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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6화 (6/649)

6화. 밤중의 만남

성건우는 빛으로 이루어진 그 인영을 힐끗 보더니, 그대로 그를 지나쳐 홀 깊은 곳으로 향했다.

인영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하나의 대가, 세 개의 은혜’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났을 때, 홀의 가장 안쪽에 이른 건우는 묵직한 회백색 돌문을 볼 수 있었다.

검은색의 금속 벽에 박힌 문은 뭇별들의 빛에 잠긴 채, 돌연 세 개의 홈을 드러냈다.

2미터 높이에 자리한 그 홈들은 정삼각형 모양의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들을 몇 초간 가만히 주시하던 성건우의 눈에 순간 반짝이는 뭇별들이 비쳤다.

곧장 앞쪽으로 몸을 기울인 그는 회백색 돌문에 두 손을 얹었다.

돌문의 표면에 자리한 홈 안에서는 여러 덩어리의 흰색 빛이 발산되었다. 마치 높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그 안을 채운 듯한 광경이었다.

세 개의 별 안에서는 허상의 문자가 빠르게 떠올랐으며, 성건우의 사고에 따라 변하듯 시종일관 움직였다.

묵직해 보이는 회백색 두 짝 돌문은 끼익 소리를 내었지만, 인색하게도 약간의 틈만 보일 정도로 살짝 열릴 뿐이었다.

잠시 멈춘 성건우는 숨을 가다듬더니 재차 힘을 내어 문을 밀었다.

세 개의 홈 안을 채운 별들은 그를 따라 멈추며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성건우가 다시 한번 힘을 내자 밝고 순수한 빛을 뿜어냈다.

그 안에서 떠오른 문자들의 움직임도 느릿해지기는 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이내 돌문이 살짝 흔들리긴 했으나, 반 발짝만큼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건우는 계속해서 돌문을 밀었다. 급기야는 이마의 혈관이 불룩 튀어나오고, 얼굴이 마구 일그러질 정도였다. 하지만 사력을 다했음에도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휴.”

한숨을 토해내며 멈춘 그는 문 앞에 서서 세 개의 홈 안에 자리한 별들이 빠르게 어두워지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성건우는 이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웃음을 지어 보이던 성건우는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자신의 미간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의 분위기는 전보다 훨씬 더 심원해진 듯했다.

뒤이어 그는 왼손을 주머니에 꽂고 오른손 손바닥을 앞으로 뻗은 후, 그 손바닥을 회백색 돌문에 가볍게 얹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에 비친 뭇별은 더욱 또렷해진 채 반짝거렸다.

회백색 돌문 표면에 드러난 세 개의 홈은 다시 별빛으로 채워지며 흰색 덩어리로 응집되었다. 이어서 이전에 나타났던 허상의 문자도 재차 나타났으나, 문자가 움직이는 속도는 점차 느려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침내 멈추었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순서를 따랐을 때, 세 개의 흰빛 덩어리 안에서 나타난 문자는 각각 다음과 같았다.

「추리 광대」, 「억지꾼」, 「양손 동작 불능」.

이에 따라 미약하게 떨리던 회백색 돌문은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묵직하게 살짝 밀려났다.

전보다 더 넓어진 문틈 사이로는 약간의 빛이 번득였으며, 어둠 속에서 위쪽으로 연결된 은백색의 금속 계단이 드러났다.

성건우는 그 문틈 사이로 손을 넣어보려 했으나 금방 실패했다.

이번엔 발을 넣어보려고도 했으나, 마찬가지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손발을 모두 사용한 그는 각종 자세를 취해보았다. 깨금발도 서보고, 물구나무도 서 봤지만 그 어떤 것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검증을 거친 그는 문틈 사이로는 손가락 끝과 코끝만 겨우 집어넣을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회백색 돌문을 더 열 순 없었다.

거듭된 시도 속에 성건우의 인영은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행동을 멈춘 그는 점점 흐릿해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 * *

495층 B구역 196호 안, 침대에 기대어 앉은 성건우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시야에는 등불이 비쳐 들어오는 네 칸짜리 창문과 그 빛에 비친 나무 탁자, 점차 어두워지는 거실, 그리고 깊은 어둠에 이미 잠긴 스툴 끄트머리와 오래된 침대 가장자리가 들어왔다.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그러던 그때, 거리의 천장에 달린 확성기에서 아직 앳되고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오후 5시 20분, 102층의 모 공장에서 소형 화재가 일어나, 한 명의 사망자와 세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불은 이미 꺼졌으며, 물자 손실 상황은 파악 중입니다. 이사회의 이사들과 기 부총재는 ‘거센 불길은 인정사정없으니 항상 경계심을 잃지 말자’는 말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내일부터 에너지 구역의 2호 원자로 유닛이 정비를 위해 정식으로 중단됩니다. 모든 직원의 에너지 배급량 중 25%가 줄어들 것이며, 정상 수치로의 회복 시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지열연구소의 수석 과학자 손성구의 말에 따르면, 개선된 지열 이용 모형의 설계를 모색 중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내부 생태 구역의 토지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면서, 생활 구역의 야간 온도를 어느 정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녁 6시 40분, 577층의 직원 식당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분쟁은 식당의 배식원이 음식을 공평하게 나눠주지 않고 같은 1인분의 고기반찬도 자신에게는 10분의 1 정도 적게 준다는 모 직원의 주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해당 층의 질서감독팀은 이미 사건을 조사 중입니다.

