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화. 남몰래 달콤한 사랑 (2)
소음궁 밖, 지팡이를 짚은 남자가 돌아서서 떠났다.
수백 명의 황궁 시위는 강적은 맞닥뜨린 듯 칼자루를 쥐고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주시했다. 감히 말을 내뱉는 자도, 막아서는 자도 없었다.
허칠안은 황궁을 나서지 않고 돌아서서 덕형원에 갔다.
* * *
이른 아침, 그는 덕형원에서 수행 궁녀의 시중을 받으며 세수하고 양치하였다. 한 궁녀는 침 그릇을 받쳤으며 한 궁녀는 구리 대야와 땀수건을 받쳤다.
회경은 양치를 다 하고 입을 헹군 뒤 물을 침 그릇에 뱉었다. 그러고는 다시 궁녀가 건넨 땀수건을 받아 도도하고 정교한 얼굴을 꼼꼼히 닦았다.
이때 한 궁녀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허 은라가 왔습니다.”
청결함을 좋아하는 회경공주는 즉시 땀수건을 내려놓더니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길을 안내해라……. 그를 내청으로 모셔라.”
그녀는 갑자기 또 생각을 바꿔 다시 땀수건을 들고 얼굴을 꼼꼼히 닦은 뒤 거울에 대고 둘러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는 궁녀를 데리고 규방을 나섰다.
그녀는 내청에서 창백한 얼굴의 허칠안을 보았다. 그는 탁자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뜬 채 매우 뜨거운 차를 음미했다.
덕형원의 궁녀는 전전긍긍하여 옆에 서 있었다.
“모두 내려가거라.”
회경은 손을 흔들었다.
궁녀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그녀는 몇 발짝 가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황제를 시해한 그 몹쓸 놈이 웃으며 말하는 걸 들었다.
“저 궁녀 괜찮네요. 마마께서 제게 상으로 주시지요.”
궁녀는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애처롭게 회경을 바라보았다.
회경은 무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궁녀가 물러난 뒤 회경은 허칠안을 자세히 살폈다.
“궁녀를 조롱할 한가로운 정신이 있다니. 상처가 깊지 않나보군.”
허칠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어디 부상의 경중으로 가늠할 수 있는 일인가요? 저는 이미 불구가 됐습니다.”
회경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감정도 방법이 없다던가?”
허칠안은 고개를 저었다.
회경은 입술을 오므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허칠안은 앞섶을 푸르고 그녀에게 가슴 상태를 보여주었다. 봉마정이 하나 박혀서, 심장 쪽의 상처는 아주 흉측했다.
3품 이하의 무사는 이런 상처를 입으면 죽는 길밖에 없었다.
4품 무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못이 총 9개입니다. 제 몸의 각기 다른 곳에 있지요.”
허칠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불문의 봉마정으로 감정이 말하길 만약 억지로 뽑으면 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죽을 거랍니다. 이 몸의 수련 경지도 쓸모없어졌지요.”
“불문…….”
회경은 이 두 글자를 읊조렸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이미 서리가 내린 듯했다.
도도하고 담담하기로 유명한 황장녀의 가슴속에 갑자기 강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불문이 왜 이 일에 개입하는 거지?”
회경은 감정을 추스르고 물었다.
허칠안은 이 말을 듣자 탄식하더니 말했다.
“마마와 솔직하게 만날 때가 됐군요.”
회경은 미간을 치켜올리더니 몸을 똑바로 펴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사실 상백 사건에서 탈출한 봉인물이 줄곧 제 몸속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불문의 반역자입니다.”
회경은 눈빛이 굳어지고 입을 살짝 벌렸다. 그녀는 믿기 어려운 듯했다.
그가 입을 열자마자 이렇게 정보량이 엄청난 비밀을 바로 내뱉다니. 회경은 머리가 웅웅 울렸다. 그녀는 충격적이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상백 아래의 봉인물이 왜 허칠안의 몸에 있는가?
요족은 갖은 방법으로 봉인을 해제하고 봉인물을 방출했다. 순순히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건 당치 않은 소리였다. 거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회경은 봉인물이 불문의 마승이라는 걸 들은 뒤 살짝 놀랐으나 재빨리 받아들였다.
이건 아주 합리적인 처사이기 때문이었다.
봉인물은 본래 불문과 관련이 있었다. 이건 애당초 상백 사건을 조사할 때 이미 확신한 일이었다.
“마승이 왜 제 몸속에 있는지에 관해서는 말하자면 깁니다.”
허칠안은 또 한숨을 쉬었다. 어떤 일들은 말하자면 저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자신의 몸에 기운이 달라붙었으며 신수가 몸속에 들어온 일부터 사람 구실 못 하는 생부가 감정의 대제자로 국운을 빼앗았다는 것까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생동감 있게 회경에게 말했다.
이미 허평봉과 패를 깐 이상, 자기 몸의 비밀은 사실 지킬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천지회의 모든 구성원이 황제 시해 사건을 겪었다. 철저하게 얽혀 진정한 동반자가 된 셈이었다.
회경의 표정은 근사했다. 그녀는 전 과정을 보면 경악에서 충격으로 충격에서 불신으로 표정의 변화에 따라 감정이 겹겹이 쌓였다.
하지만 회경은 허칠안이 진국검을 사용하여 영룡을 부릴 수 있었던 이유가 기운을 짊어졌기 때문이란 걸 들은 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마치 줄곧 걱정하던 일에 답을 얻은 듯했다.
게다가 답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그랬군!”
회경은 감개가 깊어 탄식하였다.
