 훈련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 주위는 크기가 각기 다른 여러 개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건우와 용여홍은 곧 14호 방 밖에 이르렀다.
문에 붙은 표찰이 없어 두 사람으로서는 이곳이 안전부에 속한 어느 작전반의 어느 대대, 어느 팀인지 알 수 없었다.
벌어진 입으로 숨을 힘껏 들이마신 용여홍은 마음을 가다듬는 한편 제 운명과 마주할 준비를 했다.
그 사이 성건우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살짝 굽힌 손가락으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갑작스러운 소리에 용여홍은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그는 성건우를 향한 원망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이때 방 안에서 약간 거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와 그러지 못했다.
“들어와.”
문고리를 잡아 돌린 성건우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용여홍은 그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대충 살폈다.
그가 사는 집보다 적어도 세 배 이상 큰 이 방의 맨 안쪽에는 고동색 페인트가 발린 사무용 책상과 큼지막한 책장 두 개가 자리해 있었다.
그 왼쪽 벽에는 검은색의 낡은 탁자 세 개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중앙과 오른편은 응접실 같은 느낌이 났다. 곳곳이 헤지고 낡은 천 소파 세트와 티 테이블, 네 개의 등받이 의자, 두 개의 벤치 의자, 그리고 네 개의 낮은 스툴이 놓여 있었다.
이때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이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20대로 보이는 그녀의 키는 180센티미터에 달했으며, 머리와 몸통, 다리의 비율이 상당히 좋았다. 피부는 밀색이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여 있었다.
생활 구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과 달리 그녀는 안전부의 제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회색 바탕에 카무플라주 패턴으로 장식된 제복은 당당하고 강한 느낌을 풍겼다.
그녀의 이목구비 역시 이러한 차림에 아주 잘 어울렸으며, 짙은 눈썹과 큰 눈에서는 짙은 투지가 느껴졌다.
“새로운 팀원?”
여성이 밝게 웃으며 조금 큰 목소리로 물었다.
“네, 네.”
용여홍은 평범하지 않은 기질을 풍기는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약간 어색해하며 답했다.
그러자 여성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큰 소리로.”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맑은 편이었다. 방금 전 문을 두드렸을 때 들어오라고 말한 것은 그녀가 아닌 모양이었다.
용여홍은 상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내 성건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목청을 높였다.
“예!”
그의 목소리는 방을 넘어 복도에까지 울릴 정도로 컸다.
여성은 재차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그렇게까지 큰 소리를 낼 필요는 없어. 내가 듣는 데 좀 문제가 있거든. 귀머거리는 아니지만.”
그녀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용여홍은 상대의 귀 안에 장착된 은백색의 금속 제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공 와우야.”
여성이 솔직하게 말했다.
이내 웃음을 거둔 그녀는 일반적인 사람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내 소개부터 하지. 난 너희들의 팀장, 장목화다.
팀장이긴 하지만, 아직은 D7이 아니라 D6이야.”
“예, 팀장님.”
용여홍이 큰 소리로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성건우 역시 기쁜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장목화가 곧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또 다른 팀원, 백새벽.”
키가 160센티미터에 불과한 백새벽은 장목화와 같은 제복을 입고 있음에도 훨씬 작아 보였다.
백새벽은 목에 낡은 회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으며, 그녀의 검은색 머리칼은 귀를 겨우 덮을 정도로 짧았다. 그리고 얼굴은 꽤 예쁜 편이었다. 하지만 피부가 약간 거친 것이, 수시로 모진 비바람을 맞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장목화의 눈동자가 짙은 갈색을 띤 데 반해, 백새벽의 눈동자는 황갈색에 가까웠다.
“안녕.”
백새벽이 약간 거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
용여홍은 아직도 살짝 긴장한 듯했다.
“안녕!”
성건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우 컸다.
티 테이블 쪽으로 손짓을 한 장목화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자리에 앉아. 아 그래,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야지.”
“성건우입니다!”
장목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건우는 자신의 이름을 냅다 외친 뒤 문을 닫더니, 도시락통을 들고 등받이 의자에 앉았다.
“저는 용여홍입니다.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이름 중 한 글자인 홍을 따서 지은 이름이죠.”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제 이름을 설명하더니 성건우 옆쪽에 놓인 등받이 의자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아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다 왔으니 우리 팀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할게.”
“다 왔다고요?”
