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화. 사전 준비 (2)
낙옥형은 대답하지 않고 차가우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은 제왕에게 손을 대지 않을 걸세. 이는 술사와 왕조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지. 제왕을 죽이는 대가는 감정이 감내할 수 없어. 그게 아니면 역대 제왕이 감정을 이렇게 신뢰했을 리가 없지. 하지만 3품 이후의 고수는 어떤 체계든 인간 세상 제왕에게 손을 대길 원치 않네. 대기운을 지닌 사람을 죽여 없애면 마찬가지로 기운의 배반을 받기 때문이지. 내가 상당히 핵심적인 시기에 이르면 이 배반을 견딜 수 없네. 자네…… 자네 바지는 뭐하러 벗는 거지?!”
낙옥형은 버들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 자식이 뜻밖에도 외투를 벗고 그녀의 앞에서 허리띠를 풀었다.
“국사께서 줄곧 저와 쌍수하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극한직업입니다.”
허칠안은 아주 진지한 태도였다.
그런 뒤 그는 인종 도사이자 대봉 국사이자 더없이 아름다운 절세미인의 얼굴이 구겨지는 광경을 보았다.
낙옥형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다 알았는가…….”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련 도사가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금련이 백성이든 이리든 우선은 한 방 먹였다.
낙옥형은 버들 눈썹을 치켜올리고 시선은 옆을 향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
“큼, 그런 계획이 있기는 하지만…… 굳이 자네이지 않아도 되네. 도려 일이 어찌 애들 장난이겠는가.”
그녀는 표정도 어조도 냉담했지만, 그다지 똑 부러지지 않는 어휘로 그를 팔아먹었다.
‘국사는 아주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여자구나. 애들 장난이면 안 된다니. 음, 나도 당연히 목욕하고 밟아야 할 절차는 놓치지 않을 거라고…….’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더니 허리띠를 푸는 행위를 멈추고 웃었다.
“황제를 시해한 뒤에 저는 국사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그저 낙옥형과 솔직하게 대면하기 위함이었다. 네가 내 몸을 탐하니 나는 너에게 나서서 도움을 달라고 부탁하는 의미였다. 물론 나 역시 네 몸을 좀 탐하기는 하지만…… 이는 이익 교환에 더 가까웠다.
허나 낙옥형에 대한 허칠안의 소감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고 감정을 키워도 개의치 않았다.
옛말에 오래 보면 정이 든다고 하지 않던가!
낙옥형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동시에 보기 드물게 민망해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내일 알아서 나설 테니 꺼지게!”
허칠안은 허리를 굽혀 읍하고 정실에서 물러났다.
그가 마당을 나오니 임안이 맞이하며 재잘재잘 물었다.
“너 국사와 무슨 얘기했어?”
허칠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국사에게 쌍수하자고 요청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거절했습니다.”
임안은 눈을 희번덕였다.
허칠안은 또 말했다.
“그녀는 도려가 애들 장난이 아니라더군요. 제가 그녀를 떠받들어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임안은 암탉처럼 ‘껄껄거리며’ 애교 있게 웃었다.
“아직 영보관을 나서지 않았으니 국사가 듣고 책망할 수 있어. 조심하라고.”
허칠안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앞으로는 웃지 못할 거예요.’
“이제 저를 데리고 왕부에 가시죠.”
그가 말했다.
* * *
왕정문은 집에 돌아온 뒤 가족들에게 짐을 챙기라고 말한 다음, 항상 입는 옷가지부터 시작해 골동품과 가구와 서화까지 몽땅 상자에 넣었다.
가족들은 망연하기 그지없었으나 속으로는 큰일이 생겼다는 걸 짐작했다.
왕 이공자가 용기를 내어 몇 차례 물었으나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더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가장 총애하는 여동생에게 정보를 알아내러 가라고 종용하였다.
왕사모는 최근 조당 정세와 부친이 최선을 다해 위연의 명성을 쟁취하고자 했던 일을 통해 속으로 판단을 내렸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 부친이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둘째, 폐하께서 부친에게 관직을 내려놓으라고 할 작정이다.
이 저택은 황실 하사품으로 황성에 위치했다. 변함없이 세습하는 훈귀와는 다르게 문관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하사받은 저택은 조정이 도로 거두어 갔다.
