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화. 겁주기
공손수는 허칠안이 나오는 모습을 보자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허리를 굽히고 읍하였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녀 옆에 있던 무사들도 허리를 굽히고 읍하며 일제히 말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별일 아니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공손수 일행이 입을 떼기 전에 알아듣게 말했다.
“무덤 안에 있는 미라는 사납고 흉악하여 3품 이하가 그 안에 들어가면 죽음뿐이오. 전봉 시기라고 해도 3품 무사가 반드시 그의 적수라는 보장도 없소. 오늘부터 동굴 입구를 봉쇄하고 아무도 뛰어들지 못하게 엄금하시오. 미라가 만약 정혈을 삼켜 회복하면 장차 옹주는 지옥이 될 것이오. 이 일은 공손 세가에서 끝까지 책임져야 하오.”
‘3품 무사가 미라의 적수가 아닐 수도 있다니…….’
사람들은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강렬한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들이 어찌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바퀴 돌았단 말인가. 정말이지 염라대왕과 술을 마신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이 현세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염라대왕이 과음해서였다…….
“네!”
공손수는 읍하였고, 붉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름다운 얼굴에 진지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반드시 이 산을 지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용기를 내어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어느 쪽 고수이신지요?”
이 질문은 좀 무례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방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은인의 신분을 묻는 건 그런대로 합리적이었다.
허칠안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곧장 산 아래로 걸어갔다.
공손수 일행이 실망할 때, 청의가 점점 어둠을 향해 가다 소리 높여 말했다.
“득도한 지 800년이 되었는데 비검으로 사람의 머리를 취한 적이 없구나. 옥황상제가 아직 천부(天符)를 소환하지 않았는데 칼을 쥐고 강호를 떠돌며 속세에 섞여들었네.”
‘득도한 지 800년이 되었는데 비검으로 사람의 머리를 취한 적이 없구나…….’
청곡 도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횃불의 빛이 늙어가는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흐리멍덩한 눈빛에는 설렘이 내포되어 있었다.
“득도한 지 800년이 되었다니, 이 고수가 800년 전의 인물인가? 세상에, 어찌 대봉 나이보다 더 많단 말인가?”
“대, 대주 시기의 신선 인물인가?”
“신선, 신선이라…….”
주위의 무사들은 흥분하여 온몸을 떨었다. 그들은 이미 지하 궁전 아래에 무시무시한 미라, 그들의 개념으로는 강시가 봉인되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곳의 붕괴가 대규모 전투로 인해 야기되었으며 오늘 점심에 양백호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내용들은 방금 공손수 일행이 올라올 때 이미 모두에게 알린 정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시를 듣고 난 뒤 청의 남자의 수준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다들 그가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나타난 재야의 고수에 속한다는 걸 인정하였다.
공손수는 약간 동요하였다.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윤이 나는 주홍빛으로 물들이자, 검고 윤택한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청의 남자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에게서 오랫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 * *
허칠안은 산에서 내려와서는, 평지를 따라 한 바퀴 크게 돈 뒤 서쪽 산맥으로 들어갔다. 그는 산속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독초를 찾느라 바빴다.
맹독성 화초를 추적하는 일은 독고의 천부적인 능력이었다.
설령 허칠안이 독약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는 독고를 받아들여 하나로 합치기만 하면 이 능력을 계승할 수 있었다.
그는 꼬박 하룻밤을 들여 십여 가지의 독초를 찾았다. 독성의 강도는 다 달랐다. 독성이 옅은 건 기껏해야 구토와 설사를 유발했으나, 독성이 짙은 건 혈관에 들어가면 즉사할 정도였다.
이밖에도 그는 동면하는 독사를 적잖이 찾아 독을 얻어냈다.
약방에서 살 수 있는 맹독성 물질에는 한계가 있었고 종류가 단조로웠기에 이는 독고의 발육에 불리하였다. 그는 이번에 외출한 틈을 타 아예 이곳에서 유독 물질을 좀 수집하였다.
그는 돌아간 뒤에, 미라의 독과 섞어, 혈관에 들어가면 즉사하는 맹독성 물질을 배합해내 독고에게 먹였다.
