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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3화 (3/649)

3화. 재검사

엘리베이터는 계속, 한참을 내려가다가 겨우 멈추었다.

이후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튼 성건우는 굳게 닫힌 금속 짝문을 보게 되었다. 거대한 문 앞에는 생체 공학 갑옷을 착용하여 똑바로 선 도마뱀을 연상케 하는 무장 보안 요원 네 명이 서 있었다.

성건우는 그 금속 문 근처로 다가가는 대신, 문밖의 복도를 따라 오른편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는 문패가 없는 여러 개의 방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에 박힌 등의 불빛 아래, 가장 끝에 있는 문 앞에 이른 성건우가 그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문 안쪽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문을 연 건우는 흰색 가운을 입은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원목 책상 앞에는 머리를 말끔하게 틀어 올리고 금테 안경을 낀, 삼십 대로 보이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너구나.”

여자는 건우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책상 맞은편에 놓인 등받이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성건우는 지정된 자리에 앉으며 집에 돌아온 듯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안녕하세요, 인 선생님.”

“안녕, 건우야.”

인 선생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옆에 놓인 파일 하나를 가져와 펼쳤다.

뒤이어 검은색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여유롭게 물었다.

“요즘은 좀 어때?”

“먹는 양이 좀 늘었어요. 잠도 잘 자고요. 몸도 건강합니다.”

성건우는 답을 하며 이두박근을 부풀려 보였다.

그러자 인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동 결혼 포기 신청서는 이미 제출했어. 결과는 확인했니?”

“네, 감사합니다.”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의 뜻으로 노래라도 좀 불러드릴까요?”

“괜찮아.”

인 선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젓더니,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사실 궁금했어, 왜 그렇게 공동 결혼을 포기하려고 한 건지 말이야. 네 상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잖아.”

진지한 표정을 드러낸 성건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류를 구하려고요.”

“⋯⋯.”

펜을 든 인 선생은 앞에 놓인 파일의 어딘가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 동그라미 안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급 정신 이상(망상증으로 의심됨. 관찰 대기.)」

동그라미를 다 그린 인 선생이 펜을 거두고는 성건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건 구세군에서 제창할 법한 구호인걸?”

성건우는 음, 소리를 내다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인 선생님, 제 생각에는 선생님께서 제 상황을 뭔가 오해해 정상적인 일들을 병의 증거로 여기시는 것 같아요.”

인 선생은 허리를 살짝 곧추세웠다. 이내 그녀의 깨끗하고 흰 얼굴에 약간의 웃음기가 어렸다.

“어느 부분에 오해가 있는 것 같니?”

성건우는 할 말을 고르고 정리하는 듯 2, 3초 정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순수하고 고상한 정열을 이해하지 못하세요. 저급한 흥미를 가진 인간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시는 것 같네요.”

그 말에 인 선생이 입을 꾹 다물었다.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콧등 위에 얹힌 금테 안경을 위로 밀어 올린 그녀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느릿하게 내뱉으며 말했다.

“그렇지, 이 시대에 그런 이상주의자가 생존할 공간은 없으니까. 심지어는 구세군도 타락했고.”

잠시 뜸을 들이던 인 선생이 말을 이었다.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볼 순 있어. 하지만 너도 나한테 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알려줘야 해. 어떤 일 때문에 그런 충동을 갖게 된 거니?”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전 그냥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성건우는 한숨을 내쉬며 웃어 보였다.

“인 선생님, 선생님은 제가 봤던 사람 중 가장 따뜻하고 가장 기품 있는 분이세요. 저,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인 선생이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나한테는 이미⋯⋯.”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건우의 말이 이어졌다.

“전 원래 선생님께서 제 정신적 어머니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보니 저희의 사상은 전혀 다른 세계에 있군요. 그게 정말 안타깝습니다.”

콜록콜록!

인 선생은 사레가 들린 듯 몇 차례 기침을 했다.

옆에 놓인 머그컵을 들어 목을 축인 그녀는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휴, 이번 달에 배급받은 찻잎도 다 써버렸네.”

뒤이어 그녀는 성건우가 다시 입을 열기 전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잔뜩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최근에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거나, 남이 보지 못하는 뭔가를 본 적은 없니?”

성건우는 매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인 선생은 그런 성건우의 표정을 몇 초간 관찰하더니 다른 질문을 이어나갔다.

* * *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건물의 모든 층에서 달콤한 여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졌다.

- 정각 시보입니다. 현재 시각, 오후 6시.

“시보가 방송됐네.”

시간을 알려주는 여자의 목소리가 세 번 반복된 뒤 방송이 끝나자, 인 선생이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이내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덧붙였다.

“잠자는 데 문제없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도 않는다면 약 처방은 하지 않을게.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다시 보자.”

“알겠습니다, 인 선생님.”

자리에서 일어난 성건우가 문 쪽으로 향했다.

당장 나가려는 듯 문까지 연 그가 돌연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인 선생님.”

인 선생은 웃으며 답했다.

“고맙긴.”

밖으로 나간 성건우가 조심스레 문을 닫자, 한숨을 내쉰 인 선생이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예의가 참 바르다니까.”

동시에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파일을 넘기며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을 살폈다.

「성명 : 성건우.

연령 : 21세.

생년월일 : 신력 25년 9월 8일.