“이 모든 게 전부 하늘의 뜻을 다투어 쫓기 때문이라니…….”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께서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이 일이 새나가는 걸 감정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회경은 ‘응’하고 대답하였다. 허칠안은 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개자식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제 생모가 마마 가문 사람인가 봅니다.”
아연실색한 회경은 아름다운 얼굴이 다소 변했다.
“오백 년 전의 그 혈통입니다.”
‘오백 년 전의 그 혈통이라…….’
회경은 다시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밖으로 나가 한동안 돌아다니면서 대봉을 위해 흩어진 용맥의 령을 수집할 겁니다.”
허칠안은 설산의 각시서덜취처럼 도도하고 오만한 여인을 바라보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마, 몸조심하십시오.”
회경은 약간은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온유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 공자도 몸을 소중히 여기게.”
그녀는 더 이상 허칠안을 ‘대인’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임안 마마께서는 제가 황제를 시해한 일을 마음에 담아두신 듯합니다. 마마께서 저 대신 해명해 주실 수 있나요?”
회경은 ‘아’하고 소리 내고 말미를 끌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
“허 공자가 이미 소음궁에 다녀왔군. 역시 허 공자의 마음속에 임안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왔다, 왔어. 이제 분명히 내가 먼저 왔는데, 라고 말할 거지……?’
허칠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던 차에 갑자기 내청으로 다가오는 종종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와 회경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키며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내 한 궁녀가 들어오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마마, 임안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마마를 뵙고자 합니다.”
“저 좀 피하겠습니다.”
허칠안은 즉시 일어나 내청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다 숨자 회경이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라.”
“네!”
궁녀가 물러났다.
2~3분 후 붉은 치마를 입은 임안이 혼자 내청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자리에 앉았다. 초췌한 기색이 미간에는 풀기 어려운 울적함이 있었다.
그녀는 우선 회경을 쳐다본 뒤 시선을 옮겨 전방을 바라보면서 부드러우나 공허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 오라버니가 하는 말을 들으니 아바마마께서 무신교의 영향을 받아 대군의 군량미를 끊음으로써 위연과 팔만 대군이 동북에서 죽었다고 하더라.”
회경은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시며 잠자코 있었다.
“나는 위연이 그를 크나큰 은혜로 대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하지만 아바마마는 내 아바마마잖아. 그는 어떻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바마마를 죽일 수가 있지?”
임안은 비에 떨어지는 배꽃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가 너를 찾아갔지?”
회경이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임안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울면서 말했다.
“그가 방금 나를 찾아왔는데 만날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나는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지만 그를 보는 게 두려워. 설령 아바마마께서 위연을 죽였다고 해도 아바마마께서도 무신교에게 통제당한 거잖아. 아바마마께 무슨 잘못이 있나? 아바마마께서는 어릴 때부터 나를 예뻐했는데……. 나 어젯밤에 꿈속에서 아바마마를 만났어. 아주 비참하게 돌아가셨어, 아주 비참하게 돌아가셨다고. 회경, 나 마음이 너무 아파. 나, 나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어…….”
결국 그녀가 속 얘기를 할 수 있고, 마음속의 비통함과 울분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건 자신과 십여 년을 싸운 언니였다.
그녀는 너무 외로웠다.
회경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그를 좋아하지?”
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지금도 좋아하니?”
임안은 무너진 듯 탁자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회경은 이해했다. 임안은 여전히 그를 좋아했지만, 더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슴 아프게 잃은 존재는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슴속에 두고 몰래 한 달콤한 사랑도 잃었다.
“아이고!”
회경은 탄식하더니 말했다.
“네가 그를 미워해도 좋고, 좋아해도 좋고, 그를 다시 마주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부 네 일이야. 나는 네 감정에 관심 없어. 하지만 어떤 일, 어떤 진상은 너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진상?”
임안은 비단 손수건을 쥔 채 한편으로는 훌쩍훌쩍 울면서 한편으로는 눈물 자국을 닦았다. 그녀는 애처롭고 가련하게 회경을 쳐다보았다.
회경은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위 공이 죽은 뒤 허칠안이 황제를 시해하기로 마음먹었어. 이에 대해 그는 철저하게 계획했지. 이 일의 배후에는 심지어 계획하고 끌어들인 위 공과 감정이 있어. 허칠안이 폐하를 죽인 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한 게 아니라 여러 세력이 선동한 거야.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각측 세력이 선동하고 그중에는 위연과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라…….’
임안은 처량하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아바마마를 해하고 싶어 하고 모든 사람이 아바마마가 죽길 바랐구나. 나는 아바마마께서 20년 동안 도를 닦으면서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에 조정의 많은 이가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회경, 그는 우리 아바마마잖아. 아바마마는 나를 정말 예뻐하셨어. 모든 사람이 그가 죽길 바란다고 해도 나는 그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고. 아바마마를 죽인 사람이 허칠안인 건 더욱 원치 않고.”
그녀는 회경이 한 말이 그녀에게 부황이 틀렸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허칠안이 부황과 국공을 베어 죽인 일은 같은 성질이며, 그는 전부 백성을 위해 화근을 없앴다고 말이다.
하지만 혈육간의 정 앞에서 옳고 그름이 있는가?
부황은 여전히 그녀의 부황이었고, 허칠안은 여전히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다.
회경의 해명으로 임안은 근심 걱정을 털어버릴 수 없었다.
“어젯밤, 허칠안과 폐하께서 성 밖에서 교전하다가 성벽이 무너진 건 알지?”
회경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임안은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다 자세히 돌이켜 생각하니 태자 오라버니가 언급한 적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고작 한 마디 꺼냈을 뿐이었으며, 그녀는 당시에 극도로 무너진 감정에 휩싸여 이런 세부사항을 소홀히 했다.
회경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