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직무
아침 식사를 마친 성건우와 용여홍은 도시락통을 가지고 활동 센터에 들어가 홀 구석에 앉은 뒤, 직무 배정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활동 센터는 텅 비어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만 진현오의 감독 아래 바쁘게 이곳저곳을 쓸고 닦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른 아침, 이곳에서 운동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어린 자손을 학교에 데려다주러 갔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러 갔을 것이다.
회사의 규칙에 따르면, 60살이 되면 비교적 수월한 직무로 바꾸거나 작업량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아예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75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이 나이에 이르면 매달 직원 등급에 따른 보조금을 받았다.
하지만 75살이 되었다고 한들, 원할 때 활동 센터에 와서 놀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유전자 개량을 받지 못한 전 세대 사람 중, 물자가 결핍되고 영양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75살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기 때문이었다.
용여홍은 소리 없이 숨을 들이마시다가 애써 대화를 해보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제 어머니 동료분의 딸을 만났어.
이제 열여덟 살이고, 오락부 산하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을 한대. 키는 170센티가 넘는데다 예쁘게 생겼더라.
그 애가 날 좋아할 가능성이 있을까? 휴,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175센티 밖에 안 되고,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았고, 성적도 겨우 중간 정도고, 아직 부서도 정해지지 않은 나를⋯⋯.”
그 말에 성건우가 오른쪽 눈썹을 살짝 추켜 올렸다.
“이름이 뭔데?”
“피원영. 하하, 허정민은 모른대. 다른 팀이라.”
용여홍은 성건우가 허정민에 대해 물어볼 줄 알고 미리 말했다. 회사에서 그 뉴스캐스터의 방송을 열성적으로 듣는 직원들은 꽤 많은 편이었다.
성건우는 실망한 기색 없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어느 층의 어느 구역에 사는데? 방 번호는?”
“네가 왜 그런 걸 물어?”
용여홍이 놀람과 의혹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성건우는 그런 상대를 힐긋 바라보며 대꾸했다.
“직접 가서 널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지 물어보게.”
“⋯⋯.”
용여홍이 아무리 연애경험이 없다고 한들, 그렇게 하면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관계가 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하하, 농담도 참.”
그러나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나갈 자신은 없었다.
“성건우, 넌 어느 부서에 들어가고 싶냐?”
“안전부.”
성건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쳤다.
“미쳤어?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식대를 준다고 해서 거기 홀려버리면 어떡해! 하하, 너 또 농담하는 거지?”
안전부는 회사 내 모든 부서 중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매해 그곳의 직원 사망률은 다른 부서의 사망률을 합친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이는 그들이 여러 대외 작전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의무는 황야를 통한 대량의 물자 이송, 침입 세력 범위 내의 사람들, 혹은 이쪽으로 이주한 괴물들과의 전투, 지하 건물 밖 초소 방위, 황야 안쪽 구세계 유적 탐색,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학조사팀 보호 등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안전부의 직원들은 수시로 오염과 질병, 괴물, 무심자(無心者)를 마주해야 했다. 그런 부서에 속한 이상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 부상, 감염, 변이, 그리고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용여홍이 성건우의 답에 깜짝 놀란 사이, 조여름을 포함한 이들도 속속들이 활동 센터에 들어섰다. 그들은 익숙하게 각자의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양진원과 성건우, 용여홍은 서로 사이가 꽤 좋았다. 같은 층에 살기도 하고, 같은 시기에 대학에 들어가 같은 과에서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희고 곱상한 양진원 역시 활동 센터에 들어오자마자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야, 어쩐지 힘이 좀 없어 보인다? 아침 안 먹었어?”
용여홍은 걸어오는 양진원을 보고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양진원이 붉어진 얼굴로 답했다.
“먹었어. 그냥 좀 피곤해서.”
“왜 피곤한데?”
용여홍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양진원이 성건우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어.
하지만 그래도 꽤 좋긴 해. 너희들도 최대한 빨리 짝을 찾아.”
말을 잇는 사이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그제야 양진원이 피곤한 이유를 깨달은 용여홍은 더 이상 질문을 하는 대신 아까 전의 대화를 마저 이어나갔다.
“진원아, 건우가 방금 무슨 농담을 했는지 알아? 글쎄, 안전부에 들어가고 싶대!”
양진원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근직으로 한정된다면 나도 거기 가고 싶어. 대우가 상당히 좋잖아.”
안전부 직원의 급여는 다른 부서와 똑같이 회사의 규정에 따라 지급되었다. 다만 고강도의 훈련을 받아야 하는 그들은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훈련일과 근무일에는 안전부 전속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가격도 싸고 양도 충분했다. 게다가 별식도 따로 나왔다.
이는 회사 내 여러 직원에게 아주 유혹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왜 당연한 말을 해? 관리층이나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내근직만 할 수 있다면 그곳에 안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용여홍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안타깝지만 안전부의 내근직과 외근직은 교대로 돌아간다고. 빅보스의 전속 호위대나 관리층 직속 작전반, 중요 프로젝트의 보안특수대가 아니라면 말이야.”
줄곧 말이 없던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난 외근직이면 좋겠어.”
“⋯⋯.”
놀란 용여홍이 손을 뻗어 성건우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너 진짜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 아냐?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나 해?”
