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화. 역방향 사회적 매장
한참 지난 뒤 허 색마는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히고 전서로 대답했다.
[삼: 맞습니다. 천지회 내부에서 금련 도사를 제외하고 초 형이 처음으로 제 신분을 간파했군요.]
현실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얼마나 난감한지에 관계없이 ‘인터넷’상에서 그는 여전히 예지롭고 일격을 날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관건은 이렇게 가뿐한 태도를 취해야만 어색함을 날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 허, 썩 잘 숨겼구먼. 사실 나는 진작에 의심이 들었네. 다만 최근에야 완전히 확신한 게지.]
[삼: 역시 장원랑답습니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검을 부려 경성으로 돌아간 뒤 허씨를 단칼에 베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다른 한 사람은 너무 수치스러운 나머지 얼굴을 감싸고 싶었고, 살아가는 게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애써 태연한 척했다.
[삼: 최근에 안 겁니까?]
[사: 허, 두 시진 전에 내가 자네에게 숙부 전우의 일을 묻고 난 뒤, 신년이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네.]
‘신년, 어찌 된 거야? 완전 별론데. 응? 뭐가 숙부 전우 일이지……?’
허칠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전서로 말했다.
[삼: 우리 숙부의 전우요?]
‘허칠안 이 자식, 알고 보니 정말 조금도 개의치 않는 건 아니잖아. 허세 부리긴…….’
초원진은 주표와 조반의의 일을 다시 한 번 얘기해 주었다.
콰당!
종리는 의자가 옆으로 뒤집히는 소리에 깼다. 그녀는 눈을 비비더니 고개를 들어 보았다.
허칠안이 미친놈처럼 책상으로 달려들어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재빠르게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대략 일각 뒤, 그녀는 허칠안이 묵적을 불어 말리고 종이를 접어 책 속에 정중하게 끼워 넣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천기를 차단하는 원리가 이런 거군요.”
“원리가 어떠한데?”
종리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작은 목소리로 캐물었다.
“묻지 마세요, 비밀입니다.”
허칠안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말했다.
“사저는 전문가면서 나 같은 문외한한테 묻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요?”
종리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떨구고 담요 속에 웅크리고선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온기를 빨아들였다.
허칠안은 숨을 내뱉더니 감정을 다스리고 전서로 말했다.
[삼: 초 형, 이 일을 비밀로 할 수 있을까요?]
초원진이 전서로 대답했다.
[사: 자네의 신분은 비밀이 아니니 숨길 필요가 없네.]
허칠안은 요원한 북경에서 농담과 냉소가 뒤섞인 표정을 짓는 초원진을 보는 듯했다.
[삼: 알겠습니다. 만약 밝히시겠다면 저는 제가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습니다. 확실히 제가 바람직하게 굴지 않아 초 형께서 줄곧 신년을 삼호라고 철석같이 믿게 했으니까요. 말실수와 잘못된 행동을 많이 하셨지요.]
[사: 사실 나는 자네의 신분이 노출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네.]
‘가증스러운 허칠안, 내가 경성에 돌아가면 네 금신을 단칼에 벨 테다…….’
잠시 후 초원진은 다시 전서로 말했다.
[사: 허신년이 지서의 일을 알았네. 또한 나와 항원이 애당초 자네에게 속아 그에게 아주 성가신 일을 했다는 것도 알았지.]
……허칠안은 전서를 보내 떠보았다.
[삼: 그래서요?]
‘나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겠어. 나와 신년 사이의 관계를 균형 잡아줄 약점이 하나 필요해…….’
초원진이 전서로 말했다.
[사: 나는 좀 양심의 가책을 느끼네.]
[삼: 알겠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신년과 시를 논하시지요. 그가 이름을 알린 작품은 ‘천하가 나 허신년을 용납하지 않으니 이후의 대봉에 캄캄한 밤이 내리리라’입니다.]
[사: 응.]
