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화. 국사의 무쌍함 (2)
“신령, 아주 위엄 있군…….”
위연은 중얼거렸다. 먼지로 가득 덮인 옛일이 기억의 봉쇄를 돌파하였다.
40년 전, 정덕제가 아직 재위할 때 동북 3주에서 처참한 전쟁이 한 차례 일어났다.
무신이 대봉을 멸하고 기운을 빼앗으라는 신의 지시를 내렸다. 당시에 동북 세 나라는 20만 병력을 소집하여 상주, 형주, 예주 세 개 주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3일간 대량으로 학살하여 노인, 부녀자, 아이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대봉 백성 모두가 천한 지푸라기처럼 도살당했다.
백 리에 사람의 모습이 없고, 백골이 산과 들에 묻혔다.
요족 및 오랑캐보다 더 잔인하고 난폭하였다.
지금까지도 그 전역은 여전히 그해 전란을 겪은 노인들의 마음속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전역 이후 10년 동안, 조정에서는 세 개 주에 10만 병력을 배치하였다. 백성들은 유민이 되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진정으로 무신교에게 겁을 먹은 상태였다.
이후 조정에서 황책(黃冊)을 다시 만들었다. 그때 조정은 상주, 형주, 예주 만 리 강산의 집들이 텅 비었으며 그 전란으로 죽은 백성이 백만으로 집계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위연의 본적은 예주였다.
위씨 집안에서는 한 소년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지나간 옛일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제 더 이상 그해 청삼 소년이 아니었다. 위연은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
“40년을 회상하니 나라를 침략당하고 집안을 망하게 한 원수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지금 나는 알고 싶다. 신이 나 같은 개미를 가두어 놓을 수 있을까?”
위연이 계단을 오르자 천지가 감옥처럼 꾸며졌다.
그는 아흔아홉 번째 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무신 조각상 앞에 서 있는 자는 이미 망가진 모습이었다.
위연은 무신을 하찮게 여기며 비웃었다.
“보아하니 신도 그 정도에 불과하군.”
그 역사가 4800년 가까이 되는 중원 인족 중에서 두 사람만이 무신교 총단(總壇)에 올랐다.
1200년 전의 유가 성인.
1200년 후의 위연.
딱 두 사람뿐이었다.
* * *
대주술사 살륜아고는 숨을 내뱉더니 말했다.
“위연, 무신의 소생이 대세의 흐름이다. 중원은 지금 인재가 쇠퇴하고 유가가 쇠약해져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기운이 유실되어 감정도 더는 전봉이 아닌데 너는 구태여 무모하게 덤벼드는가?”
말을 마친 그는 손가락 끝으로 손목을 가볍게 그었고, 피가 제멋대로 흘렀다. 그가 손으로 법인(法印)을 빚자 종처럼 웅장한 목소리가 천지에 퍼졌다.
“무신을 위해 제물을 바칩니다.”
옆에 있던 이이포와 오달보탑은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들은 각자 손목을 그어 마찬가지로 수결(手訣)을 빚었다.
고품 주술사 셋의 손목에서 실과 같은 피가 흘렀다. 하지만 피는 뚝뚝 떨어지지 않고 비색(緋色)의 빛으로 변해 요원한 곳에 있는 제단과 무신의 조각상을 향해 실오라기처럼 흩날렸다.
혈제대법(血祭大法)!
무신교의 혈제대법이었다.
주술사들은 대주술사의 목소리를 듣고, 이 광경을 보더니 무신교가 생사존망의 결정적인 시기에 놓였음을 깨달았다.
주술사 수백 명이 잇따라 전쟁터를 빠져나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목을 그어 법결을 빚었다. 그들은 마치 무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듯했다.
납란연은 체온이 점점 떨어지는 듯했다. 생기가 피와 함께 사라져 새빨간 빛으로 변하였다. 그 빛은 산골짜기로 흘러 들어가서 천 년 동안 무릎 꿇은 조각상에 모여들었다.
너희 중원 대봉 장병들이 용맹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설마 우리 무신교가 비겁하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무신교가 동북을 4천여 년간 통치하면서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는가!
그들은 무신교가 오늘 죽음의 길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위연과 대봉이 실패하게 하고자 했다.