가정상황 : 아버지 성세원은 D7 조장급 직원으로 신력 37년, 구조팀의 전원과 함께 실종됨. 어머니 장여향은 D3 일반 직원으로 초등학교 교사 일을 하다가 신력 40년 10월 병으로 사망. 병의 원인은 지나친 상심으로 추정. 신력 40년 10월부터 43년 9월까지 495층의 고아원에서 자란 성건우는 그 후 대학 전자과에 입학.

상황 설명 : 신력 46년 5월, 성건우가 자발적으로 기밀 실험 지원을 신청, C-14 프로젝트에 참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강한 힘을 얻어 아버지 실종의 진상을 조사하고 싶다고 함.

실험 결과 : 실패, 대조군과 비교했을 때 아무런 변화도 없음.

후유증 증상 : 논리체계에 간헐적으로 혼란이 일어나 비약적인 결론을 내리곤 함. 그 외에 다른 이상은 없음.

추가 사항 : 유전자 검사 결과 정상.

종합 판단 : 중급 정신 이상(망상증으로 의심됨. 관찰 대기.)」

한동안 내용을 살피던 인 선생은 펜을 들어 덧붙였다.

「신력 46년 7월 10일 재검사 결과 :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으나 심화되지도 않음. 폭력적인 경향이나 공격성은 보이지 않음. 일단은 무해하다고 봐도 될 것 같음.」

* * *

저녁 6시는 회사에서 정한 퇴근 시간이었다. 추가 근무를 해야 하는 특정 팀과 24시간 교대로 돌아가는 직무를 제외한다면, 그 외의 모든 직원은 이 건물의 5층에 자리한 관리 구역, 6층에서 45층까지의 연구 구역, 46층에서 145층까지의 공장 구역(겸 유지 구역), 146층에서 345층까지의 내부 생태 구역을 떠나 300개 층이 넘는 생활 구역으로 돌아갔다.

에너지 배급에 따르는 한계와 부부와 집안의 어른 모두 일하고 있을 가능성 때문에, 모든 직원은 각 층의 물자 공급 시장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편이었다.

물자 공급 시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한쪽에서는 내부 생태 구역에서 공급되는 고구마, 감자, 쌀, 밀가루, 고기, 채소와 과일, 그리고 공장 구역에서 공급되는 천, 설탕, 소금 등의 물자를 팔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각종 음식을 팔았다. 그 때문에 이 구역은 직원들에게 직원 식당이라 불렸다.

식당에서의 식사는 집에 가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것보다 비싸고 맛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하지만 에너지를 넉넉히 배급받지도 못하고 온종일 일하면서 피로가 쌓인 직원들에게는 이쪽이 더 나은 선택지로 보였다.

또한 이는 회사 고위층이 통일된 급식을 통해 에너지의 소모를 줄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권장하는 사항이기도 했다.

성건우가 495층으로 돌아갔을 때는 식당이 문을 여는 6시 30분까지 아직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식당 문이 6시 30분에 열리는 것은 특정 직무를 수행하는 직원들에게는 퇴근하자마자 일단 씻고, 소독하고, 그 외의 다른 일들을 처리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직원의 공평성을 위해 이사회에서는 식당 문이 열리는 시간을 퇴근 시간으로부터 30분 늦추기로 결정했다.

6시 15분 전에 각자의 생활 구역으로 돌아간 직원들에게는 물자 공급 시장 옆에 붙은 활동 센터가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등불 아래에서 생활과 일 등에 관한 각종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를 통해 밖에서 살아남느라 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우월감을 느끼곤 했다.

어떤 직원들은 이 틈을 타 필요 없는 물건을 팔며 더 많은 공헌점수를 쌓기도 했다. 그 때문에 매일 저녁 6시부터 6시 반, 7시부터 8시 반까지 활동 센터의 홀 안에는 소규모의 장이 열렸다.

성건우는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수시로 끽끽 소리를 내는 작은 스툴에 앉은 활동 센터의 주관자 진현오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기이한 물건들이 드문드문 널려 있었다.

“이게 뭐예요?”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성건우가 금속 케이스에 검은색 화면이 달린, 사각형 모양의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가 알겠나? 단단하긴 하니까, 누굴 때릴 때 쓰거나 방탄용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진혀오는 자신의 가슴팍을 쿡 찌르며 답했다.

“어디서 얻으셨는데요?”

성건우가 그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진현오가 가래가 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내 전우의 막내아들에게서. 그 녀석은 지금 안전부에서 일하고 있거든. 얼마 전에 어느 구세계 도시 유적에 갔다가 돌아왔다더군. 휴, 시간 참 빠르다니까. 막 태어나 꼬물거리던 것을 봤을 때가 엊그제인 것 같은데⋯⋯.”

잠시 기억을 떠올리던 진현오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어찌 되었든 선별 결과, 회사에는 필요치 않은 것으로 판별되었다더군. 그래서 나한테 판매를 맡긴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나에게는 밥을 지어줄 사람이 있으니 식당에 갈 필요가 없지 않으냐.”

사실이었다. 진현오는 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검은 화면 위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나 있는 걸 보고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얼마입니까?”

“비싸지도 않아. 오백 점이다.”

진현오가 여유롭게 가격을 제시했다.

성건우는 들고 있던 물건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고기 열 근 값이네요.”

고기라는 말에 그와 진현오는 동시에 침을 꼴깍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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