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화. 국사의 제안
‘횡령 방면으로 대봉은 확실히 뼛속까지 썩은 지경이지. 설령 왕 재상이라고 해도 뇌물 수수에 말려들고, 위 공조차 부하와 관원의 횡령에 대해 대부분은 눈감아주는 태도를 취하니깐…….’
허칠안은 고개를 저었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대세 앞에서는 설령 뛰어난 위연과 노련하고 용의주도한 왕 재상이라고 해도 혼자서 막아내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위연은 초반부터 그에게 자신을 감추고 속세에 어울리라고 강조했었다.
“이 얘기는 더는 하지 마시죠. 오늘 저는 감정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그 노인네에게 보고드릴 중요한 일이 있어요.”
허칠안이 말했다.
“흥!”
송경은 불쾌해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감정 스승님께서 나를 오해하셨네. 나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
‘이과는 전부 또라이야…….’
허칠안은 속으로 한탄했다.
하지만 송경은 허칠안의 부탁을 마지못해 승낙하였고, 팔괘대에 올라가 감정을 만나러 갔다. 이내 그는 풀이 죽어서 돌아오더니 소매를 뿌리쳤다.
“아주 공교롭게도 스승님께서도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더군. 자네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꺼지라시던데.”
‘감정이 나를 보지 않는다니…….’
허칠안은 말없이 탄식하더니 말했다.
“그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가지 말게. 어렵사리 왔잖나. 자네에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아주 많네.”
송경은 억지로 허칠안을 그의 연단실로 끌고 가서 자리에 앉은 뒤 말했다.
“잠시 기다리게.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
송경은 접시를 가지고 왔다. 접시 위에는 괴상망측한 모양의 ‘과일’이 놓여 있었다. 주먹 크기만 한 사과, 사과 크기만 한 복숭아, 털이 난 살구 그리고 맑고 투명한 포도, 포도 내부에는 눈이 달려 있었다.
“자네가 내게 전수한 접목술을 상세히 연구했네. 올해 봄이 된 이후로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있는데 큰 돌파구가 생기긴 했지만, 성과에 문제가 좀 있네…….”
송경은 수박을 가리켰다.
“내가 복숭아와 사과를 접목했는데 결과적으로 어떤 때는 복숭아 크기만 한 수박이 자라고, 어떤 때는 수박 크기만 한 복숭아가 자라네. 먹는 건 먹을 수 있는데 맛이 좀 이상하고 생산량도 저조하네. 허 공자가 맛보지 않겠는가?”
“아니, 아니요…….”
허칠안은 다소 초점을 잃은 눈으로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살구라면, 내가 살구나무와 새를 접목했네. 새의 등에서 작은 살구나무가 자랐고,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먹을 수는 없더군. 나의 목적은 살구로 하여금 고기 맛을 보유하게 하는 거였네. 포도라면, 음, 당분간은 안에서 왜 눈이 자라는지 이해하지 못할 듯하네. 아마도 포도 넝쿨이 죽은 말의 눈 안에서 자란 탓인 듯하네만…….”
‘나는 항상 감정의 괴짜 제자들 중에 송경이 가장 미쳤고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해…….’
허칠안은 가식적으로 칭찬했다.
“좋네요. 맞다, 인체 정련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나요?”
그가 이 주제를 꺼내자 송경은 몹시 기뻐했다.
“나는 이미 자네의 소망을 알았네. 허 공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사형, 사제들은 왕비의 모습대로 대봉의 제일 미인을 정련해낼 작정이야. 유감스러운 건 우리가 왕비의 모습을 본 적이 전혀 없다는 거야. 그러다 부향 낭자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우리는 부향 낭자를 정련해내기로 다시 결정했네. 하지만 아주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또 부향 낭자를 본 적이 없지.”
‘그렇지. 너희 이공계 공돌이들이 어찌 또 여인 같은 저속한 생물을 마음에 두겠어, 전부 덧없는 것이지…….’
허칠안은 온통 불만투성이였다.
