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화. 각 측 (1)
천종 성녀는 두피가 조금씩 저리고 목덜미에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방을 뛰쳐나가 우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녀는 너무 난처하여 하마터면 쥐구멍에 들어갈 뻔했다.
회경의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도도함과 냉정함을 회복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언제 안 것인가? 운록서원의 서생, 허 공자님.”
‘……회경은 정말이지 말을 괴상야릇하게 해!’
허칠안의 표정 역시 다소 굳었다. 그는 기침 소리를 내더니 아무런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최근에 안 일입니다. 음, 예를 들면 마마께서 더할 나위 없이 총명하시어 임안에게 문연각에 가서 책을 빌리라고 지시하셨지요.”
허칠안은 말을 할 때 옆에 있는 이묘진을 쳐다보더니 속으로 말했다.
‘정말 잘 됐다, 모두 같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자고.’
회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 공자는 역시나 총명하고 지혜롭군. 성인과 현인의 책을 많이 읽은 지식인답네. 운주에서 홀로 반란군 팔천을 막아선 큰형에 뒤지지 않아.”
허칠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이십니다. 마마께서야말로 천지회에서 가장 총명하신 분이지요. 추렵도를 빌린다는 이유로 임안의 사냥에 대한 흥미를 부추기고 자신을 아주 잘 감추셨잖아요.”
회경은 무표정으로 말했다.
“허 공자가 이렇게 대단한 걸 다른 사람은 아는가?”
“말, 말씀하지 마세요…….”
허칠안은 말을 더듬었고, 이묘진은 묵묵히 얼굴을 가렸다.
곧 허칠안과 회경은 동시에 침묵하고 정색한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색한 건 바로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허칠안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담담한 황장녀를 쳐다보더니 속으로 몇 마디 중얼거렸다.
‘방금 네가 멍해진 걸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 너한테 수치심이 없고 양심에 물어도 부끄러운 바가 없는 줄 알았을 거야…….’
이묘진은 목을 가다듬더니 회경을 쳐다보고선 제안하였다.
“오늘 일은 저희 셋만 아는 겁니다. 어떠한가요?”
“나는 찬성이오.”
허칠안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묘진, 어시스트 좋았어!’
회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건성으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자네 신분을 아는 자가 또 누가 있지?”
허칠안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저희 둘뿐입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리나를 무시했다.
또 잠시 침묵이 흘렀고, 회경은 화제를 옳은 길로 되돌렸다.
“사건은 이미 명백하게 조사가 되었나?”
허칠안은 ‘음’하고 소리 내었다.
“그전에 두 분이 제 질문 하나에 대답해 주시지요. 마마, 마마께서는 6년 전에 지서 파편을 얻으셨지요?”
회경은 어리둥절했으나 반박하지 않았다.
허칠안은 다시 물었다.
“묘진, 그대는 금련 도사가 천종에 갔을 때 지서 파편을 받은 것이 맞소?”
이묘진은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어떻게 알았지?”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어, 맞아떨어졌다…….’
허칠안은 한숨을 내뱉더니 말했다.
“제가 확실히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였군요. 우선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금련 도사가 바로 지종 도사입니다.”
회경과 이묘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회경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엄숙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지종 도사가 마도에 빠졌으나 완전히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선념이 분열되어 금련 도사가 된 것입니다. 묘진은 아마 기억할 것이오. 연밥을 수호할 때 금련 도사 혼자서 흑련에게 달라붙었고, 그의 마념과 뒤엉켰지.”
허칠안은 천종 성녀를 쳐다보았다.
이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당시에 당황했던 건 사실이네. 설사 마념이라고 해도 그건 2품 도겁기의 마념이었네. 금련 도사는 3품도 아닌데 어찌 필적했을까? 난 그때 그저…….”
‘그저 네가 머리를 굴리기 귀찮았겠지!’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만약 회경이 당시에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더 많은 걸 추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회경은 수련 경지가 허접이라 불려가지 못했다.
허칠안은 멈추지 않고 자신과 낙옥형의 추측을 있는 그대로 두 사람에게 다시 들려주었다. 이 얘기 속에 낙옥형이 깊이 숨긴 공(功)과 명(名)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국사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자신과 국사의 사적인 친분을 털어놓기 어려웠다.