훈귀처럼 노부(老夫)가 죽은 뒤 작위를 적자가 이어받으면 하사받은 저택이 줄곧 계승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치대로라면 이러면 안 되는데. 부친과 위연의 관계라면 설령 영웅이 서로 애석하게 여긴다고 해도 어쨌거나 정적이잖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왕사모는 양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큰소리로 책망하였다.
“둘째 오라버니, 짜증 나거든? 옆에 가 있어.”
왕 이공자는 갑자기 화를 누그러뜨리고 입을 삐죽이더니 옷소매를 뿌리치고 갔다.
바로 이때, 하인이 와서 보고하였다.
“아가씨, 임안 공주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왕사모는 다소 의외라고 생각하여 즉시 일어나 문을 나서서 맞이하였다. 임안과는 반쯤 절친한 친구인 셈이라 둘은 자주 왕래하였다.
응접실에 가니 붉은 치마의 이공주가 보였다. 그녀는 달걀형 얼굴과 도화안은 예전과 다름없이 매혹적이었다.
“마마!”
왕사모는 몸을 약간 숙이고 예를 갖춘 뒤 임안의 감정을 관찰하였다. 말하자면 그녀가 임안과 좋은 벗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회경 공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임안 공주는 못된 짓을 좋아하며 여우처럼 굴었지만, 애교와 원경제의 환심을 살 줄 아는 걸 제외하면 그리 대단한 수법이 없었다.
임안은 왕사모를 안 후에 어리숙한 책사를 얻었다 생각했는지, 그녀에게 자주 방법을 제안해달라고 요청하여 회경을 곤란하게 했다.
비록 임안은 대부분 왕사모의 방법 때문에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돌아온 꼴이 되었지만, 이따금 회경에게 적잖은 살상력을 안길 수 있었다.
“사모!”
임안은 방긋 웃으며 인사하더니 물었다.
“본 공주가 왕 재상을 만나고자 해.”
그녀는 말을 하면서 역용으로 변장한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왕사모는 섬세하게 관찰하던 중 즉시 이 세세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이고 허칠안을 한 차례 자세히 살폈다.
그는 외모와 기질이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임안 마마 곁에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은, 분명히 신분이 단순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때 그녀는 평범한 외모의 이 남자가 웃으며 하는 말을 들었다.
“아이고, 제수씨.”
“허, 허 은라?”
왕사모는 눈을 부릅떴고,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방금은 확실히 신년의 큰형, 허칠안의 목소리였다.
임안은 곁눈질로 개자식을 쳐다보더니 의아해했다.
“제수씨?”
‘왕사모는 신년의 여친이거든…….’
허칠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모 소저는 신년과 서로 감정이 통하거든요.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이루는 건 조만간의 일입니다.”
왕사모는 ‘쳇’ 하더니 부끄러워 화를 냈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해하기도 했다. 그녀는 허 은라의 말을 통해 허씨 집안이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부친은 지금껏 그녀와 허신년의 교제를 명확하게 저지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묵인하는 태도를 유지해 왔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날 그녀가 허부에서 돌아왔을 때 부친 역시 상황을 특별히 묻지는 않았을 터였다.
‘엇, 이거 겹사돈 아니야? 사모는 내 친구니까.’
임안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도화안이 초승달처럼 구부러졌다.
허칠안은 바로 주제로 넘어갔다.
“사모 소저, 저 왕 재상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참, 방금 들어올 때 하인이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걸 봤는데 무슨 일입니까?”
왕사모는 약간 망설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버지께서 아마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하시나 봅니다!”
‘관직에서 물러난다니?’
허칠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경제는 위 공이 죽은 뒤, 조당을 숙청하여 당파 간의 세력에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그는 왕 재상을 쫓아내려 할 터였다.
하지만 요 며칠간 원경제는 위 공의 체면을 깎으면서 이 전역을 평가하려고 노력해왔기에 왕 재상을 처리할 시간이 없었을 터였다.
이때 관직을 내려놓으면 너무 이르지 않은가?
아니면 왕 재상은 벼슬길이 곧 다할 것을 자각한 건가? 차라리 미리 관직을 내려놓으면 좋은 끝을 맺을 수 있을 테니까?