송경이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와 가장 친한 건 당연히 채미 사매지만, 사형과 사제들이 상의한 끝에 허 공자 같은 색마는 채미 사매를 소유할 자격이 없다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네.”
“???”
허칠안은 얼이 빠져 그를 쳐다보았다.
“아, 내가 말을 좀 직설적으로 하네. 다른 의미는 없어.”
송경은 황급히 변명했다.
‘다른 의미 없이 그냥 단순히 나를 모욕했을 뿐인데…….’
허칠안은 속으로 말했다.
송경이 뿌듯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우리가 남자를 많이 정련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제 남색도 하라고?’
허칠안은 그를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송 사형, 저 일이 있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는 송경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나갔다.
* * *
허칠안은 사천감의 관성루에서 나와 암말을 타고 답답한 마음으로 감정의 태도를 생각했다.
그는 결정적인 시기에 문전박대를 당했다. 감정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수도 있었다. 혹은 이 약삭빠른 인간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었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그는 나서지 않을 작정이었으리라.
그가 무슨 목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위연조차 술사 전봉의 존재를 꿰뚫지 못하므로 허칠안도 스스로 걱정거리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는 매달릴 낙옥형의 아름다운 다리가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는 허부로 돌아와, 오늘 무탈하고 평안하여 다소 기분이 좋은 종리를 따돌렸다.
“지붕에 올라가지 마세요!”
허칠안은 한 마디 경고하더니 부검을 꺼내 원신을 주입하고 전음으로 말했다.
“국사, 국사, 저 허칠안입니다.”
잠시 후,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금빛이 강림하여 용마루를 관통했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국사가 금빛으로 빛나며 서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 연화관을 쓴 채 몸에 우의 장포를 걸쳤다. 마치 고귀하고 거룩한 선녀 같은 도도한 얼굴은 다시 보면 또 요염하고 매력적인 숙녀가 은혜를 기다리는 듯했다.
허칠안은 황선아 이후로 여색을 가까이 한 적 없던 터라, 옆으로 곁눈질하여 그녀를 주시한 뒤에야 여느 때와 같이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국사,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상의라는 단어는 다소 은혜를 모르는 듯 들렸다. 하지만 낙옥형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약간 끄덕여 그가 계속 말하길 기다렸다.
“제가 원경제를 조사하는데 이미 단서가 좀 생겼습니다만…….”
허칠안은 쉴 새 없이 얘기하였다. 그는 용맥, 평원백부 밑의 전송 진법 그리고 어젯밤 자신의 행동을 빠짐없이 한바탕 서술하였다.
낙옥형은 얼마나 똑똑한지 곧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예쁜 입술을 가볍게 뗐다.
“내가 이 일에 개입했으면 하고, 심지어 내가 자네를 도와 사람을 구해내길 바라는 건가?”
허칠안은 미인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뒤 뻔뻔하게 웃었다.
“국사께서 나서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낙옥형은 입을 좀 삐죽이더니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로 웃기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를 도와 사람을 구하고 원경과 관계를 끊으라고?”
허칠안은 생각하더니 말했다.
“원경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국사께서 나서시면 정의를 실현하는 격입니다.”
낙옥형은 콧방귀를 뀌더니 불쾌하다는 눈빛을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는 용맥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으면서 이렇게 당돌하게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는군. 솔직히 말하면 지금껏 나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히네. 용맥에 문제가 있으면 몰라도 고작 승려 하나가 갇혀 있을 뿐이라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가? 내가 그 후에 국사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기운을 빌려 업화를 억제할 수 있는지 없는지, 죽는지 사는지 자네는 전혀 개의치 않잖나.”
그녀는 결점 없는 완벽한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허칠안은 더는 말하지 않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탄식하했다.
“확실히 제가 무모했습니다. 저는 그저 국사께서 인종 도사이자 무적의 강자이며 대봉에서 제일 뛰어난 여인이라 맹목적으로 숭배했을 뿐입니다.”
낙옥형은 어리둥절하더니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응? 알고 보니 그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나를 추앙하고 흠모하였다고?’
