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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4화 (4/649)

4화. 소문

뒤이어 주위를 슥 훑어보던 성건우가 또 다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건 시계인가요?”

“그래, 손목시계다. 안쪽의 기계 구조가 아주 복잡하던 걸. 지금도 돌아가긴 해. 물론 조정은 좀 해야겠지만.”

진현오는 눈을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어때, 생각 좀 해볼 테냐? 시곗바늘과 숫자는 밤이 되면 알아서 빛을 발하기 때문에,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따로 랜턴을 켤 필요도 없지. 회사 내부에서 좋은 손목시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백 명도 채 안 될 거다. 이걸 사면 더는 시보나 괘종시계에 의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야. 이 층에 사는 모든 주민의 부러움을 살 수도 있겠지. 혹시 아냐, 어느 아가씨가 그런 네 모습을 보고 연애라도 걸어올지⋯⋯.”

성건우의 손에 들린 손목시계의 은빛 시곗줄은 곳곳이 갈라지고 녹슬어 있었다. 보석처럼 파란 시계판 위의 초침은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유리는 균열로 뒤덮여있었다.

“얼만데요?”

성건우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진현오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6만 점.”

성건우는 번개처럼 빠르게, 시계가 마치 뜨겁게 달아오른 무언가라도 되는 듯 손에서 황급히 내려놓았다.

6만 점이라니, 다달이 1800점을 받는 D1 직원으로서는 거의 3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야만 모을 수 있는 점수였다.

진현오는 애초부터 성건우에게 시계를 팔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저 젊은이에게 농을 던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내 진현오가 좌판 중앙에 놓인 금속 원통을 가리켰다.

“이건 어떠냐? 아주 좋은 물건이야. 군용 통조림이지!”

건우는 그 통조림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겉을 감싼 비닐은 이미 썩어 있었으며, 제품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해져 있었다. ‘소고기 조림’과 ‘500g’이라는 글자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어때, 아주 묵직하지? 내용물이 아주 꽉 차 있다는 뜻이지!”

진현오는 침까지 튀겨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단언컨대, 이 군용 통조림의 맛은 정말 굉장해. 난 평생 그 훌륭한 맛을 잊지 못했지. 구세군의 건조 통조림보다 훨씬 맛있다니까!

내 전우의 그 아들 녀석이 이번에 이런 통조림 한 상자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너한텐 이걸 맛볼 기회조차 영원히 없었을 거다. 가격도 하나에 60점밖에 안 해. 얼마나 싸냐?

공급 시장에 가서 생고기 한 근을 사려고 해도 50점을 줘야 한다고. 생고기를 사면 뭐하냐. 조미료도 따로 사야 하고, 네게는 요리를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게다가 고기가 원한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냐? 그리고, 에헴, 통조림을 다 먹고 난 뒤 이 깡통을 물자관리부에 가져다주면, 공헌점수로 바꿀 수도 있어. 이보다 수지타산이 잘 맞을 수가 없지.”

진현오를 바라보고 있던 성건우는 상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불쑥 물었다.

“유통기간이 언제까지인데요?”

“유통기간이라, 그걸 내가 어찌 알아? 구세계의 연도를 어떻게 환산하는지도 모르는데.”

진현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신력도 46년밖에 안 됐으니, 먹어도 될 거다.”

이후 진현오는 추억에 젖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안전부에 있었을 때, 밖에 나가 임무를 수행하다가 보급품을 잃는 바람에 굶어 죽을 뻔한 적이 있었거든. 그러다 다행히 군용 창고를 하나 찾아 이런 통조림을 발견했었다. 그때 그 통조림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먹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 맛도 아주 끝내줬고.”

통조림을 쥔 성건우는 진현오의 말에 호응을 하지도, 그렇다고 통조림을 내려놓지도 않았다.

그가 입을 연 것은 몇 초간의 정적이 이어진 후였다.

“이거, 노래할 수 있습니까?”

“응?”

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진현오는 처음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때였다. 노란색 플라스틱 도시락 두 개를 들고 활동 센터 밖에서 달려 들어온 용여홍이 성건우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이따 저녁 같이 먹어!”

“네가 사는 거냐?”

성건우는 통조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러자 용여홍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가지고 있는 보조금이 꽤 되지 않았어?”

성건우의 부모님은 아무런 유산도 남겨놓지 않았지만, 회사에선 혼자 남은 그에게 어느 정도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매달 1200점의 보조금도 들어왔다. 이는 모든 대학생에게 지급되는 보조금이었다.

덕분에 성건우는 힘겹게나마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조금은 직무를 배정받은 대학생이 정식적인 첫 출근을 한 지 한 달이 되는 날까지 지급되었다.

성건우는 용여홍의 거절에도 당황하거나 난감한 기색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기쁜 일이 생겼을 때는 당연히 친구와 그 기쁨을 나눠야 하는 거 아냐?”

“밥 한 끼 사는 게 기쁨을 나누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거냐?”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진현오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래, 여돌아,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낙심해 있더니, 기분이 좋아진 것을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구나.”

“아명으로 부르지 말라니까요⋯⋯.”

