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단서
허신년은 두 손으로 탁자를 짚고 담담하게 말했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방금 여러분께서 한 말을 들었습니다. 척발제 군대의 수를 전부 합치면 대략 일만팔천 명이라지요, 맞습니까?”
양연의 부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방 병사와 민병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확실히 그렇네만.”
허신년이 물었다.
“일만팔천 명으로 성을 공격하는 건 어떻습니까?”
한 무장이 웃으며 말했다.
“헛된 망상이구먼. 초주성은 둘째 치고, 작은 도시라고 해도 일만팔천 명으로는 함락할 수 없네. 게다가 변방 방어선의 수백 개 거점에서 언제든지 도울 수 있고.”
양연의 부장군이 덧붙였다.
“우리는 이미 견벽청야(*堅壁淸野: 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고, 내부의 물자를 전부 정리함으로써 적이 발붙일 근거지를 없애는 전략)했네.”
허신년이 웃었다.
“기왕 그렇게 하였으니 저희 초주에서 일만 병력을 더 빼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양연의 부장군이 침음하더니 말했다.
“자네들이 데려온 군사 2만 중에 1만을 초주성에 남기고 그 군사를 이동 배치하는 건 문제 없네. 성 수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걸세.”
허신년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그럼 제가 외람되지만 한 마디 더 여쭙겠습니다. 척발제를 맞닥뜨리고도 적을 죽이지 않고 격추전을 펼치기만 한다면 병력 얼마로 충분한지요?”
이번에는 양연이 대답했다.
“2만 병력이면 여유롭네. 이곳은 초주에서 멀지 않아 배치가 좋네. 초주 수비병으로 지원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일만 오천이면 충분하지.”
허신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2만이 남는 거지요. 그리고 이 순간 군영에는 4만여 명의 병사들이 있습니다. 2만을 빼내어 초주성의 1만 군대와 회합하는 겁니다. 이 3만 군대는 우회하여 북경 깊이 들어가 요족 및 오랑캐와 합류하고요. 척발제 쪽이라면 2만 군사를 남겨 격추전을 벌이며 상대방을 현혹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포위 공격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군막 안이 조용해졌다. 장수들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각자 이 계략의 가능성을 저울질했다.
“우리에게는 술사도 있잖나. 망기술은 우리가 적을 찾는 걸 도울 수 있고. 설령 그들이 알아차리고 북상하여 지원한다고 해도 우리 역시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네.”
“적이 움직이면 우리도 움직이는 걸세.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따라 질질 끄는 걸세. 이렇게 하면 요족 및 오랑캐를 도울 수 있으면서도 척발제의 일만팔천 군대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겠군.”
“오, 비록 아주 통쾌하지는 않지만, 이 계책은 확실히 가능하긴 해…….”
현장에 있는 무장들은 경험이 풍부하였기에 허신년의 계책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 조금만 가늠해보면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군막 안, 허신년을 보는 고위 장수들의 눈빛에 인정이 더해졌다. 그들은 이제 적어도 그의 두뇌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그가 공무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양연은 한숨을 쉬더니 미소를 지었다.
“좋네. 이 계책이 먹히지 않을 경우 세부 사항은 다시 상의해야 할 걸세.”
허신년은 한숨을 내쉬었으며 더는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 군막에서 공무를 논의하다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낸다고 진짜 천재가 될 수는 없었다. 자리에 있는 이 장수들 역시 일을 꾸밀 때 틀림없이 영감이 번뜩였을 것이다.
행군하여 전쟁을 치를 때, 계책 하나에 의지하는 건 충분하지 않았다. 병법은 그 속에 담긴 이치가 너무 깊고 심오해 군영의 변소를 어느 위치에 안배할지까지도 독특한 법칙이 있었다.
‘신년은 확실히 병법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 부족한 건 전투를 지휘하는 능력인데 지금 책사가 되는 건 나쁘지 않아…….’
초원진은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 * *
“국사께서는 정말 예리하십니다!”
허칠안은 우선 한 마디 치켜세운 뒤 분석했다.
“지종 도사와 원경제는 확실히 결탁하였습니다. 다만 이게 뭘 설명할 수 있지요? 예전에 초주에 있을 때 저는 이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종 도사는 현재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나쁜 일을 하려는 악의와 여인을 탐하려는 음심으로 가득하니 괜히 조사할 필요는 전혀 없지 않은가?
경국지색의 미인 국사는 그를 가볍게 쳐다보며 말했다.