이는 그의 실력을 몇 할 더 끌어올리고 더 강한 위험 대처 능력을 갖게 할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가다간 강호에 독군자(毒君子) 서겸이 나타날 듯한 느낌이야. 강호 100인 명단에 오를지도 모르겠는데……. 성추행범 서겸, 벗을 위해 목숨도 바치는 서겸, 짐승의 왕 서겸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 물론, 서겸이 하는 일이 나 허칠안과 무슨 관계가 있겠어? 나는 여전히 대봉 백성 마음속의 신인걸. 음, 이번에 서겸이라는 말의 갑옷을 빠트리면은 안 돼…….’
그는 독초와 독사액을 수집한 뒤 연못을 찾아 몸과 발에 묻은 진흙을 깨끗이 닦았다.
그는 날이 밝기 전에 주루로 돌아왔다. 심부름꾼은 계산대 앞에 엎드려 단잠을 잤으며, 몇몇 화로는 뜨거운 물을 끓이고 있었다. 숯불은 이미 매우 약해진 상태였다.
이렇게 큰 객잔에서는 가을과 겨울 두 계절에 밤새 따뜻한 물을 공급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서비스였다.
이윽고 심부름꾼은 소리 소문 없이 객잔에 잡입한 형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숙소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허칠안은 긴 복도를 걷다가 갑자기 귓바퀴를 움직였는데, 어느 방에서 사이좋은 남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침상은 리듬 있고 가볍게 끼익 소리를 냈고, 남자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여인의 낮은 신음이 뒤엉켜 들려왔다.
‘참 내, 아침 운동이라고 해도 너무 이른 거 아닌가. 날이 밝기까지는 아직 두 시진이나 남았는데…….’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형용할 수 없는 소리를 내는 방을 지나쳐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암고와 정고가 호흡을 맞춘 것으로 그야말로 범죄자가 자나 깨나 바라는 수단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속한 무사의 범주에서 벗어나 그럴싸하면서 성숙한 강호 협객이 된 게 점점 더 만족스러워졌다.
그가 가장 끝에 있는 방에 이르자 환한 촛불 빛이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앗, 그녀가 아직도 안 잤다고?’
허칠안은 문을 두드렸으나, 방 안에서는 대답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허칠안은 경미하게 이불을 끄는 미세한 소리와 어지럽고 격렬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그는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의 몸이 그림자로 변해 사라지더니 탁자 아래에서 검은 형체가 뚫고 나왔다.
* * *
봄처럼 따스한 침실 안에 우아한 장식이 돋보였다. 모남치는 넓은 비단 평상 위에 웅크린 채 이불을 정수리까지 끌어당겨 머리를 덮고 벌벌벌 떨었다.
‘아니겠지? 무서워서 밤새 안 잤나? 겁쟁이에 귀신을 무서워하는 건 알았지만, 너무 쪼는 거 아닌가…….’
그는 본래 여자 놀리는 걸 좋아하는 놈이었다. 왕비가 이렇게 모자란 걸 보고 즉시 몰래 다가갔다.
그는 두 손을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뻗었다.
왕비는 이불 속에서 틈새 사이로 입구를 보느라 바빠, 이불 속으로 뻗어온 두 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고도로 긴장했을 때 차디찬 손이 갑자기 허리를 휘감더니 귓가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헤이!”
“아아아아아악!”
왕비는 한번 튀어 오르더니 높은 데시벨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어설픈 무술 몇 동작을 배운 서툰 실습생처럼 두 발로 그를 마구 걷어찼다. 그리고 그녀는 이불 안에서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불그스름한 입으로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저 그녀의 허리를 한번 감았다가 바로 손을 놓았을 뿐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후유증이 너무 컸다. 그녀는 한참을 발로 차고 때리고 비명을 지른 뒤에야 서서히 조용해졌다.
그런 뒤 그녀는 침상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웃음소리를 듣고선 눈물을 머금은 채 앞을 보았다. 허칠안이 침상 옆에 앉아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너와 끝장을 보겠어!”