납란연은 죽어가는 사이 고개를 홱 돌려 위연을 쳐다보았다. 그는 산해관전역에서 몰락한 부친이 떠올랐다.
부자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손에 죽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납란연은 천천히 눈을 감고 조용히 사라졌다.
주술사가 한 명씩 쓰러져 초췌한 미라로 변했다. 그들의 죽음은 소리 소문 없었다. 원망의 말도 후회도 없었다.
그들의 의지는 무신의 조각상에 스며들었다. 이는 무신교의 마지막 저항이었으며 주술사들이 위연에게, 유가 성인에게 거는 저주였다.
* * *
철컥…….
제단 위, 무신 조각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미세한 돌 부스러기가 튀었다.
검은 연기가 조각상의 미간을 뚫고 나와 온 하늘을 가렸다. 강렬한 태양을 막고 쪽빛 하늘을 막아 낮을 밤으로 만들었다.
삽시간에 이 검은 안개는 정산성 주변 백 리를 뒤덮고 끊임없이 뻗어 나갔다. 마치 폭풍우 아래 세찬 해일 같았다.
평범한 사람이 노하면 피가 3척씩 튀고, 천자가 노하면 시체가 백만 구 생겼다.
신령이 노하면 또 어찌하겠는가?
목숨 걸고 싸우는 병사들은 다시금 버텼다. 정산성 주변에 몇 안 되는 생존자가 고개를 들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머리 위의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검은 안개가 하늘이 기울어지는 듯한 기세로 갑자기 무너져 내리더니 제단 상공에 백 장 높이의 검은 형체로 응집되었다. 얼굴이 흐릿했다.
감히 검은 형체를 직시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했다.
백 장의 검은 형체는 백 장의 허영과 대치하였다. 마치 천지개벽의 두 거인 같았다.
“유성!”
검은 형체에서 어렴풋이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노 같기도 증오 같기도 탄식 같기도 했다.
이 소리를 따라 하늘에서 우렁찬 천둥소리가 들리면서 정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들이닥쳤다.
“후회할 것이다.”
어렴풋이 거대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위연은 상대가 이 말을 자신에게 한 거라는 걸 알았다.
그는 말없이 침묵하더니 고개를 돌려 먼 곳의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대봉 병사들을 보았다.
무신교 국토에서 죽은 이 장병들과 산해관전역에서 죽은 늙은 병사들, 그들이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건 결국 네 글자에 지나지 않았다. 위국위민(*爲國爲民: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나 위연이 그들을 데리고 와서 목숨을 잃게 한 게 이 네 글자 때문 아닌가?’
검은 형체가 높은 곳에서 그를 냉담하게 내려다보았다. 마치 신령이 힘없는 백성을 굽어보는 듯했다.
검은 형체는 손을 들어 손가락 끝을 살짝 눌렀다.
신령이 노하면 무섭지만, 보통 사람은 신령의 분노를 감지할 자격이 딱히 없었다. 신령에게는 그저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 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힘없는 개미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신령의 공격이 아직 미치기도 전에 그 위세가 이미 위연 온몸의 뼈를 다 부쉈다.
그의 척추가 갑자기 굽어졌다. 그는 마치 어깨에 큰 산을 짊어진 듯 다시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이때 위연은 곧 깨질 도자기처럼 본래 온 몸에 균열이 가득 퍼져 있었다.
이 모습은 애당초 불문과 두법할 때 허칠안이 무릎 꿇도록 핍박한 금신 법상과 비슷했다.
이 순간 그는 마치 허칠안의 포효 그리고 경성 백성 수만의 포효를 들은 듯했다.
위연의 눈에서 갑자기 맑고 투명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한평생 신을 공경하지 않고, 부처에게 예를 갖추지 아니하고, 군왕을 믿지 않고, 오직 백성만을 위했다. 신령이 어질지 않으니 곧 나의 적이다.’
위연은 조금씩 몸을 바르게 폈다. 그는 등을 포함한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졌다. 이 순간 그가 허리를 곧게 펼 수 있는 건, 아마 어떠한 신념이 그를 지탱하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오늘날 구주에 유가 성인이 왜 무신을 봉인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선조 황제가 그해 왜 이랬다저랬다 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무신이 상고 시기에 일찍이 중원을 침략하여 인족의 기운을 끊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위연은 척추가 무너지길 원치 않았고, 중원 인족이 대대손손 고개를 숙이고 노예로 살아가는 걸 원치 않았다.