흠칫 놀란 용여홍이 물었다.
‘겨우 네 명이라고? 안전부 산하의 팀이라면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은 속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장목화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사람이 너무 적답니다!”
성건우가 재차 말을 전했다.
장목화는 그제야 구겨진 미간을 풀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전투조가 아냐.”
‘전투조가 아니라고?’
용여홍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구쳤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팀의 이름은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팀, 줄여서 구조팀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일한 조사팀인 건 아냐. 서로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알지 못할 뿐 안전부에도, 이사회에도 각자의 조사팀이 존재하지.
보안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음, 조사가 겹칠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우리는 어느 구조팀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진도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상부에서 가장 가치 있는 최신 단서들을 공유해주거든.”
이쯤에서 잠시 뜸을 들이던 장목화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팀은 일반적인 전투조에 비해 훨씬 더 큰 위험을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커.
이렇게 많은 소형 팀이 같은 임무를 맡은 이유는 뭘까? 이전의 구조팀은 통일되어 있었고 그 규모도 컸어. 그러다 어느 날 외부에서 조사를 진행하다가 완전히 실패한 그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지. 그로 인한 손실은 메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고.”
그 말에 용여홍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 그렇게나 위험하다고요⋯⋯?”
“뭐라고?”
장목화는 용여홍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보기만 했을 뿐, 그 소리를 듣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건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을 뿐, 자신의 말을 대신 전해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에 용여홍은 어쩔 수 없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나 위험하다고요?”
사자후를 외치듯 내뱉은 질문에 용여홍은 마음이 적잖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장목화는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팀은 황야 깊은 곳으로 들어가 폐허가 된 도시를 조사할 수도 있고, 다른 세력으로 향해 단서를 찾을 수도 있어. 우리는 여러 상황을 맞닥뜨리고, 또 다양한 적을 만나게 될 거야.
그래서 안전부의 베테랑 직원도 구조팀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을 정도지.”
용여홍의 얼굴색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우린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큰소리로 했던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겁니까?”
장목화는 의아한 듯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난 재수 없지 않은데⋯⋯. 난 이곳에 배정받은 게 아냐. 우리 조사팀은 사실 내 신청으로 만들어진 거거든.”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난 언제나 구세계가 파괴된 원인을 확실히 밝혀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야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고, 무심증의 원인을 밝혀내고, 모든 인류를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너희들도 들어봤겠지만, 애쉬랜드 위의 어느 도시 유적 깊은 곳에는 신세계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잖아. 만약 우리가 영원히 그 문을 찾아내지 못해 영원히 신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굶주림과 감염, 변이, 괴물들과 계속 함께해야 할 거야.
이건 내 꿈이었어. 그래서 내가 안전부의 고위층에 자발적으로 신청한 거야. 새로운 구조팀을 하나 신설해달라고.
하하, 또한 난 폐허가 된 도시에서 과거의 역사를 캐내는 것도, 다른 세력의 사회상을 관찰하는 것도, 다양한 지역 내 각기 다른 상태의 사람 및 사물과 접촉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거든.”
그때, 긴 소파에 앉아 가만히 듣고 있던 백새벽이 돌연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이 팀장님에 대해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의 말에 따르면 팀장님은 사회학자이며 그의 여신이라고 하던데요.”
그 말에 장목화가 풉, 하고 웃었다.
“아, 뭐라고? 마지막 말은 못 들었어. 그건 됐고, 네 이야기나 해봐.”
“저도 자발적으로 신청했어요.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전 회사 내부 출신이 아니라 황야유랑자였다가 회사에 들어온 사람이거든요. 아직은 정식 직원 자격도 없지만, 구조팀에 들어오면 그 목표를 빠르게 달성하고 직원 등급도 금방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직원 등급이 오르면 유전자 개량 신청을 할 자격도 생긴다더군요.”
장목화는 백새벽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더니 웃으며 물었다.
“내 욕을 한 건 아니지?
하하, 우리는 분명 황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될 거야. 그러니 황야와 그곳에 있는 여러 세력, 및 거점과 소통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사람이 필요했지.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지마. 엄청난 경험자니까.”
그녀의 시선은 이내 성건우에게로 향했다.
“네 파일은 봤어. 네가 자발적으로 구조팀에 들어오려 한 이유도 대충 알고.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나?”
“인류를 구하려고요!”
성건우가 큰 소리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