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화. 뭔 충신?
“바꿀 힘이 없다면 차라리 벼슬을 내려놓는 게 낫네.”
왕 재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저 위 공 때문에 여기서 끝이 아닐까 봐 두려우신 거죠.”
허칠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왕 재상은 약간 주저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속에는 다른 내막이 있네. 자네가 알 필요는 없어. 자네에게 좋을 일이 없거든. 이 몸은 이미 진이 다 빠져 조정에 오래 머물기를 원치 않네. 애석하게도 우리 조상께서 물려주신 강산을 잃게 생겼…….”
왕 재상은 결단력 있게 입을 다물었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는 건 당연히 위연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재 황제가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며, 감정은 싸늘한 눈으로 방관했다. 비록 그의 지위가 가장 높다고 해도 그저 일개 서생인데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기왕 이렇다면 조정에 있지 않으면 되었다.
다만 이런 비밀들을 허칠안 같은 일개 4품 무사가 알 필요는 없었다. 너무 많이 알아도 되먹힐 뿐이었다.
왕 재상은 실의에 잠겨 차를 받치고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셔 차디찬 마음을 녹였다.
“대인께서는 원경제가 식량을 끊도록 조종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허칠안은 상대를 떠보았다.
“콜록콜록…….”
왕 재상은 깜짝 놀라 순간 목이 메었고 격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이 차는 마음을 녹이지 않고 입만 데게 했다.
“자네도 아는가?”
재상 대인은 충격에 휩싸여 그를 살폈다.
“이번에 온 건 재상 대인께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입니다!”
허칠안은 망기술의 눈을 품은 채 그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 * *
황혼이 되어서야 허칠안은 임안과 왕부를 나섰다.
두 사람을 배웅한 뒤, 왕사모는 곧장 서재로 걸어갔다. 밝은 촛불 빛이 종이로 된 격자문 안에서 새어 나왔다.
똑똑!
그녀는 손을 들어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들어와라!”
왕정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사모가 문을 밀어젖히자 종이가 타는 냄새가 났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부친 왕정문이 원형 탁자에 앉아 허벅지에는 책 묶음, 그림 몇 폭, 묵보(墨寶) 몇 폭을 놓은 채 하나씩 발 옆의 화로 안으로 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뭘 태우고 계신 거예요?”
왕사모가 아름다운 걸음걸이로 천천히 다가갔다.
“무지했던 젊은 날에 쓴 것들을 태우고 있다.”
왕정문은 고개를 숙인 채 종이를 삼키는 불빛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서도 불빛이 날뛰는 듯했다.
“아버지, 제가 도울게요.”
왕사모는 그의 곁에 앉아 다짜고짜 묵보 한 폭을 집고 펼치더니 경악했다.
“이, 이건 아버지가 예전에 쓰신 시잖아요. 폐하께서 아버지께 시재가 뛰어나다고 칭찬도 하셨고요.”
왕정문은 시를 잘 썼다. 젊었을 때 시회에 자주 섞여 들어가다 보니 반평생이 지나자 아주 만족스러운 좋은 시가 몇 수 나왔다.
이는 충군에 관해 쓴 칠언율시로 매우 감동적이었다.
왕정문은 원경에게 칭찬을 받은 뒤 아주 득의양양하여 이를 벽에 걸어놓았다. 그녀가 시를 걸어놓은 지 30년 가까이 되었다.
“태우자꾸나.”
왕정문은 딸의 손에서 그 시를 뺏어 화로에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불길이 타오르더니 왕사모보다도 나이가 많은 이 묵보를 삼켜버렸다.
왕사모는 다급해하며 고개를 돌려 부친을 쳐다보더니 멍해졌다.
왕정문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왕사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클 때까지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기에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왕정문은 화로 안의 불길을 주시하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애비가 위연과 반평생을 다투면서 이길 때도 패할 때도 있었다. 그의 품성에 대해 아버지는 지적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솔직히 말하면 아주 탄복스럽다!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는 건 그가 천하를 다스리는 이념이었다. 너무 포악하고 너무 인정사정없었지. 관리 사회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 무리의 것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여야만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지. 그럼 어떻게 사람을 끌어들이는가? 만약 다른 사람이 네 말을 듣게끔 하려면 그들을 배부르게 먹여야 한다.