허칠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하여 제가 국사께서도 곤란한 부분이 있다는 걸 잊었습니다. 전혀 제 의도가 아닙니다.”
낙옥형은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지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만약 내가 나서길 바란다면 어렵지는 않네. 추측이나 애매한 단서가 아니라 자네가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어야 해.”
그녀가 말을 마치자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낙옥형은 잠시 앉아 있다가 그가 꾸물거리며 말하지 않는 걸 보자 정교한 눈썹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또 다른 일이 있는가?”
‘엇, 국사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듯한데. 하지만 또 더 있을 이유도 없잖아…….’
허칠안은 이 이상한 분위기를 날카롭게 눈치챘다.
그는 예전이었다면 설령 이상함을 알아챘다고 해도 아마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이미 낙옥형의 어장에 들어갔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현 시대에서 최고로 성숙하고 아름다우며, 그림처럼 도도한 미인이 그와 쌍수할지 아주 진지하게 고려했으니까…….
그렇다면 낙옥형은 그를 더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 그와 더 접촉하고, 교류하길 갈망할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명색이 국사이자 어엿한 인종 도사였다. 그러니 당연히 젊은 남자한테 선을 넘는 열정을 보이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그에게는 진퇴양난의 딜레마가 있었다.
‘이럴 때는 남자가 좀 적극적일 필요가 있지.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음,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아…….’
허칠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잠시 어휘를 고르더니 말했다.
“지맥은 깊이 파고들 수 없기에 제 단서가 또 끊겼습니다. 국사께 더 좋은 제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말하면서, 기대하고 숭배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두 사람에게 이야깃거리를 던지는 격이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지금 그들이 공통으로 ‘일’하는 것임을 알리고, 낙옥형의 참여 의식을 늘렸다. 그는 지금 은연중에 사건 조사를 허칠안 단독이 아닌, 두 사람이 같이 하는 일로 변화시키려 했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낙옥형은 미간이 약간 느슨해지더니 옅은 웃음기를 띠며 화제를 이어받았다.
“평원백부 지하에 토둔술 전송 진법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집중하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철저히 숭배하는 그의 눈빛이 낙옥형을 아주 유쾌하게 했는지,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짙어졌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토둔술을 수련할 수 있는 자는 본래 아주 적네. 용맥을 토대로 전송 진법을 설치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고. 그중에 풍수에 접근하면서도 또 진법에 영향을 미치는 건 고품 술사 외에 법보 지서를 관장하는 지종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지. 이게 바로 단서 아닌가?”
* * *
일만 군사가 국경의 요새에서 다소 황량해 보이는 평원을 거닐었다. 기병이든 보병이든 상관없이 다들 극도의 침묵을 유지했다.
긴 행렬 속, 허신년은 입으로 과일포를 씹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가볍게 말 배에 두 다리를 끼우고 조금씩 대오를 벗어나 후방에서 화포와 상노를 운송하는 민병과 보병을 멀리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이때 적의 기병이 갑자기 습격하면 화포와 상노를 해체할 틈이 없다……. 그러므로 척후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화포와 상노는 살상 무기이지만 군대의 전진 속도를 심하게 지연시킨다. 어쩔 수 없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행군하며 싸우려면 양측의 우세, 지형 등 이로움과 해로움에 근거하여 고려해야 한다. 정해진 방식이 없구나……. 탁상공론과 진정으로 행군하여 전쟁을 치르는 건 별개다.’
그는 초주에 온 이후로 줄곧 정리를 하느라 머리를 굴렸다. 뇌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과일포를 충분히 챙겨와서 고강도 사고를 할 여력이 있다. 정신이 피로할 정도는 아니야. 음, 형님의 말대로라면, 당분은 뇌가 유일하게 빼앗을 수 있는 힘이라지…….’
내일 대군은 초주에 도착할 터였다. 그들은 하룻밤 동안 휴식하며 정비한 뒤 바로 출발하여 양연의 군대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양연은 일찍이 전쟁에 뛰어들어 정국의 정예병과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