허칠안은 장원랑을 달랜 뒤, 침상으로 돌아가 지서 파편을 베개 안에 쑤셔 넣고 구더기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그는 마구 몰려드는 수치심을 배설했다.
‘내 평생 이렇게 난감한 적은 없었다고……. 너무 창피하다. 나 허칠안의 이미지와 체면이 전부 없어졌어……. 지금 항원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내 일을 알게 되었다……. 엇, 잠깐. 모든 사람이 다 알면서 모든 사람이 말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사회적 매장을 당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셈 아닌가?!’
설령 모두가 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그를 대신해 비밀을 지켜주고 숨겨주면서 다른 사람이 허신년이 바로 삼호라고 믿게끔 애썼다.
‘이러면 나는 사회적 매장을 당하지 않은 셈인데. 반대로 앞으로 언젠가 진상을 공개한다고 해도 일찌감치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사회적 매장을 당하고 싶어도 대상이 사라진다. 반대로 최선을 다해 다른 사람을 속이고 오도한 그들이야말로 진짜 사회적 매장이다.’
허칠안의 눈이 반짝였다.
‘안심된다. 음, 좀 일찍 자야지. 내일이 바로 이모와 용맥을 탐색하는 날이니까.’
* * *
이튿날 허칠안은 세수와 양치질을 마친 뒤 아침밥을 먹고 방 안에 앉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빛이 용마루를 관통하였으나 부수지는 않았다. 찬란한 빛 사이로 낙옥형의 늘씬하고 영롱한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가 입은 건 지난번에 본 장포였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의 여성적인 매력을 더하고, 여인으로서 그녀의 존재감을 높였으며, 범접할 수 없는 선녀의 기운을 낮추었다.
“국사!”
허칠안은 열정적인 미소로 인사하였다.
낙옥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도도하게 ‘응’하고 소리 낸 뒤에 말했다.
“내가 자네를 데리고 가지.”
물론 그는 낙옥형에게 충분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보수적인 관점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대방에게 발견될 일은 없겠지요?”
“그럴 리가!”
낙옥형은 조각 같은 정교한 얼굴에 표정 없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기운을 차단할 걸세.”
‘무사를 제외하고 각 체계는 전부 그럴싸하단 말이지. 부러워…….’
허칠안은 미소를 지었다.
“일은 질질 끌어서 안 되니 가능한 한 서둘러 행동하시죠.”
낙옥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를 휘두르자 금빛이 허칠안을 휘감더니 그와 함께 방 안에서 사라졌다.
* * *
허칠안이 눈을 깜박이자 평원백부 뒤, 화원의 석가산이 보였다. 귓가에는 질감이 충만한 낙옥형의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인가?”
“네.”
그는 한 마디 대답하더니 어느 석가산 앞으로 걸어가 아주 익숙하게 장치를 눌렀다.
석가산의 표면에서 ‘문’이 활짝 열리면서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국사, 이게 바로 지하 동굴입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낙옥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를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이내 두 사람은 돌방에 이르렀고, 그 거대한 돌판을 보았다. 위에는 비뚤비뚤하고 기이한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낙옥형은 돌판 옆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여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토둔술에 조예가 아주 깊군. 확실히 금련 사형의 문장 같네.”
“금련 사형이요?”
허칠안은 자신의 의문을 드러냈다.
선황 기거록에 따르면 금련 도사와 인종 전임 도사는 동년배였다. 검주에 있을 때, 색마 흑련의 분신이 낙옥형을 얌전한 조카딸이라고 부르면서 그녀와 쌍수할 거라고 큰소리쳤었다.
늘씬하고 외모가 아름다운 국사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설명했다.
“삼(三)종의 도사는 평등하네.”
지위로 보자면, 삼종 도사는 평등하므로 금련 도사가 그녀의 사형이었다. 하지만 나이로 보자면, 금련과 그녀의 부친이 동년배이므로 사숙 정도?
허칠안은 생각하면서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서 파편을 꺼내 돌판 위에 두었다.