그 과정에서 회경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녀는 아연실색하고, 분노하고, 침울해했다가…… 마지막에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언어 기능을 잃은 듯했다.
이묘진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마치 손으로 만든 인형처럼 굳었다.
지종 도사는 그해 정상적으로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마도에 빠질 징조가 있었다. 회왕과 원경이 남원에서 그를 마주쳤고, 오염되는 바람에 정상적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심사가 뒤틀린 미치광이로 변했다.
그래서 회왕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성 안의 백성을 도살하고 단약을 정제했다. 원경제는 기운이 몸에 더해진 자는 장생할 수 없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코 발악했다.
정상인은 이렇게 할 리 없었다. 하지만 만약 마음이 비뚤어진 반미치광이라면?
“알고 보니 이 모든 원흉이 금련 도사였구나…….”
이묘진은 탄식하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자네가 그날 지서로 전서를 보내는 게 아니라 나와 사적으로 만나자고 한 게 금련 도사가 볼까 두려워서인가? 자네는 금련 도사를 믿지 않는군.”
회경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저는 금련 도사가 이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할 수 없거든요. 저, 저는 좀 그를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허칠안은 탄식하였다.
회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이랬을 터였다. 본래는 그녀는 금련 도사가 믿을 만한 선배인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이 모든 것의 원흉이었다.
“용맥 밑의 존재가 금련 도사의 다른 화신일까?”
이묘진이 물었다.
‘얄미워. 내가 사건의 진상을 완벽하게 추리해내지 못하다니. 허칠안보다 이렇게 많이 뒤떨어지는 건 그가 나한테 단서를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천종 성녀는 자신의 존엄을 되찾고자 했다.
“모르겠소. 보름 뒤에 용맥을 다시 탐색할 것이오. 이번에는 결과가 있을 것이오.”
허칠안은 왜 이번에 결과가 있을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묘진과 회경은 더 묻지 않았다.
“그래서 혼단이 사실 지하 용맥의 그 분신의 수요이며 아바마마께서 요 몇 년간 정제하신 단약도 이 때문이라고?”
회경은 침음했다.
“아마도요.”
허칠안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가능할까? 오염을 철저하게 제거하실 수 있을까?”
허칠안이 말했다.
“우선 우리는 오염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한 사람의 본성이 바뀌었다면 회복하기 어렵지요. 만약 그가 통제받는 거라면 금련 도사에게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자는 스스로 나빠진 것으로 사람 전체의 본성이 이미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후자는 통제만 없앤다면 회복할 수 있었다.
이묘진은 이 말을 듣더니 회경에게 말참견했다.
“아니, 설령 본성이 나빠졌다고 해도 불문 고승이 도울 수만 있다면 원경은 마음을 맑게 하여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원래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회경의 눈동자가 약간 반짝였다.
“참, 이 일을 리나에게 알릴 건가?”
비연 여협객이 허칠안에게 물었다.
“그녀한테 알려서 뭐 하오?”
허칠안이 반문했다.
회경은 말하지 않았지만, 이묘진의 눈빛을 보니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듯했다.
“싸울 때 그녀를 부르면 좋겠소. 머리를 쓰는 일에는 필요 없소. 리나를 곤란하게 하지 마시오.”
허칠안이 말했다.
‘일리 있어!’
이묘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칠안은 보름 뒤 상황을 기다려보자고 약속한 뒤 저택을 나가는 회경을 배웅하였다.
회경은 떠나기 전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보름 뒤 만약 모든 진상이 까발려지면, 자네는 경성을 떠날 필요가 없게 되겠어.”
제공들과 감정은 반드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반쯤 미친’ 부황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었다.
‘나를 떠나보내기 아쉽나……?’
허칠안은 웃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회경은 멈칫하더니 또 말했다.
“그동안 내가 모든 단서를 다시 복기할 것이니 문제가 생기면 통지하겠네.”
그녀는 말을 마친 뒤 마차를 타고 길을 빠져나갔다.
