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화. 지도자
“황위에 오를 수만 있다면, 이 정도 희생이 뭐 별거겠니?”
진비는 우렁차게 말했다.
그녀는 마치 태자를 교육하면서 자신을 위로하는 듯했다.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개탄하였다.
“위연이 죽은 건 좀 애석합니다. 이 자는 대국적인 관점에 아주 강하지요. 본 태자는 장차 제위에 오른 뒤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본 태자를 위해 충성을 다하지는 않을까 희망을 품기도 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오직 혈육으로 연결된 세 사람만이 있었기에 태자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네 가장 큰 결점이 바로 기상천외함을 좋아하고, 불가능한 일을 기대하는 걸 즐긴다는 점이야.”
진비는 한 마디 훈계하더니 요염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점심 식사는 경수궁에서 먹으면서 모비와 함께 술 한잔하자꾸나. 위연이 죽어 내 마음의 병이 드디어 가셔 온몸이 가뿐하거든.”
태자 역시 웃기 시작하였다.
“좋습니다. 오늘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진탕 마시지요.”
임안은 소리 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과 혈육 관계인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갑자기 강렬한 슬픔이 솟구치는 듯했다.
이런 슬픔은 고독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이 하는 말, 그들이 하는 일, 그들이 기뻐하는 일, 분노하는 일……. 그녀는 예전처럼 그들을 인정하고 공감하기가 더는 어려웠다.
어느새 자신은 그들과 이미 멀어졌다.
* * *
조회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장이 종이가 은밀한 경로를 통해 겹겹이 전달되어 마지막에는 덕형원 시위장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는 종이를 펼쳐서 보더니 이내 안색이 크게 변하여 회경의 침실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갔다.
이때 회경은 이미 일어나 바깥방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중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달려와 문밖에 멈춘 시위장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시위장은 대답 대신 문턱을 넘어 전전긍긍하며 종이를 건넸다.
회경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의구심을 가지고 종이를 받아 읽었다.
그녀의 청아하고 수려한 얼굴이 조금씩 창백해지기 시작하더니 입술조차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이렇게 한참을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 떠오른 듯 실성하여 소리쳤다.
“어마마마!!”
회경은 재빨리 일어나 침실을 뛰쳐나와 서재에 이르렀고, 사서 한 권에서 서신 한 통을 꺼냈다.
그녀는 서신을 소매 속에 넣고 치맛자락을 들고 다시 서재를 뛰쳐나왔다.
서신은 위연이 출정하기 전에 그녀에게 준 것으로, 당시에 전하는 말도 있었다.
“이 서신을 적절한 시기에 공주마마께서 어마마마께 전해드리길 바랍니다.”
회경은 언제가 적절한 시기인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해하였다.
그녀는 봉서궁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궁녀 둘이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쫓아갔다.
* * *
봉서궁 안, 황후는 탁자 앞에 앉아 조향했다. 그녀는 금색 명주에 봉황이 그려진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봉관(鳳冠)을 썼다. 사람을 끄는 아리따움에 귀티까지 엿보였다.
그녀는 후궁에 틀어박혀 사는 절세미인이었다. 시간조차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차마 망가뜨리지 못하는 듯했다.
<경성 전체에서 황후가 젊을 때 나보다 한 수 아래였던 걸 제외하고, 다른 여인은 전부 나보다 열 수, 백 수 부족하구나> - 모남치 어록
이게 그녀에 대한 가장 높은 평가였다.
왜냐하면, 왕비의 눈에 세상의 여인은 두 종류뿐이었다. 하나는 모남치, 다른 하나는 세상의 여인.
이런 자기성애자가 인정할 수 있는 미모라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찌 나에게 안부를 물으러 올 생각을 다 했느냐?”
황후는 딸이 오는 걸 보자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우아하고 단정하며 화려했다. 딸이 왔다고 해서 지나친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황후는 여전히 그 황후였다. 여전히 부드럽고 단정하였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황후는 다가가기 쉬우며 성격도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황후의 성격이 부드럽고 허세가 없다고 제멋대로 과장하여 말한 허칠안과 같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회경이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무관심이었다.
