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화. 일호의 신분 (2)
허칠안은 임안의 체면을 고려하여 호기심을 억눌렀다. 그에게는 진실을 검증할 다른 방법이 또 있었다. 그는 한시가 급한 건 아니었기에 종이 묶음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마마, 제게 읽어주십시오.”
“너한테 초서 읽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한 거 아니야?”
임안은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해요. 차례대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자고요.”
그는 대강 얼버무렸다.
“아!”
임안은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종이를 들고 눈여겨보더니 이내 깜짝 놀라 외쳤다.
“이건 선황의 기거록? 네가 선황의 기거록을 베껴 써서 뭐 하려고?”
‘나는 네 할아버지의 기거록을 베껴 썼을 뿐만 아니라 네 아빠도 조사하고 있단다…….’
허칠안은 이상야릇하게 말했다.
“저는 회왕의 비밀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비밀이 더 있더군요. 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지금 단계에서는 아직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래서 마마께 상세하게 설명해 드릴 수 없습니다. 마마, 이건 저희 둘 사이의 비밀이니 절대로 누설하시면 안 됩니다.”
그의 설명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임안 같은 성격의 아가씨는 상대가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 불쾌해할 것이다. 다만 상대가 적당하게 일부분을 털어놓고 두 사람 간의 비밀이라고 강조하면 그녀는 기뻐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걸 털어놓아서도 안 됐다. 그녀는 비록 황실의 공주로서 약삭빠른 편이지만, 궁의 능구렁이들 앞에서는 언제나 너무 여렸다. 그러므로 그는 원경제를 조사하는 중이라는 말은 하면 안 됐다.
임안은 이어지는 한 시진 동안 선황 기거록을 소리 내어 읽었고, 허칠안은 옆에 앉아 세심하게 들었다. 그 사이 그는 그녀에게 물을 두 번 따라주었으며, 그럴 때마다 달콤한 미소로 돌아왔다.
허칠안은 바라던 대로 선황이 인종 도사, 지종 도사와 ‘도리를 논하는’ 과정을 들었다.
선황은 지종 도사에게 황제가 도를 닦을 가능성을 재차 물었다.
지종 도사가 한 대답은 인종 도사와 같았다.
“장생은 가능하나 장존(長存)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장생이 가리키는 건 장수였다. 뒤에 장존이야말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존재였다.
선황이 보양법에 관한 오랜 토론을 거친 뒤 지종 도사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도존의 일기화삼청이 삼자일인(三者一人)인가 아니면 삼자삼인(三者三人)인가?”
지종 도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삼자일인(三者一人)도 되고, 삼자삼인(三者三人)도 가능합니다. 혹은 일인삼자(一人三者)일 수도 있지요.”
“이거 너무 까다롭지 않습니까?”
허칠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들어 임안의 말을 끊었다.
“제가 이해하도록 여유를 주십시오.”
‘삼자일인(三者一人)이 가리키는 게 갈라져 나온 세 사람이 사실은 같은 사람이라는 건가? 삼자삼인(三者三人)은 그들 역시 세 개의 독립적인 개체일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일인삼자(一人三者)는 또 무슨 뜻이지? 이건 삼자일인(三者一人)과 다른 뜻인가? 상반된 의미인가?’
“계속하셔도 됩니다.”
그는 말했다.
임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해서 소리 내어 읽었다. 허칠안이 실망한 부분은 후속에 일인삼자(一人三者)와 관련된 기록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지종 도사가 설명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기거랑이 기록하기 귀찮았던 건지 모르겠군. 왜냐하면 황제가 했던 모든 말을 그대로 기록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정말 이렇게 한다면 모든 기거랑은 건초염에 걸렸겠지…….’
그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아이고, 알고 보니 선황께서 회왕이 진국의 기둥이라고 하셨던 게 이 일 때문이구나…….”
임안은 갑자기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녀는 마침 옛일 한 단락을 읽고 있었다. 청년 시절의 원경제와 소년 시절의 회왕이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흉악하게 날뛰는 곰을 만났다. 그 당시 곁에 있던 시위는 중상을 입었고, 위기의 순간에 회왕이 손으로 곰을 찢었더랬다.