신령의 분노가 응집된 손가락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손을 들었다. 조각칼을 쥐고 있는 손에서 검붉은 선혈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한 손이 등 뒤에서 뻗어 나오더니 그와 함께 조각칼을 잡았다.
어느새 백 장 높이의 거대한 허영은 이미 사라져 위연의 뒤에서 나타났다. 마치 천년 뒤 호걸의 가장 견실한 뒷배 같았다.
위연은 손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천년 전에 유가 성인이 있었다면, 천년 뒤에는 위연이 있었다!
드높은 기세의 이 지식인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무신을 향해 엄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너희 무신이 우리 대봉의 기운을 갉아먹고 우리 중원 인족의 기운을 끊고자 하면서 나 위연에게 물은 적이 있던가!”
위연은 유성의 조각칼을 쥐고 가볍게 앞으로 찔렀다.
조각칼은 눈을 자극하는 빛을 내뿜었다.
유가 성인에게 마지막으로 칼을 내민 뒤로 이미 1200여 년이 흘렀다.
이 칼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었다.
세상에 이렇게 놀라운 칼은 더는 없을 것이며, 이렇게 떠벌릴 의지와 기개도 더는 없을 것이다.
품계를 초월한 힘이 제단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하늘이 무너졌다.
무신이 응집해낸 검은 형체는 조금씩 붕괴하더니 천지를 휩쓰는 무시무시한 파동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이 힘은 산언덕을 휘감더니 평정하였다. 드넓은 바다를 스치면서 해일을 일으키고, 성지를 휘감더니 폐허로 만들었다.
남궁천유는 말을 타고 앞에 서서 중장기병을 거느리고 철수하였다. 그의 두 눈은 빨개졌으며 얼굴은 일그러졌다.
‘의부님, 반드시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장개태 등 금라, 고품 무사 역시 도망치며 죽음과 겨루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부리나케 도망쳤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 여파가 비로소 흩어졌다. 모든 곳은 초토화되었다.
무신교 총단, 정산성은 이로써 역사가 되었다.
유가 성인에게 봉인되었으며 무신의 힘으로 보호하고 있는 제단만이 천지를 멸한 이 파동에서 살아남았다.
위연은 남루한 청의를 입은 채 제단에 우뚝 섰다.
“왜…….”
허공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더는 웅장하지 않았다.
뒤에 있던 유가 성인의 허영이 무신 조각상에 한 발짝 들어서자 갈라진 틈이 저절로 재생되었다.
무신은 다시 봉인되었다.
‘왜?’
위연은 지친 몸으로 돌아서서 중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원경 6년에 입신양명하여 오랑캐 기병을 격퇴하고 대봉의 신진 관리로 도약하였다. 그런 뒤 산해관전역에서 전술 전략을 세워 구주의 판도를 뒤흔든 대전역을 승리로 이끌었다.
뒤이어 그는 스스로 수련 경지를 포기하고 조정에 들어가 조당의 여러 당에 맞서 환관의 신분으로 제공들을 제압하였다. 그가 영광, 공적, 권력을 손에 쥐니 더할 나위 없이 휘황찬란하였다.
그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보면, 정적이 반평생을 연구해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아주 많았다.
그는 자식도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이었다.
그는 환관들이 정신적 지주로 여기는 금은보화를 하찮게 여겼다.
파란만장한 관료 사회에 수십 년을 몸담았는데 정말 아무것도 좇지 않는다니?
위연의 눈빛은 마치 수많은 산과 강을 꿰뚫은 듯했다. 그는 청운산 정상의 아성전을 보고 아성전에 서 있는 비석을 보고 비뚤비뚤한 네 마디를 보았다.
‘왜?’
위연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천지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백성에게 좇아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성현의 학문을 계승하고, 후세를 위해 태평성대를 연다.”
그는 눈을 감았고 더는 눈을 뜨지 않았다.
* * *
원경 37년 가을, 위연이 십만 대군을 이끌어 무신교 총단을 함락한 다음 무신을 봉인하였다.
정산성은 폐허가 되고 수십 만의 백성이 사라졌다.
이로써 중원 인족의 정예 기병이 처음으로 무신교 총단을 무너뜨렸다.
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