회경의 기억 속에 어마마마는 늘 단정하면서도 냉담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한 상대였다. 어마마마는 딸인 그녀조차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딱딱한 사람이었다.
“위 공께서 무신교 총단에서 전사하셨습니다.”
회경은 간결하게 요점만 말했다.
그런 뒤 그녀는 우아하고 단정하면서 황후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여인이 처음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거짓말!”
그녀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회경을 딸이 아니라 원수처럼 보았다.
회경은 모친을 응시했다. 가을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에 처량함이 스쳤다.
허칠안이 짐작할 수 있는 점은 그녀도 당연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복비 사건이 이미 많은 점을 설명하였다.
그녀는 서신 봉투를 탁자 위에 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위연이 출정하기 전에 저더러 어마마마께 전하라고 한 서신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친 뒤 돌아서서 떠났다.
그녀는 문턱을 넘어 방을 나선 다음 바로 떠나지 않고 정원에서 잠시 기다렸다. 안에서 황후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가슴이 미어져 슬픔에 피눈물을 흘렸다.
회경은 고개를 들어 스산한 가을날, 흰 구름 사이로 온화하고 의젓한 남자를 보았다.
‘위 공, 위 공과 그녀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겁니까…….’
* * *
허씨 집안, 다시 한번 운록서원에 그들은 돌아왔다. 온 집안이 피난을 왔다.
허영음은 숙모에게 이끌려 원치 않게 등산을 하였다. 그녀는 옅은 눈썹을 찌푸리며 큰소리로 질문하였다.
“어머니, 또 저를 공부시키려고 이곳으로 보내시려는 거예요?”
숙모는 언짢아했다.
“아니, 나는 이미 너를 포기했단다.”
허영음은 힘껏 뛰어오르더니 싱글벙글 웃었다.
“어머니는 저한테 최고예요.”
‘내가 어찌 이렇게 못난 딸을 낳았을까…….’
숙모는 하마터면 그녀 때문에 화가 나서 울 뻔했다.
그들은 서원에 도착해 전에 두 번 머물렀던 소원으로 익숙한 발걸음을 옮겼다.
허칠안과 이묘진은 사람들을 안배한 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당을 나섰다. 원장 조위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위연이 출정하기 전에 내게 두 가지 물건을 보관해달라고 부탁하였네. 적절한 시기에 자네에게 전해주라고 했어.”
조위는 품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허칠안에게 건넸다.
“이건 그가 자네에게 남긴 서신이네.”
그는 다른 물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허칠안 역시 묻지 않고 서신을 받아 품 안에 넣은 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 *
상부 변방, 옥양관(玉陽關)에서 설구의 처량한 비명이 하늘가에 메아리쳤다. 설구는 아주 요원한 하늘에서 빙빙 선회했다.
성벽 위, 병사들은 머리를 축 늘어뜨렸다. 백부장 한 명이 ‘퉤’하고 가래를 뱉더니 욕을 퍼부었다.
“염국의 잡종이 또 거들먹거리러 왔군.”
목표는 너무 높고도 먼 곳에 있어 활의 사정거리를 넘어섰다. 비수 척후병은 경험이 풍부하여 대봉 고품 무사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설구는 이상이 생기자마자 즉시 멀리 날아갔다.
설령 4품 고수라고 해도 이런 특출난 속도로 기이한 짐승을 쫓아가기란 불가능했다.
백부장은 돌아서서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바라보며 부아가 치밀어 욕했다.
“빌어먹을. 지금 너희 모습을 보니 마치 마누라가 외간 남자랑 붙어먹은 폐물 같구나. 너희의 기세를 꺼내 보여라. 위 공께서 형제들을 데리고 정산성을 함락시켰다. 정산성은 무신교의 총단이다. 우리 대봉은 둘째 치고, 설령 대주라고 해도 이건 처음으로 사서에 기록될 일이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느냐! 너희 같은 저속한 놈들이!”