모남치는 울면서 달려들어 손으로 허칠안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녀는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 자신의 무력과 목표가 일치하지 않는 걸 알아차리고 이불을 감싼 채 몸을 옆으로 돌려 그와 등을 졌다. 모남치는 혼자 화를 내며 마음속으로 묵묵히 저주를 퍼부었다.
“저기요, 방금 많이 놀랐나 봐요. 제가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올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저희 점심시간에 뭐 먹을까요? 이 계절에 옹주에서 가장 맛있는 건 그래도 게더라고요.”
허칠안은 대화를 통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녀는 삐져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도한 여자는 좀처럼 달래기 어려운 상대였다. 하물며 그녀는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두 사람은 사실 방금 진정으로 상식을 벗어나 허리를 꼬집은 그 동작이, 그 자체로 사람을 놀라게 한 원인은 아니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허칠안은 탁자 뒤에 앉아 밝게 비추는 촛불 사이로 용기를 수집하는 일을 깊이 생각했다.
초혼종의 재료는 수집하기에 매우 어려웠다. 그가 단기간 내에 다른 재료를 더 수집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미라의 손톱과 독액을 모은 것만으로 이미 임무를 원만하게 완수한 셈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용기를 어떻게 수집할지 생각해야 했다.
‘옹주는 대봉의 13개 주(州) 중 하나로 분명히 용기의 숙주가 있을 것이다. 이 점은 명확한 사실이다. 허나 설령 나 자체가 소형 레이더라고 해도 옹주의 모든 땅을 두루 돌아다니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정말 이렇게 한다면 그건 너무 어리석고 효율이 너무 낮다. 시간과 힘을 절약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지하 궁전의 미라와 공손 세가를 연상하였고 은근히 정신이 들었다. 애매한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랐으나 한동안 모양을 갖추기 어려웠다.
이때 그는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모남치는 어느새 잠들어 호흡이 평온해졌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안심하며 잠이 들었다.
그는 촛불 사이로 부드럽게 웃었다.
* * *
이튿날이 되자 공손수는 빠른 말을 타고 날이 밝기 전에 산장으로 돌아가, 부친 공손향양(公孫向陽)이 거주하는 큰 뜰로 곧장 달려갔다.
공손향양은 화경 전봉 무사로 4품과 한발 차이였다. 그는 옹주성 관내에서 손에 꼽는 고수인 셈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한 주(州)의 땅에 4품 무사가 서너 명은 나오곤 했다. 어쨌거나 몇백만 인구가 거기에 있으니 옹주에도 4품 고수가 있었다. 다만 조정에 자발적으로 투신하여 벼슬길에 올랐을 따름이었다.
강호에서 조직한 세력이 벼슬아치와 견줄 수 있겠는가?
검주처럼 무도가 왕성한 곳은 특수한 사례에 속했다. 아니면 검주가 대봉 강호의 무학(武學) 성지라는 말이 어찌 나오겠는가.
공손향양은 이제 막 첩을 떠나 여종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입고 세수하던 참이었다. 그는 올해 43세로 한창 젊고 기력이 왕성하였다.
올해 이미 첩실 세 명이 성공적으로 아들을 낳았으며, 침상 위에 이 여인은 새로 들인 첩이었다. 그녀는 나이가 겨우 18살로 그가 가장 신뢰하는 딸 공손수보다 두 살 어렸다.
공손향양은 올해 그녀를 임신시킬 계획이었다. 강호 세가는 도구가 아직 쓸만하기만 하면 가족을 위해 자손을 양성하는 중책을 잊으면 안 됐다.
무도의 길은 천부적인 자질을 극도로 요로 하기에 인구가 많아질수록 천재가 나타날 확률도 커졌다.
아이를 그저 단수로 낳는 가문은 결국에 쇠약해지는 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세수와 양치질을 마치지 않았는데 자신이 신뢰하는 딸이 허겁지겁 마당으로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딸은 마당에 서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급한 일이 있어요.”
공손향양은 딸이 어젯밤에 대오를 조직하여 무덤에 내려가 탐색한 일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즉시 여종에게서 수건을 낚아채 얼굴을 닦고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공손향양은 객지를 떠돌며 갖은 고생을 하는 딸을 쳐다보더니 깜짝 놀라 말했다.
“수, 너,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