저녁 7시 20분에서 30분 사이, 414층의 활동 센터에서 두 남성 직원의 몸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해당 층의 질서감독팀이 조사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현장에 있던 목격자는 공동 결혼의 결과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고 증언했습니다.

⋯⋯오늘 준비한 뉴스는 여기까지입니다. 끝으로 언제나 그렇듯 아카펠라 음악을 틀어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건우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닿지 않는 침대 위에 앉은 채 평온한 표정으로 방송을 들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들었다.

* * *

다시 깨어났을 때, 바깥의 등불은 이미 꺼져 있어 사방이 컴컴했다.

밤의 싸늘한 공기가 방 안에서도 느껴졌다. 어느새 옷을 벗은 성건우는 이불 속으로 파고든 채, 침대 가장자리에 놓아두었던 암녹색의 두꺼운 코트까지 덮고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가 없기에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아침 6시 반이 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 거리의 등불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묵묵히 시간을 계산해보았다. 어젯밤 그는 8시가 되기 전, 그러니까 평소보다 2시간 전에 잠들었다. 그러므로 평소보다 2시간 정도 빨리 깨어났을 게 분명했다.

아랫배가 약간 묵직해진 것을 느낀 성건우는 베개 옆쪽을 더듬어 검은 플라스틱 랜턴을 찾은 뒤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한 줄기의 빛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 비스듬히 떨어진 싱크대를 비췄다.

“세수하고 이 닦고, 발 닦는 것도 잊었네⋯⋯”

중얼거리던 성건우는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회사 내부에서 독립된 화장실을 가질 수 있는 비교적 높은 급의 직원과 관리자들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활동 센터에 딸린 대형 목욕탕에서 씻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특별한 직무를 맡아 매일 몸을 씻어야 하는 직원이 아닌 이상, 다른 이들은 일주일에 최대 두 번만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정해진 샤워 시간을 놓친다면 그 기회는 자동으로 폐기되며, 누적되지도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온 성건우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이불 위에 덮어둔 암녹색 코트를 걸쳤다. 이어서 랜턴을 들고 황급히 문밖으로 나선 그는 곧장 거리 끄트머리에 자리한 공용 화장실로 향했다.

* * *

랜턴에 든 건전지도 배급받는 에너지의 일부였기 때문에, 성건우는 이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적잖은 수의 직원들은 밤 중에 문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집안에 요강과 타구 등을 갖춰놓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갖춰놓기 위해서도 공헌점수가 필요했다.

이 시각, 공용 화장실은 텅 비어있었다. 성건우의 발소리에 화장실 안의 센서등이 자동으로 켜졌지만, 그 밝기는 상당히 낮았다.

일단 급한 일부터 해결한 성건우는 곧장 화장실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복도의 모퉁이에서 랜턴 불빛 한 줄기가 나타났다.

몇 초 후, 건우의 것과 같은 암녹색 코트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빠르게 이쪽을 지나쳐, 공용 화장실 반대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건우는 그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돌연 랜턴을 끄고는, 어둠 속에서 발소리까지 죽여가며 상대의 랜턴 불빛을 쫓았다.

빠르게 그 근처에 이른 성건우는 상대가 근처 거리에 사는 중년 직원임을 확인했다. 심도환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중년 남자는 성건우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아저씨!”

성건우는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상대의 어깨를 툭 쳤다.

화들짝 놀란 심도환은 하마터면 랜턴을 떨어뜨릴 뻔할 정도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려움에 잠식된 얼굴로 성건우를 돌아본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건우야, 놀라 죽는 줄 알았다!

이런 밤중에 그렇게 갑자기 다가와서 인사를 하면 어쩌냐!”

그 말에 성건우가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지금이 몇 시인지 묻고 싶어서요.”

“아직 6시가 안 됐다.”

괘종시계가 걸린 사거리의 방에 사는 심도환이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지금 어디 가시는 건데요?”

성건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화, 화장실에 좀⋯⋯.”

심도환은 말을 채 맺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금 가장 가까운 공용 화장실로부터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랜턴 불빛 아래, 점잖아 보이는 심도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창백해지기를 반복했다. 밤중의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 말을 고르던 심도환이 곧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C 구역에 있는 공용 화장실에 가려고. 휴, 어젯밤에 활동 센터에서 놀다가 거기에다 뭘 떨어뜨리고 왔다는 게 방금 막 생각이 났지 뭐냐. 얼른 가서 찾아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에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갈색 눈동자는 주위의 어둠에 물든 듯했다.

이내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보세요. 아저씨도 녹색 코트를 입고 있고, 저도 녹색 코트를 입고 있네요. 아저씨도 남자고, 저도 그렇고요.”

영문 모를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심도환은 곧 뭔가를 깨달은 듯 대꾸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우(敎友)구나!”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열정적인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너도 인도자의 설교를 들으러 가던 길이었냐?”

“맞아요.”

성건우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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