백부장은 흥분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위 공께서는 전사하셨습니다…….”
곁에 있던 병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부장은 순간 얼굴이 일그러져 오랜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과연 그들이 전쟁에서 이긴 것인가?
군대를 따라 출정한 병사들의 눈에는 이긴 듯 보였다. 그들은 염국 중심부를 꿰뚫고, 무신교 총단을 함락시켰다. 이런 승리는 팔만이 넘는 인명은 둘째 치고 십만, 이십만이라고 해도 수지가 맞았다.
무신교에서 이번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보통 사람에 병사를 더하면 그 숫자가 이미 백만에 이르렀다.
하늘만큼 대단한 승리였다.
하지만 위연의 죽음은 대봉 병사에게 큰 타격이었다.
바로 사기를 저하시킬 정도의 타격이었다.
잔존 병력 일만 육천은 무신교 판도에서 철수하여 돌아온 뒤, 옥양관에서 주둔하며 조정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 사이, 대봉과 염국의 척후병은 줄곧 서로를 감시하고 있었다. 각자 소식을 전하며 긴장되면서도 적극적으로 서로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갑자기 설구의 처량한 비명이 적막을 깼다. 척후병이 설구와 함께 여러갈래로 갈기갈기 찢겼다.
선혈이 쏟아졌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바라보았다. 검은 형체가 설구와 척후병을 죽이고 성벽 위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뒤이어 장포의 여인이 소리 높여 하는 말이 들렸다.
“나는 천종의 성녀, 이묘진이다!”
백부장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했다.
“천종 성녀다. 비연 여협객이야.”
“비연 여협객이 누구인가?”
“비연 여협객조차도 모르다니. 그녀가 천종의 성녀네.”
“검을 부려 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구먼.”
“어찌 대단할 뿐이겠는가. 비연 여협객은 무적이네.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감히 악을 행하는 자가 없지.”
“정말인가?”
“모두가 그렇게 얘기하더군…….”
병사들은 깜짝 놀라 기뻐하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하층민은 품계에 대한 개념이 깊지 않거나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3품 고수는 명성이 대단한 협객만 못했다.
미래에서라면 전문적인 용어로 ‘국민적 인지도’라고 할 터였다.
만약 허칠안이라면 그들은 자기편이 이미 천하무적이라고 여길 터였다. 허 은라는 백성들을 위해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길거리에서 국공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오줌을 지렸고, 황제조차 그에게 압박받아 죄기소를 썼더랬다.
이묘진이 비검에서 내려와 성벽 위 상공에 안정적으로 멈추었다. 그녀는 허칠안을 따라 함께 내려왔다.
‘이분이 바로 전설 속의 비연 여협객? 뜻밖에도 이렇게 꽃처럼 아름다운 미녀였다니…….’
병사들의 시선이 두 젊은 남녀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그 둘을 살폈다.
그런 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천종 성녀 뒤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목구비가 준수하고 정교하며, 옥처럼 풍채가 좋았다. 그의 외모는 몹시 준수했다.
그의 무표정한 미간 사이에는 지울 수 없는 슬픔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다소 익숙하고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주었지만, 도대체 누구인지는 떠오지는 않았다.
이때 백부장이 몸서리를 치면서 거친 얼굴을 갑자기 붉혔다. 그가 몸을 떨면서 말했다.
“허, 허 은라…….”
허칠안은 백부장을 바라보면서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 *
성 아래 병영 안. 일만여 명의 장병들은 갑자기 성병 위에서 강렬한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걸 들었다. 아주 떠들썩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막사를 뛰쳐나갔다. 누군가는 말고삐를 잡아당겼으며 누군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잇따라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무수한 환호성을 들었고, 그 환호성은 하나의 목소리로 응집되었다. 허 은라!
‘지도자가 없는 오합지졸’인 대봉 장병들에게 허 은라라는 세 글자는 강심제 주사이자 기둥이자 등불이었다.
자고로 지도자는 모두 명망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