“허 은라는요? 제 부친은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왕사모는 부드러운 눈망울로 그를 주시했다.
“은라라고 부르면 남처럼 들리니 큰 오라버니라고 부르세요.”
허칠안이 화제를 돌렸다.
왕사모는 이런 단정치 못한 남자를 어찌할 도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제가 여러분을 데리고 갈게요.”
그녀는 청하는 손짓을 했다.
허칠안과 임안은 그녀 뒤를 따라 복도를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왕부 깊은 곳까지 걸어갔다.
왕사모는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연분홍색의 배자(褙子)와 주름진 긴 치마를 입었다. 걸을 때 치맛자락과 배자가 흔들려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답게 휘날렸다.
허칠안이 잠시 살펴보니 제수씨는 몸매가 늘씬하고 비율이 아주 좋았다. 그녀는 자태 역시 훌륭한데 재상 소저라는 신분까지 더해졌다. 외모가 출중하고 지혜로운 그녀는 허신년과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었다.
그녀에 관해 유일하게 좋지 않은 점은 총명하고 개성이 강하며 신분이 고귀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여인은 통상적으로 소유욕이 아주 강했다.
신년이 앞으로 첩을 들이는 일은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좋은 남자라면 무릇 평생 한 여자와 한 쌍이어야 했다.
허칠안은 이 이치에 아주 공감하면서 자신이 바로 그런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곧 왕 재상의 서재에 이를 참이었는데 허칠안이 갑자기 말했다.
“저 변소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변소에 들어가 망기술 종이 한 장을 꺼내 전부 태웠다. 청광 두 줄기가 그의 눈에서 발사되더니 이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임안과 왕사모는 자취를 감추었고 하인 한 명만이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은 허칠안이 돌아오는 걸 보자 맞이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제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와 마마는 규방에서 놀 터이니 알아서 들어가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이미 나리께 통지하셨답니다.”
‘정이 좋구먼, 아주 좋아. 아이디어를 내는 제수씨 왕사모가 있으면 임안이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 앞에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서재 안에서 왕정문의 따뜻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칠안은 가볍게 문을 밀어젖혔다. 채광이 아주 좋은 서재 안은 널찍하고 품위가 있었다. 왕 재상이 국화 배나무로 만든 큰 탁자 뒤에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두 눈이 혼탁하고 피로했으며, 표정은 엄숙하면서도 진지하였다……. 갖가지 세부 사항이 이 노인의 상태가 아주 나쁘다는 걸 암시했다.
“사모 소저의 말을 들으니 재상 대인께서 관직을 내려놓으려 하신다고요?”
허칠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 애를 속이지 못할 줄 알았네!”
왕재상은 어쩔 수 없이 웃더니 말했다.
“내일 조회에서 나는 사직을 청할 것이네. 규칙에 따라 그는 상징적으로 몇 차례 만류한 뒤에 내가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는 걸 허가할 게야.”
“재상께서는 관직을 내려놓고 싶으신 겁니까?”
허칠안은 그를 주시했다.
왕 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망기술이 준 피드백은 참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재상 대인이 어려운 국면에 결단을 내려 용감하게 물러나는 거구나…….’
허칠안은 그래도 다시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그는 숙부를 만나고 난 뒤 대유 장진을 찾아가 망기술 종이를 얻어왔을 뿐, 다른 법술은 달라고 하지 않았다. 4품 및 4품 이하의 법술은 도문 2품에게 효과가 없었다.
도문 4품 금단이 만법(萬法) 불침(不侵)인데 하물며 2품은 어떠하겠는가.
원장 조위에게 그 유가 법술 서적은 그의 유일한 저장물로 허칠안이 진작에 소모하였기에 다른 걸 내어줄 수는 없었다.
굳이 기록해야 한다면 유가 체계의 법술을 기록할 수 있었다. 다만 3품 대유의 언출법수는 허칠안이 감히 쓰지 못했다. 그가 쓴다고 2품 정덕을 죽일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분명히 숨이 넘어갈 것이었다.
그는 두 차례 생사의 갈림길에서 여행한 뒤, 유가의 허세 법술에 약간 심리적인 트라우마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