투덜거리던 용여홍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내년 공동 결혼까지 기다릴 필요 없다고 하시네요. 부모님 동료분들의 딸이 대학에 입학하지 않고 곧장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그 애들을 소개해주시겠다잖아요. 어쩌면 그중 한 명과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모르죠.”

직원들에게 대학에 입학할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그 기회를 놓친다면 곧장 일을 배정받았다(물론 일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면, 추천을 받아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기는 했다). 이때 그들의 나이는 보통 열여덟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 결혼 대상에 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운에 맡겨야 하는 무작위 배정보다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상대를 고르는 것을 더 선호했다.

물론 자유연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매일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해야 했고, 그 사이에 주어지는 휴식 및 식사 시간은 1시간 반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녁 9시부터는 활동 센터의 불도, 가로등도 꺼져서 다들 집으로 돌아가 쉴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들이 적합한 이성과 만날 기회나 시간은 매우 적었고, 만날 시간 역시 한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일반 학교나 대학 안에서는 자유연애를 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말을 잇던 용여홍은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 사람은 제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죠.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키가 175센티미터 밖에 안 되고, 생긴 것도 그저 그렇고, 성적도 좋은 편은 아닌 데다가 아직 어느 부서에 배정받지도 못했으니까⋯⋯.”

“저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성건우는 자기연민에 빠진 용여홍의 말을 끊으며,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오래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적잖은 수의 직원들이 모여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용여홍 역시 그 모습을 보고 호기심을 느낀 듯, 성건우와 함께 그쪽으로 다가갔다.

동시에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아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상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모,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용여홍이 말을 건 상대는 사십 대로 보이는 어느 중년 여자였다. 그녀는 테릴렌 셔츠 차림에 외모가 꽤 아름다웠는데, 머리를 간단히 틀어 올리고 있었다.

임결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용여홍의 이웃집 사람으로, 회사 내 전략위원회에 딸린 부서의 직원이었으며 등급은 D3였다.

용여홍을 본 임결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도는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무슨 소문이요?”

용여홍이 그녀를 보고 캐물었다.

이때 그쪽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진현오가 앞쪽 좌판 위의 군용 통조림을 바라보더니 못 참겠다는 듯 꼴깍 침을 삼켰다.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눈앞에 놓인 것과 비슷한 군용 통조림을 열었을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 통조림은 노래할 수 있지⋯⋯. 아니, 내 배와 영혼으로 하여금 노래를 하게 할 수 있지.”

진현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편, 테이블 주위의 임결이 좌우를 살피며 잔뜩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에서 모두의 생육권을 박탈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예?”

예상치 못한 화제에 용여홍은 잠시 그게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임결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성건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는 아이가 필요한 부부로 하여금 의사의 지도와 도움 아래 생물학적 재료를 제공하게 할 건 가봐.

그 후 연구소에 대형 생육 센터를 만들어서 일괄적으로 시험관 수정, 인공 자궁 배양, 영아의 성장을 보조하고 관여하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아이와 만날 때쯤이면 이미 그 아이들은 꽤 자라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휴, 말로는 이러한 방침을 통해 여성들을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회사의 노동력 부족 상황을 해결하겠다더라고.”

임결이 말을 마치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십 대 여자 한 명이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잘된 일 아닌가요?”

“이게 어떻게 잘된 일이에요?”

임결이 어두워진 얼굴로 대꾸했다.

“생명을 잉태하는 건 신이, 그러니까, 하늘이 우리에게 준 신성한 권리예요. 그런데 그 권리를 어떻게 기계에 넘겨요? 정말로 그렇게 되면 아이와 무슨 감정을 쌓을 수 있겠느냐고요.”

“맞아요.”

그녀로부터 비스듬히 떨어진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받았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구세계도 윤리를 따르지 않은, 금지된 실험을 진행하는 바람에 멸망된 거라고 하던데요.”

임결은 고개를 연거푸 끄덕이며 다시 성건우와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니? 너희들도 임신과 출산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관건이자, 하늘이 부여한 신성한 권리라고 생각하니?”

성건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용여홍은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임결의 모습에 힉, 하고 숨을 작게 들이마셨다.

“그, 그럼요.”

“너희는 그래도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구나.”

임결은 그제야 웃어 보였다.

그때, 다른 직원이 웃으며 입을 뗐다.

“너무 진지한 거 아냐? 이건 그냥 소문일 뿐이라고. 내 삼촌이 이사회 산하의 기구에서 일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대!”

그 말에 임결이 한층 더 엄숙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 그냥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뿐이에요. 정말로 그런 방침이 내려온다면 누구라도 나서서 의견을 제시하고, 그 일에 반대해야 할 테니까요.”

누군가는 침묵했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상상력이 풍부한 누군가는 이렇게 물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규정이 생긴다면 결혼도, 공동 결혼도 취소될까요?”

구세계에 관한 소문을 언급했던 사내가 강경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기 이사님께서는 조화롭고 건강한 결혼은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직원들의 정신 상태 안정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기 이사, 즉 기택조는 회사 이사회의 회원이자 부총재인 M3급 고위층 관료였다. 그는 수시로 방송을 진행하는 한편, 연말연시에 활동 센터의 화면을 통해 모든 직원에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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