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4화. 사후(事後) (1)
만요국 공주는 추격하는 대신, 아홉 개의 꼬리로 허칠안을 감싼 뒤 조위 앞에 떨어졌다.
그녀는 아홉 개의 꼬리를 펼치더니 허칠안 뒤에서 가볍고 부드럽게 흔들었다. 여우 꼬리 아홉 개가 차례대로 사라졌다.
“잠깐, 부향이 어디에 있소?”
허칠안은 허약한 상태로 힘겹게 버티며 물었다.
꼬리가 움직이더니 부드럽고 매혹적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조소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마당에 여인을 생각하다니. 정말 다정다감한 사람이군.”
‘역시나 성격이 그다지 좋지 않은 요녀군. 훈련이 부족해…….’
허칠안은 상대방의 조소를 알아들었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내 상대방의 여우 꼬리가 하나씩 사라지는 걸 보자 캐물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대하면, 나도 진심으로 대하오.”
이는 어장남의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나는 그녀를 웅성족(雄性族)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만요국 공주가 생긋생긋 웃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죽으려고 작정했나?’
순간 허칠안은 눈을 크게 떴다!
“널 놀린 거란다?”
만요국 공주가 이어서 한 말은 허칠안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부향은 이미 내 곁으로 돌아왔어. 교방사 기녀의 신분은 그녀에게 그저 한 번의 평범한 임무이자 그녀의 인생 여정 중 어느 대목에 불과해.”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맥없이 대답했다.
“그럼 안심하겠소.”
그는 부향이 요족 첩자이며 죽음은 그저 기회를 빌려 몸을 뺐을 뿐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럼에도 허칠안은 그녀가 지금 평안하다는 걸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는 이 물고기를 당분간 바다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추후에 기회를 봐서 다시 어장으로 도로 거둬들일 것이었다.
만요국 공주는 마지막 여우 꼬리가 사라지기 전에 빙그레 웃었다.
“참, 부향의 육신은 그해 내가 죽은 사람 더미에서 찾아낸 시체였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육신이 아직 쓸만했지. 그래서 회혼대법(回魂大法)을 사용하여 부향의 영혼을 그 속에 심어 넣은 거야. 그 몸은 비록 산사람과 다름없지만, 어쨌거나 시체이니 몇 년 쓰면 걷잡을 수 없이 쇠약해지고 썩어 문드러져. 부향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가장하여 벗어난 거야.”
허칠안의 표정이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쩍 굳었다.
* * *
“칠안, 칠안…….”
숙부는 옆에서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그는 여우 꼬리가 사라지는 걸 보자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조카의 상처를 살피러 달려들었다.
숙부의 나이 든 얼굴은 슬픔, 분노, 걱정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손을 놓치면 조카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마음에 조카의 손을 꽉 잡았다.
“어떻게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는 거냐. 3품은 불사의 몸이라고 칭하지 않더냐?”
숙부는 한 차례 살피더니 다급해졌다.
조카의 상처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두 번의 옥쇄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홉 개의 봉마정이 그의 피와 살을 찔러 복부의 상처에서 걸쭉하고 새빨간 피가 끊임없이 흘렀다.
게다가 일곱 개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니 그 모습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는 심한 부상 탓에 언제든지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네. 응급 처치가 시급해.”
조위는 탄식하더니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포하였다.
“지혈.”
흉측하고 무시무시한 상처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피가 서서히 멈추었으나 여전히 완치되지는 않았다.
조위가 보기에 허칠안이 지금 죽지 않은 건 바로 무사의 강한 생명력 덕택이었다.
그는 정덕과의 사투에서 생명력을 엄청나게 소모하였고, 부상이 가볍지 않았다. 더욱이 쌍방이 함께 화를 입은 두 군데 상처는 적 천을 죽이고 자신은 팔백을 잃은 뒤의 결과라 아주 무시무시했다.
그후 그는 봉마정에 박혀 기기와 기혈이 묶임으로써 3품 무사의 수련 경지를 조금도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유가에서 기록한 주살술을 이용하여 스스로 파멸하는 대가로 백의 술사 허평봉이 기운의 배반을 당하게 했다.
이는 대기운을 지닌 자를 죽인 데에 대한 배반이었다.
그는 적 천을 죽이고 자신은 팔백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거듭된 부상에도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무사의 강한 생명력 덕분이 아니겠는가.