탐관오리는 상관없다. 일을 할 수 있으면 된다. 팔짱 끼고 말만 하는 관리야말로 나라를 망치고 백성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다.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권력에 영합할 줄 모르는 강직한 관리는 너무 적단다. 나라를 다스리는 건 이렇게 드물고 귀한 인재들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위연이 바로 이런 드물고 귀한 인재였다. 그는 작은 탐욕은 참을 수 있지만, 큰 탐욕은 참지 못했다. 그는 작은 죄악은 참을 수 있지만, 큰 죄악은 참지 못했다. 몇 년 전, 그가 하급 벼슬아치의 풍조를 바로잡으려고 했으나 내가 떠밀어버렸다. 이건 쓸데없는 소동 아니냐? 네가 밑에 있는 자들을 바로잡으려면 우선 위에 있는 자들을 깨끗하게 숙청해야 하지 않느냐. 하지만 위에 있는 자들은 깨끗하게 숙청할 수 없단다. 사모, 왜인지 아느냐?”
왕사모가 입을 오므렸다가 상대를 떠보았다.
“폐하?”
왕정문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고개를 젓지도 않고 탄식하였다.
“지금 위연이 전사하였다. 반평생을 대봉에게 헌신한 사람인데 폐하께서는 사후 명성조차 주길 원치 않으시는구나. 좀 야박하지. 하지만 아버지가 오늘 이것들을 태우는 건 그가 야박해서가 아니다. 최고는 무자비한 제왕 집안이다. 그 자리에 앉으면 아무리 잔인해도 문제가 없거든. 위연 같은 사람은 사서에 적지 않단다.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는 더 많을 테지. 이 애비가 마음 아픈 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란다. 팔만여 장병이 대봉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팔만여 집의 고아와 과부를 남겼다. 이 전쟁이 패전으로 그 성질이 규정된다면 무휼금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왕정문은 오른손을 뻗어 일 년 내내 붓을 쥐어 생긴 두툼한 굳은살을 주시하였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곤했다.
“수 십 년 동안 붓을 잡았더니 칼 한 자루조차 쥘 수 없구나. 그가 선조의 600년 가업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걸 무능하게 참고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평상시에는 그럴듯했는데 손에 병권이 없고 모든 권력은 황제가 준 것이니 언제든지 도로 가져갈 수 있지. 전혀 쓸모없는 서생이구나, 전혀 쓸모없는 서생이야. 아버지는 평생 경전을 읽었고, 전편 모두 충군, 충군, 충군이었다. 아버지가 정 아성에게 군주에게 뭘 충성하냐고 물었단다.”
그는 갑자기 일어나서 한 발로 화로를 차서 날려버렸다. 별안간 불똥이 튀었다.
“충군은 무슨 충군인가!”
* * *
묘시, 날이 훤하게 밝아 왔다. 원경제는 노란색 용포를 입었으며 머리에는 진주가 늘어진 황관을 썼다. 기세가 삼엄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서서 구름 속으로 높이 솟은 관성루를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는 돌아서서 침전으로 돌아갔고 늙은 태감이 마침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원경제의 위엄 있으면서도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라올 필요 없다.”
늙은 태감은 바로 걸음을 멈추고 밖에 섰다.
원경제는 침전에 들어온 후 고개를 숙인 채 밝게 빛나는 마루 위를 걸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무언가를 측량하는 듯했다.
그는 십여 걸음 뒤, 멈추었다. 원경제는 손가락으로 손목을 그었고 피가 흘렀다.
피가 땅 위를 저절로 돌아다니며 일그러지고 기괴한 진문을 형성했다.
원경제는 진법을 형성한 뒤 품에서 주먹 크기만 한 투명한 구슬을 한 알 꺼냈다. 구슬 안에 든 눈알 하나가 원경제를 그윽하면서도 차갑게 주시했다.
이는 무신교의 지보로 무신이 봉인된 눈 한쪽이었다. 무신의 한 가닥 힘을 간직했다.