선황은 이 얘기를 듣고 회왕이 미래 진국의 기둥이라고 칭찬하였다.
‘명색이 무사면서 곰 한 마리 찢는 게 뭐가 대수라고…….’
허칠안은 하찮게 생각했다.
임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아바마마를 비롯한 그들은 정말 대담하더라. 남원(南苑) 깊은 곳은 통상적으로 들어갈 수 없어. 가을 사냥철이 되어서야 남원 깊은 곳에 진입할 수 있지. 그때는 궁중 고수가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맹수를 두려워하지 않거든.”
* * *
선황은 마지막 삼분의 일의 인생을 살면서 별다른 큰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일에 담담하게 처신하였다. 제왕으로서 정무 방면으로 열심이지 않으면서도 게으른 편은 아니었고, 생활 면에서는 자주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면서 후궁을 확충했다.
물론 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 시대에 모든 남자는 속마음이 계절과 같았으니까. 허나 이 사람은 노년이 되어도 이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않았다. 그래서 선황 기거록의 후반부에는 용양환(龍陽丸)이라는 단약이 자주 등장했다.
여기서 용양(龍陽)은 통상적인 의미의 용양이 아니었다. 용(龍)은 황제를 의미하고, 양(陽)은 남자의 강건한 기질과 양기를 의미했다. 종합해보면 사실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과 같은 뜻이었다.
임안은 이 내용을 읽을 때 표정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선황의 기거록을 통해 할아버지의 사생활을 본 셈 아닌가. 물론, 황제는 사생활이 없었다. 황제 자신도 이런 사생활에 개의치 않았다.
‘이 부자 둘 정말 대단하다…….’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사람은 온종일 잠자리 스킬만 생각했다. 한 사람은 후궁의 무수한 숙녀를 두고 못 본 척했다. 그는 마침내 선황 기거록을 다 읽었다. 드디어 조사를 마쳤다. 허칠안은 좀 유감스러웠다. 그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얻지는 못했다.
허칠안은 선황 기거록을 거두고 갑자기 진중한 웃음을 지었다.
“마마, 용맥감여도는 풍수와 관련 있지요. 이 방면의 학문은 확실히 좀 어려워 반드시 다른 이와 토론해야만 하지요, 혼자서는 딱히 연구해낼 수 없습니다. 마마께서는 평소에 누구와 토론하십니까?”
그는 임안이 열등생이라고 단정했기에 이 말을 일부러 확정적인 어조로 내뱉어 거짓 공갈할 작정이었다.
임안은 체면 때문에 자신이 잘 아는 척하면서 틀림없이 그의 말에 따라 대답할 터였다. 그는 학창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여학생들은 남자 연예인 얘기로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데 허칠안은 연예계에 관심이 없으면서, 또 여학생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척하지만, 사실 몇 마디 하면서 여학생들의 말에 맞장구칠 뿐이었다.
“맞아, 맞아. 내 생각도 너와 같아.”
“맞아, 맞아. 다른 사람과 토론해야지.”
임안은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보통 회경과 토론해.”
‘회경…….’
허칠안은 몸을 휘청거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제대로 서 있지 못할 뻔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모든 감정을 억누른 뒤 임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책은 어디서 났나요?”
“문연각에서 빌려왔어.”
……허칠안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회경공주마마가 빌리라고 한 거죠?”
임안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그녀는 잠시 우물쭈물했으나 결국은 솔직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나약하게 말했다.
“너 정말 정확히 맞혔어.”
허칠안은 굳은 표정으로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임안부를 나선 허칠안의 온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와 느낌표였다.
‘일호가 회경?! 일호가 회경이라니!!!’
그는 이 판단에 근거하여 마음속으로 지난날을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일호는 아주 신비로웠다. 일호는 조정에서 지위가 높고 권력이 막강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적지도 않았다.
임안은 전부 일치하였고, 회경은 더욱 문제없었다. 게다가 회경의 총명함과 심계는 확실히 일호와 부합하였다.