“먼저 경성에 돌아가게.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감정뿐일세.”
조위는 먼 곳의 대규모 전투를 쳐다보았다. 그의 3품 수련 경지로도 1품 보살과 1품 천명의 교전을 엿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진법으로 겹겹이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은 보살의 뒷길을 끊고 보살을 죽이려 했다.
숙부는 조카를 끌어안고 암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모든 일이 전부 생각났다. 그는 그해 타고난 재주와 지혜로 앞에 나섰던 큰형이 떠올랐다.
그는 허씨 집안이 벼락 출세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만 그 모든 건 지나간 세월의 일이었다. 경성에서는 해마다 고관과 대부호가 실각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천기를 차단한 상황에서 20년 전 한때 휘황찬란했던 허씨 집안을 기억할 사람은 없었다.
* * *
깊은 밤, 어서방에 촛불이 밝게 비추니 대낮처럼 밝았다.
태자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 황제의 탁자 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비분강개하기도 탄식하기도 했으며 흥분하기도 감격스럽기도, 또 불안하기도 했다……. 태자는 인생에 고작 한 번뿐인 혼사를 마주하는 보통 사람 같았다.
태자는 자신이 순조롭게 등극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늘 밤을 봐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때 제공들은 아직도 편전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떡을 먹으며 공무 논의를 기다렸다.
황제가 참수되어 조당의 지도자가 사라졌다. 태자가 자연스레 나서서 대국을 주재하는 건 당연한 일이자 태자의 존재 의의였다.
국가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으면 안 됐으며, 더욱이 하루라도 황태자가 없으면 안 됐다.
황태자의 역할은 이 시기에 두드러졌다. 만약 대봉에 태자가 없으면 지금쯤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경성 각 계층은 대체로 잠잠한 편이었다. 가장 사납게 소동을 부린 이들은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황성 입구, 각 관아에 떼 지어 모여 허 은라를 만나겠다고 시끄럽게 굴었다.
시정 백성들은 허 은라가 암암리에 조정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살해당했다고 의심했다.
왕 재상은 태자에게 금군을 성안으로 배치하여 제압하는 동시에 경관에게 나서서 위로하라고 명령하였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니 비로소 발생 가능성이 있는 폭동을 저지하였다.
“전하, 재상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늙은 태감은 문턱을 넘어 아래쪽에 서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왕 재상은 비포를 입고 관모를 쓴 채 묵직한 발걸음으로 어서방에 들어섰다.
불안에 떠는 군신에 비해 왕 재상은 안색이 차분하고 기력이 아주 좋았다. 사람 전체가 환골탈태하고 지병을 싹쓸이한 듯했다.
“전하!”
왕 재상은 읍하였다.
“재상 대인,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습니까?”
태자는 왕 재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왕 재상이 장차 그가 제위에 오르는데 중요한 조력자이자 그가 장차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걸 알았다. 왕 재상과 ‘동맹을 맺기’만 하면 그는 단시간 내에 각 당을 제압하고 용의에 굳건히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왕당에는 태자당 구성원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왕 재상 자신이 어느 편에 서지 않는 건 이전에는 부황이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재상은 자연스레 줄을 설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왕 재상은 본래 태자당으로 적어도 자신에게 치우친 편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암암리에 그에게 빌붙는 왕당 구성원을 좌시할 리가 없었다.
왕 재상이 말했다.
“전하는 세 가지 일을 하셔야 합니다. 첫째, 민심을 안정시키고 둘째, 군심을 안정시키고 셋째, 조당을 안정시키는 겁니다.”
태자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고 미소를 지었다.
“재상 대인께서는 이 삼자를 어떻게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왕 재상은 진작에 구상을 마친 듯 조리 있게 천천히 말했다.
“전하, 허칠안이 선황을 경성 밖에서 죽인 사실은 모두가 다 압니다. 이 일은 숨길 수 없습니다. 억지로 감추면 민간에서 분노가 들끓을 것이고, 다시는 조정을 신임하지 않을 겁니다.”
현재 경성 사람들은 다시 허칠안을 떠올렸으며, 그가 그야말로 황제를 베어 죽인 고단자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태자는 탄식하였다. 이 말은 그의 생각과 같았다.
왕정문은 계속해서 말했다.