* * *
파괴된 성벽 위, 옹성 안에서 대봉의 고위 장수들은 일제히 한자리에 모여 격렬하게 논쟁했다. 위연은 들은 체 만 체하고선 감여도 앞에 서서 말없이 침음하였다.
정관성을 격파한 지 이미 열흘이 지났다. 대군은 위연의 인솔하에 성을 공격하고 진지를 철수하였다. 마치 날카로운 칼로 염국의 중심을 찌른 듯했다.
지금은 이미 무려 7개의 성지를 공격하고 수백 리를 힘차게 나아갔다. 지금 몸담은 성지는 수성(須城)이라고 하는데 염국 수도의 마지막 요충지였다.
그들은 단 한 발짝 차이로 염국의 수도를 칠 수 있었다. 위연은 단지 열흘 만에 수많은 난관이 존재하기로 유명한 나라가 참패를 맛보게 하였다.
염국 수도를 칠 것인지 말 것인지, 장수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었다.
대봉 군대가 극도로 난처한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식량 부족!
“왜 군량과 마초가 아직 오지 않지요? 원래대로라면 3일 전에 첫 번째 군량과 마초가 도착했어야 합니다. 더는 싸울 수 없습니다. 전선을 너무 오래 끌어 저희의 보급선이 이미 끊겼습니다. 군량과 마초, 화포 그리고 활 없이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청년 장수가 일어서더니 위엄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관성에서 수성까지 우리는 절반이 넘는 병사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염국 수도는 양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우리의 지금 병력만으로는 절대 물어뜯지 못합니다. 이변이 없는 한 염국 수도에는 틀림없이 3품 주술사가 주재하고 있을 겁니다.”
이 청년 장수는 조영(趙嬰)이라고 하였다. 금군 출신의 4품 고수로 대봉 청·장년파의 인재였다.
그는 철수를 주장하는 보수파의 우두머리였다.
급진파는 남궁천유를 필두로 하여 처음의 기세로 염국을 끝장내자고 주장하였다.
“동북으로 60리 더 나아가면 바로 염국의 수도네. 수성을 공격한 뒤 우리의 군량과 마초 그리고 포탄이 보충될 것이고 그러면 한 차례 전투는 완전히 버틸 수 있네.”
남궁천유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까지 칠 수 있었던 건 ‘병귀신속(*兵貴神速: 군사는 신속성이 첫째임)’ 네 글자 덕인데 일단 철수하면 염국에게 숨을 돌릴 기회를 주는 셈이나 다름없네. 하지만 만약 염국의 수도를 공격하면 군비와 식량을 보충할 수 있다고.”
이렇게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의부님이 승부수를 던져 속전속결로 염군의 기세를 꺾은 덕분이었다. 지금은 대봉군의 기세등등함으로 단숨에 해치워야 할 때였다.
일단 철수하게 되면 무적의 기세는 사라질 테고 염국 수도처럼 험준한 웅성(雄城)과 강국의 지원병을 마주하면 이기고 싶어도 어려웠다.
조영은 남궁천유를 매섭게 주시하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병귀신속은 염국에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염국은 양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수비하기 용이하고 공격하기에는 어렵지요. 산속에는 비수군이 주둔하고 있어 다른 성지에 비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저희는 연이어 7개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렇게 오다 보니 백성들도 그렇고 강호 인사들도 그렇고 전쟁에 패한 염국 병사들마저 모두 염국의 수도로 도망쳤습니다. 성이 무너지면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이건 그들의 공통된 인식입니다.
이제 염국은 분명히 많은 사람이 합심하여 성지를 사수할 겁니다. 우리의 병력으로는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성을 공격하다가 손해가 막심해지면 상대방이 반격할 때 전국이 전멸할 위기에 놓일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잠시 먼저 후퇴하여 원기를 회복하고 식량과 군비를 보충한 뒤에 다시 오시죠.”
염국 수도는 수비하기에 용이했으나 공격하기에는 어려웠다.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장수들 모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현장에는 보수파가 주전파보다 더 많았다.
아직까지 논쟁한다면 이는 위연에게 기대를 품었다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룻밤 휴식하며 정비한 뒤 내일 출발한다. 군대는 성 아래 집결한다.”
위연은 지도상의 염국 수도를 가리켰다.
논쟁 소리가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