원경제가 구슬을 놓자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반투명한 기운을 쏟아내었다.
이 기운들은 떨어지자마자 원경제의 피로 합해진 진법을 선홍색으로 물들였다.
원경제는 어렴풋이 지하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용의 소리를 들었다. 진법 중심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천천히 금색의 용머리를 내밀었다.
구슬 안, 그 눈알이 문득 더 그윽해졌다. 마치 소용돌이가 된 듯 거대한 흡입력을 보였다.
금룡(金龍)은 끊임없이 머리를 흔들며 그 흡입력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특별한 인재만 들을 수 있는 처량한 울음소리를 냈다.
“기운이 흩어져 용맥이 안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아직 좀 부족하니 다시 좀 흔들어야 한다. 위연의 일을 결론 내린 뒤에 즉시 천하에 알리고 경성에 알릴 것이다. 삼백만이 넘는 경성 사람들의 경멸과 원망, 또 전쟁의 패배로 인한 두려움은 구슬이 용맥의 혼을 뽑아내기에 충분하다. 위연, 네게 무슨 악시를 붙여줘야 좋을까?”
원경제는 입을 삐죽이더니 벌떡 돌아서서 침전 밖으로 걸어갔다.
* * *
묘시, 날 밝기 전에 밤새 숙직한 송정풍과 주광효는 허리를 쫙 펴고 짝을 지어 관아 대문으로 걸어갔다.
묘시에는 동라와 은라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오는 길에 송정풍을 보는 눈빛들이 이상했다.
다들 어제 그가 가랑이 밑의 굴욕을 참아내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어쨌거나 송정풍은 연신경으로 천부적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줏대가 없어서 이런 사람은 수련 경지가 아무리 높아도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예전에는 다들 그가 건들건들 빈둥거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점잖지 못하다는 생각만 했다. 지금 보니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전혀 아니었다.
송정풍은 주변 동료의 시선을 눈치채자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즉시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건들건들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주광효의 눈빛에는 슬픔이 감춰진 상태였다.
본래 그도 가랑이 밑의 치욕을 한 차례 견뎌냈어야 했다. 송정풍이 일부러 실없는 장난을 치며 체면을 바닥에 내던졌기에 그는 주성주의 괴롭힘을 피했다.
주광효는 자신의 성격을 알았다. 그는 죽어도 가랑이 밑의 치욕은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연말에 혼사를 치르고 독립할 예정이었다. 미래의 아름다운 인생이 그를 기다리는 만큼, 송정풍은 형제의 아름다운 인생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엄을 찢어버리고 바닥에 내버려 호되게 밟혔다.
주광효는 일부러 여유로운 모습을 한 송정풍을 보던 중 다시 허칠안이 떠올랐다. 그는 거리낌 없이 떠났고, 위 공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경성에 전달된 뒤에는 종적을 감추었다.
허부에는 사람이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장차 이름을 감추거나 강호를 떠돌겠지.
“만약 허칠안이 여기 있으면 자네가 모욕당하는 걸 보고 있을 리가 없네.”
주광효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런 뒤 나와 함께 죽는 건가?”
송정풍은 눈을 희번덕이더니 불쾌해했다.
“위 공께서 돌아가셨으니 경성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네. 잘 갔어. 그가 가지 않았어도 내가 그를 쫓아냈을 걸세. 가지 않으면 형제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주광효는 입을 벌리고 웃었다.
“하긴.”
송정풍이 갑자기 ‘퉤’하고 소리를 내더니 욕을 퍼부었다.
“주소를 남길 줄도 모르고 말이야. 휴, 이번 생에 다시 만날 날이 있기를 바랄 뿐이지.”
그들은 막 입구로 걸어갔다가 맞은편에서 허리에 패도를 차고 은라 차복을 입은 주성주와 맞닥뜨렸다.
송정풍과 주광효는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질주했다.
“멈춰라!”
주성주가 부르더니, 몸을 반쯤 돌린 채 두 사람을 흘겨보며 물었다.
“관아가 묘시를 알리는데 자네 둘은 어디로 가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