“선황의 모든 행적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천하에 공포하십시오. 대군의 군량미를 끊고 어진 신하를 모함하여 팔만 장병의 목숨이 무신교의 손에 스러졌다고요. 그런 뒤 태자께서는 아들 된 도리로 선황을 통렬하게 비난하셔야 합니다. 선황의 비석은 왕실 종묘에 자리해서는 안 되고 유골은 황릉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뒤이어 허칠안에게 포상을 내리고 본래 관직을 회복시키며 작위에 봉하여 천하에 명백히 알리십시오. 이로써 민심과 군심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비록 조당과 황실의 체면을 많이 깎아 먹고 위엄과 명망이 떨어질 테지만, 만천하의 백성과 식견 있는 자들이 갈채를 보낼 겁니다. 그들은 황조가 새로운 군주의 손에서 새로운 기상을 펼치길 기대할 것입니다.”
왕정문이 가리키는 선황은 원경제였다.
“이 일은 안 됩니다!”
태자는 아연실색하여서는, 속으로 ‘이게 나보고 사람 구실을 하지 말라는 건가’하고 말했다.
선황이 아무리 도리에 맞지 않는 짓을 했더라도 부자는 영원히 부자였다. 다른 사람은 선황을 욕할 수 있었지만, 그는 아들이었으므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됐다.
그는 설령 도리를 점했다고 해도 사람 구실 못한다는 오명을 입을 터였다.
이런 오명은 어쩌면 단기간 내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서에는 반드시 기록될 것이다.
아들이 설령 퇴위를 강요하고 황위를 찬탈하였다고 해도 아버지를 잘 모셔서 궁 안에 가두어야 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그 죄를 추궁하는 경우는 예부터 지금까지 사례를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똑똑한 자는 이렇게 과도하게 금기를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태자 전하께서 서둘러 명망을 쌓고 백성들의 추대를 받고 싶으시면, 백성들에게 새로운 황조에 대한 확신을 줘야 합니다. 이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입니다. 전하 같은 이런 명군이 제위에 오르고, 허칠안이 작위에 봉해져 주재해야만 대국이 안정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안 됩니다.”
태자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왕 재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번째 방안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무신교의 요술에 지배당해서 이렇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을 했고, 허 은라가 나서서 무신교의 음모를 저지했다고 가정합시다. 대봉과 무신교의 전역이 막 끝났고, 백성들은 팔만 장병이 동북에서 죽은 일로 분노하고 있으니 의심할 자는 없을 겁니다. 바로 이 기회를 빌려 일을 바꿈으로써 백성들의 분노를 무신교에게 돌리는 겁니다. 하지만 허칠안의 소행에 대해서는 여전히 표창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조정의 실을 만회하는 데 유리합니다. 오늘 백성들이 각 관아와 황성 문에 떼 지어 모였다는 게 가장 좋은 증명이지요.”
태자는 한참을 침묵하며 반박하지 않았다.
왕 재상은 이 모습을 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마지막으로 조당을 안정시키는 겁니다. 제공들이 염려하는 건 황제가 바뀌면 신하도 모두 바뀐다는 이 한 마디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더 많이 포섭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포섭하지요?”
태자가 물었다.
포섭은 구두 약속이 아니라 실질적인 이익을 줘야 했다. 그렇기에 한 무리를 포섭하려면 반드시 다른 한 무리를 억압해야 했다.
태자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누구를 제거할까요?”
왕 재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사대 우도어사 원웅과 병부시랑 진원도는 무신교와 결탁하여 폐하를 제어하고 대봉이 전복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구족을 멸해야 합니다. 다른 당파 사람들은 일률적으로 재산을 몰수하십시오. 하지만 태자께서 처음 제위에 오르시면 지난 일은 추궁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원웅과 진원도를 백성들 앞에서 참수하시고, 가산을 몰수한 뒤 가족 중 안식구는 교방사에 편입시키면 가족들은 죄를 면할 수 있습니다. 같은 당파 사람은 상황의 경중을 따져본 뒤 재산 몰수, 파면, 참수에 처하면 가족들은 연좌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처리하는 시간과 방식을 모두 제시하였다.
태자는 한참을 헤아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늙은 태감에게 분부했다.
“제공들에게 대전에 들어와 공무를 논할 것이라 통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