“사건 조사는 자네가 가장 잘하는 일이지 않은가? 만약 내가 안다면 자네가 조사하러 갈 필요가 있겠는가?”
‘참 일리 있어서 대답할 말이 없네.’
뒤이어 낙옥형은 그의 수련 경지에 관해 몇 마디 묻더니 그의 심검 수행에 대해 일러주었다. 낙옥형은 허칠안이 ‘의(意)’ 관문에 걸려 있다는 걸 안 후 한참 침음하더니 말했다.
“수단은 수단이고, 의는 의니 무의미하네. 자네가 지금 해야 할 건 의를 깨닫는 거지, 수단을 융합하는 게 아니야. 주객이 전도된 거지.”
‘하지만 나는 의(意)가 없는데. 만약 색마가 의에 속한다면 나는 지금 이미 4품 전봉이겠네요, 이모…….’
허칠안은 머리를 쭉 늘어뜨렸다.
“급히 서두르면 도리어 성공하지 못하는 법이지. 제삼자는 수년, 십수 년을 들여야만 이해할 수 있는데 자네는 고작 한 달 좀 넘게 수행하지 않았는가.”
낙옥형이 경고하였다.
“조급하게 굴지 말게.”
그녀는 멈칫하더니 또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자네가 2년 안에 의(意)를 수련해낼 수 있길 바라네.”
‘음, 왜 2년 안이어야 하지? 무슨 법칙이 있는 건가……?’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념하겠습니다.”
낙옥형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더는 말하지 않고 금빛이 되어 떠나갔다.
* * *
하지만 그녀는 영보관으로 돌아가는 대신 공중에서 회전하더니, 허부에서 멀지 않은 소원에 내려앉았다.
크지 않은 뜰 안에는 각양각색의 꽃이 만발했으며 공기마저 달달했다. 평범한 자태의 부인은 대나무 의자에 쾌적하게 누워 일찍 여문 귤을 먹었다. 그녀는 귤이 너무 셔서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배고픔을 억누르지 못했다.
“너 왜 또 나한테 온 거야? 만일 누구한테 들키면 어떡하려고?”
모남치는 언짢아했다.
“감정 말고는 나를 볼 수 있는 자는 없어.”
낙옥형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감정이 네 미색을 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안 올게.”
“그럼 나는 그래도 내 처지를 정확히 아는 셈이네.”
모남치는 음음 두 번 소리 냈다.
낙옥형은 그녀를 상대하는 대신, 곧장 물항아리 옆으로 걸어가서 흡족한 성장세를 보이는 구색 연뿌리를 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아주 잘 지내나 보네.”
그녀는 시선을 옮겨 왕비를 살폈다.
“허리가 굵어진 기분이야.”
왕비는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얹더니 불평했다.
“전부 허칠안 망할 놈 탓이야. 항상 나를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뭐야.”
낙옥형은 웃었다. 예전에 그녀가 회왕 왕비일 때, 그녀는 있어야 할 산해진미가 다 있었는데도 늘 먹기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시정의 평범한 부인이 되어 변변치 않은 음식을 먹는데도 입맛이 예전보다 좋아졌다.
그녀는 왕부에 20년간 갇혀 있다가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 미간 사이로 들뜨는 표정마저 달라졌다.
지금의 그녀가 만약 본모습을 드러낸다면, 분명히 세상에서 가장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여인일 것이었다.
낙옥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칠안이 경성을 떠나면 너도 그를 따라 갈 거니?”
왕비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였다.
“당연히 안 가지. 내가 뭣 때문에 그를 따라가니? 내가 그의 첩도 아닌데. 나는 그저 그에게 은자를 좀 빌리고 잠시 그의 집에 머무는 것뿐이야.”
낙옥형은 이 대답에 아주 만족해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네 말을 기억해. 만약 이랬다저랬다 하면 내가 너를 기생집에 팔아버릴 테니까.”
모남치는 의심했다.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낙옥형은 대꾸하지 않았다.
왕비는 귤 하나를 내던졌다.
“먹어봐. 내가 오늘 아침에 장에 가서 산 거야. 아주 비싸다고.”
낙옥형은 손사래를 치더니 쳐다보지도 않고 귤을 돌려보냈다.
“안 먹어.”
왕비가 말했다.
“쯧쯧, 너처럼 변소에 가지 않는 여인이 참 부러워.”
낙옥형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너 지금 말하는 모습이 마치 저속한 시정 부인 같아.”