안전부의 직원은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회사 내 모든 직원은 많든 적든 애쉬랜드의 상황이 어떤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밖은 여전히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에 비하면 안정적이고, 질서 정연하고, 기본적인 물자의 공급이 보장되는 회사 내부는 그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에 외근을 나가는 보조금도 받고, 상납하거나 폐기할 필요가 없는 애쉬랜드의 물건을 본인이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부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안전부로의 지원을 격려하기 위해, 이사회에서는 그곳에 속한 직원들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일반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직원들은 평생을 일해도 D3까지 밖에 승진하지 못하는 데 반해, 안전부의 직원은 1년만 일해도, 심지어는 반년만 일해도 D4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안전부에서 퇴직하여 일반적인 직무로 전환할 때도 한 등급 위로 올라갔다.
양진원 역시 성건우의 생각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성건우의 말을 반박하는 대신 사실만 지적했다.
“안전부의 직원은 기본적으로 이미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 중에서 발탁돼.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은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
“맞아, 맞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용여홍이 성건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외근직을 원하는 건데?”
“인류를 구하려고.”
성건우는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얼굴로 답했다.
그러자 용여홍과 양진원은 동시에 침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린 듯 켁켁거렸다.
그때였다. 검은색 제복을 입은 두 사람이 밖에서 들어와, 봉인된 종이봉투를 활동 센터의 주관자 진현오에게 건넸다.
이내 용여홍과 양진원, 조여름을 비롯한 이들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숨을 참았다.
그 종이봉투에는 오늘의 배정 결과가 들어있었다.
공개적으로 결과를 발표해야 하는 공동 결혼과 달리, 직무 배정은 보안 사항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므로 편지처럼 대상자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본인에게 전달되기 전에는 누구도 그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었다.
종이봉투에 훼손된 부분이 없음을 확인하고 서명을 한 이사회 소속 직원 두 명이 곧 진현오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결과 발송 과정을 감독하기 위함이었다.
“엄청 빨리 왔네. 우리가 처음인가 봐. 휴우, 어느 직무에 배정되었을까?”
잔뜩 긴장한 용여홍이 못 참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성건우는 그런 상대를 힐긋 바라보았다.
“일단 안전부에 배정되었을 거라고 생각해봐. 그래야 어떤 결과가 나오든 실망스럽지 않지.”
“그래, 네 말도 일리 있어.”
다른 방도가 없는 용여홍은 성건우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진현오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종이봉투를 들어 보인 후, 입구를 뜯어 편지봉투 더미를 꺼냈다.
뒤이어 그가 편지봉투 위에 적힌 이름을 불렀다.
“송효민.”
한 여자가 걸어 나와 그것을 받아들더니, 빠른 걸음으로 옆쪽으로 물러나 봉투를 뜯었다.
진현오는 계속 이름을 불렀다.
“양진원.
조여름.
용여홍.
성건우.”
이름이 불린 사람들은 각각 한 명씩 앞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편지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들은 결과를 확인하는 걸 피하지 않고 활동 센터 안에서 봉투를 뜯어 그 안에 든 편지지를 꺼냈다.
진현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서있던 용여홍도 살짝 떨리는 두 손으로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용여홍, 전자카드 번호 02511013768.
오후 12시 전까지 647층 14호에 출석할 것.」
‘647층⋯⋯.’
용여홍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렸다. 곧이어 손에 들린 편지가 바닥으로 팔락팔락 떨어졌다.
그는 황급히 편지를 다시 주워 몇 번이나 살피며,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망했다. 망했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용여홍의 얼굴색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지하 건물은 총 650층이었으며, 그중 지면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5개 층은 안전부에 속했다.
그러니까 647층에 출석하라는 것은 안전부에 배정되었다는 뜻이었다.
이때, 성건우가 용여홍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느릿하게 돌아선 용여홍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빛이 멍했다.
“망했어. 망했다고⋯⋯.”
그러자 성건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난 안전부에 배정됐어.”
“뭐?”
용여홍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 곧장 상대의 편지를 낚아챘다.
빠르게 내용을 훑은 그의 눈에 편지의 내용이 들어왔다.
「성건우, 전자카드 번호 02509083626.
오후 12시 전까지 647층 14호에 출석할 것.」
“우리 같은 곳에 배정된 거야?”
약간 진정한 듯한 용여홍이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
성건우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우린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걸까?”
동료가 생긴 것을 확인해서 그런지, 용여홍은 그렇게까지 낙담하거나 슬퍼 보이지 않았다.
성건우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난 내가 신청한 건데.”
“⋯⋯.”
용여홍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조여름, 양진원, 송효민 등의 사람들도 자신의 직무 배정 결과를 보고 흥분하거나, 기뻐하거나, 실망하거나, 슬퍼했다. 하지만 용여홍처럼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는 없었다.
“건우 넌 어디로 배정됐어? 난 36층의 연구소로 가.”
양진원이 편지를 들고 다가오며 물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안전부.”
순간 활동 센터의 홀은 극도로 고요해졌다. 실망하거나 슬퍼하던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가, 곧 자신의 결과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용여홍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성건우를 끌어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가자, 출석하러. 하, 이젠 가는 수밖에 없지, 뭐.”
회사에 의해 온 가족이 쫓겨나고 싶지 않은 이상, 결과를 거부할 순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연줄이 있다 한들, 전출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일단 출석부터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연줄이 있는 사람은 일찍이 예정된 부서에 차출이 된 상태였다.
성건우는 양진원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자신의 도시락통을 챙겨 나왔다. 그러고는 용여홍과 함께 C 구역으로 향했다.
C 구역은 지하 빌딩의 최상 5개 층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