* * *
회경은 회경부 서재에서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리고 축 늘어져 다소 나른해 보이는 모습으로 부드러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 앞에는 대주 시기에 유행하던 자서룡(紫犀龍) 단향목 탁자가 있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종이를 한 장 펼쳐놓고, 먹물을 묻힌 자색 토끼털 붓을 조용히 백옥 붓 위에 두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회경은 장장 일각 동안 침묵한 뒤에 마침내 붓을 들어 ‘정덕 26년’, ‘오염’, ‘마도에 빠진 지종 도사’,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 ‘혼단’ 등을 적었다.
지종 도사가 모든 것의 원흉이라고 가정한다면, 허칠안의 추측은 합리적으로 성립되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많은 단서는 전부 하나하나 대응할 수 있었다. 비록 불합리한 부분들도 있지만, 이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혹 목적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지종 도사가 부황과 회왕을 오염시킨 목적이었다.
“아바마마가 항원을 죽이려는 건 항원이 평원백부의 비밀 통로를 봤기 때문이야. 다시 말해서 아바마마는 지종 도사의 존재를 알고 있어.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부터 지금까지 아바마마께서는 줄곧 지종 도사한테 좋은 일만 해주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서일까?”
이는 회경이 가장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그녀의 시점에서 볼 때 만약 이익이 없다면, 어떠한 동맹 관계도 안정적이지 않았다.
“아바마마께서 지종 도사에게 완전히 지배당한 게 아닌 이상……. 조당의 이익 다툼, 요령을 금련 도사가 다 먹을 수 있을까? 아바마마, 회왕 그리고 지종 도사의 결탁을 폭로한 사건이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이다. 이는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이 그들에게 아주 중요하며 이 사건의 본질이 혈단과 혼단이라는 의미다. 혼단이 중요한데…….”
시간이 조용히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회경은 투명하고 귀여운 귀를 살짝 움직여 서재로 오는 먼 곳의 발소리를 포착했다.
그녀는 황급히 종이를 구겨서 손에 쥔 뒤 소매 속에 숨겨 두었다.
조용히 십여 초 기다리니 발소리가 입구에서 멈추고, 가느다란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채미 소저가 왔습니다.”
회경은 쌀쌀맞게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해라.”
궁녀가 물러난 뒤 저채미는 경쾌한 발걸음을 내디뎌 들어왔다. 그녀는 작은 두 손에는 각각 귤을 하나씩 쥐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회경, 나 계화어 먹고 싶어요.”
계화어는 회경부 주방장의 특기로 유일무이하여 밖에서는 먹을 수 없었다.
회경은 웃었다.
“좋아, 내가 부엌에 통지하라고 사람을 시킬게.”
저채미는 아주 기뻐하며 사슴 가죽 돈주머니에서 커다란 떡을 꺼내 회경과 공유했다.
그녀들은 떡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잠시 아무렇게나 한담을 나누었다. 회경은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물었다.
“채미, 혼단 알아?”
“엇, 어째서 최근에 다들 혼단이라는 것을 묻는 거죠?”
저채미는 의아해하며 절친을 쳐다보았다.
“얼마 전에 허칠안도 혼단을 조사하러 관성루에 왔다가 나한테 묻더라고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서 그를 데리고 장서각에 갔죠.”
“혼단에 무슨 효험이 있는데?”
회경은 허심탄회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저채미는 갑자기 ‘너는 운 좋은 셈이야’라는 표정을 짓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나도 본래는 알지 못했는데 지난번에 허칠안을 따라 책을 보고 나서 알았어요.”
그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혼단은 좋은 거예요. 용도가 아주 광범위하죠. 원신을 증강하고, 단약을 정제하는 재료로도 쓰이며, 법보를 제련하고, 불완전한 신체와 정신을 고쳐주고, 기령(器靈)을 길러요.”
‘불완전한 신체와 정신을 고쳐준다라…….’
회경은 호흡이 갑자기 가빠지면서 찻잔을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