왕비는 헤헤헤 웃었다.
* * *
다른 한편, 허칠안은 지종 도사한테서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지 생각했다.
‘분명히 지종 도사를 조사하러 갈 수는 없다. 우선 나는 지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알아도 갈 수 없다. 금련 도사가 내가 킬을 던졌다고 고발할 거니까. 하지만 지금 용맥 쪽을 더 이상 갈 수 없게 됐다. 너무 위험하고 수확도 없으니까. 기거록은 이미 다 봤는데 중요한 단서가 없었다. 어떻게 조사해야 하지? 아니다, 내가 조사해야 하는 게 대체 뭐지?’
허칠안은 자신의 단서와 생각의 흐름을 복기하였다. 우선, 그가 원경제를 조사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진북왕의 백성 대량 학살을 지지했는데 대가와 보답이 비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가 이렇게 오래 조사해보니 원경제에게는 확실히 큰 문제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허칠안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인지 명확한 답을 내리고 갈래를 잡을 수 없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원경제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다. 혼단, 인신매매, 용맥 이 모든 것들이 단서다. 하지만 그들을 연결하는 라인이 부족하다. 혼단에 지종 도사의 그림자가 있고, 용맥에도 지종 도사의 그림자가 있는데……. 낙옥형의 추측이 맞다. 지종 도사가 어쩌면 이 모든 게 연결된 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착안점을 찾아야 하지? 나 역시 잘못된 사고 영역에 빠졌군. 착안점을 찾으려면 굳이 지종 도사 본인부터 착수하지 않아도 돼. 그가 했던 일부터 손을 댈 수도 있다. 야경꾼 관아에 다녀와야겠어.’
그는 즉시 저택을 나서서 암말을 타고 야경꾼 관아로 내달렸다.
* * *
그는 야경꾼 관아 입구에 도착해 말고삐를 내던지고 장포를 털었다. 그런 뒤 그는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관아에 들어갔다.
문을 지키는 시위도 막지 않고 말고삐를 당겼다.
허칠안은 관아에 들어온 뒤 한 바퀴 돌았는데 송정풍과 주광효 두 색마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거리 순찰을 틈타 기루에 노래를 들으러 갔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좋은 은라 이옥춘이 허칠안이 온 걸 보았다. 이옥춘은 아주 기뻐하며 그를 끌고 안으로 들어오면서 갑자기 뒤쪽을 쳐다보았다.
“안심하세요. 칠칠치 못한 그 낭자는 따라오지 않았으니까요.”
허칠안은 이 상급자를 아주 잘 이해했다.
“아니, 말하지 말게. 입 밖으로 내뱉지 마…….”
이옥춘은 힘껏 손사래 쳤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녀를 떠올리면 온몸에 닭살이 돋아.”
‘보아하니 종리가 춘 형에게 아주 극심한 트라우마를 남겼네, 아이고…….’
허칠안은 군말하지 않고 자신이 온 목적을 얘기했다.
“대장, 그때 평원백 인신매매범의 진술서를 좀 보고 싶습니다.”
“처리하기 쉽지. 내가 가져다주겠네.”
이옥춘은 더는 묻지 않고 손짓하여 하급 관리를 불렀고 그에게 안독고에 가서 가져오라고 분부하였다.
이런 사건의 권종은 야경꾼이 직접 갈 필요도 없이 하급 관리를 파견하면 충분했다.
두 사람은 앉아서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 이옥춘이 말했다.
“참, 광효가 연말에 혼례를 치른다고 하네. 날도 이미 정해졌더군.”
“좋은 일이군요!”
허칠안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지었고, 속으로 말했다.
‘주광효가 드디어 송정풍 같은 나쁜 벗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어. 흰 서리로 뒤덮인 숲속 오솔길에서 떠나는 거야.’
주광효는 작년에 운주에서 사건을 조사하는 도중에 운주 사건이 끝나면 경성으로 돌아가 소꿉친구와 혼사를 치를 거라고 말했었다.
‘또 축의금을 내야 하네…….’
허칠안의 웃음 밑에는 전생에서 비롯된 본능적인 경계심이 감춰져 있었다.
말하자면 그가 전생에서 가장 손해 본 일이 바로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대학 동기, 고등학교 친구, 어릴 적 친구가 잇따라 결혼하면서 축의금을 내고 또 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돌려받을 기회가 사라졌다.
그는 생각만 해도 슬픔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