“과거의 갖가지 사건에서 일호가 보여준 정보력을 보자. 일호는 지위가 높고 권력이 막강하며 아주 큰 권한을 지녔다. 500년 전의 태자가 상백에서 익사했다는 것도 일호가 누설한 정보로 기억한다. 하지만 제공들도 단서를 찾을 수 있으니 이러한 이유로 일호가 회경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일호가 평소에 보여준 태도는 조정에 아주 우호적이다. 또 협객이라는 명목하에 무력으로 금령(禁令)을 범하는 이호 이묘진을 눈에 거슬려했다.
우선 일호가 회경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녀가 항원의 행방 조사를 책임지겠다고 한 행동은 합리적이다. 제공들은 궁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할 수 있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통상적으로 고정된 장소일 수밖에 없다. 황궁에서 후궁까지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회경이라면 황궁을 거침없이 다닐 수 있다. 그녀가 임안에게 문연각에 가서 용맥감여도를 빌려 읽으라고 한 건 신중함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임안 같은 열등생은 어떤 책을 빌려도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이렇다고 해도 내가 아끼는 임안을 호구로 잡다니 화가 나네.”
허칠안은 더 많은 세부 사항을 떠올렸다. 예컨대 예전에 한 번, 그가 리나와 채팅방에서 허풍을 떨며 대봉의 예쁜 공주를 납치해서 리나 오라버니의 아내로 삼으라고 말했더랬다.
그 당시 일호가 보인 태도는 극도의 불쾌감이었다.
“그리고 일호가 만약 회경이라면 그녀는 분명히 진작에 내 신분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똑똑한 그녀를 속일 수는 없지…….”
말 등 위의 허칠안은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는 문득 이렇게 살아봤자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가 허부로 돌아갔을 때, 숙모는 두 딸 그리고 리나와 이묘진을 데리고 외출하여 노래를 들으러 갔다.
“숙모는 정말이지 생각 없는 부인이야. 그래도 신년이 출정한 지 처음 며칠 동안은 걱정하더니 지금은 또 즐거워하네. 자신이 선녀인 줄 아는 건가…….”
허칠안은 비아냥거리다가 하마터면 돌아서서 기루에 가 노래를 들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확실히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는 목욕하고 역용하여 밖에서 키우고 있는 미망인을 ‘임행’하러 갈 작정이었다.
이때 그는 익숙한 가슴 두근거림을 감지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지서 파편을 꺼내 전서를 살펴보았다.
[일: 항원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잡았네. 하지만 나 혼자서는 계속해서 추적 조사할 수가 없으니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하네.]
허칠안은 일호의 전서를 보니 왠지 모르게 좀 제 발 저리고 부끄러웠기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 항원의 단서를 잡았다고? 이렇게 빨리?]
‘역시 비연 여협객답게 의협심이 강하군!’
허칠안은 묵묵히 칭찬했다.
동시에 허칠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시 회경은 대봉의 첫째 공부벌레답게 능률이 정말이지 놀랍도록 높았다.
[일: 항원이 평원백을 죽이는 과정에서 무심결에 봐서는 안 될 물건을 보았네. 이는 삼호의 추측이었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보았지? 추측할 길이 없네. 이 일 때문에 나는 곤혹스럽고 심지어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나 잠을 이루기 어렵네.]
‘이렇게 시험 문제에 죽기 살기로 덤비는 정신은 공부벌레의 표준이지. 역시나 회경답다. 내가 그해 이런 패기가 있었다면 칭화대나 북경대에서 이미 나한테 손짓했을 텐데…….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마 내가 지금껏 명문 대학에 기회를 주지 않은 걸지도. 그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는 그들이 얻을 수 없는 학생이거든…….’
허칠안은 지서 파편을 쥔 채 소리 없이 투덜거렸다.
일호는 계속 전서로 말했다.
[일: 우리의 그 폐하께서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분명히 항원을 멸구할 것이네. 금련 도사께서 당분간은 죽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는 틀림없이 폐하께서 언제나 볼 수 있는 곳에 감금되었겠지. 하지만, 회왕 밀정이 항원을 데리고 내성에 들어간 뒤에 더는 나타나지 않았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회경은 매우 조심스럽구나. 말끝마다 폐하라고 하는 거 보니 분명히 네 아버지인 거지…….’
허칠안은 지금 회경에게 빈정대고 싶은 욕구가 충만하여, 심지어는 어떻게 그녀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유도할 수 있는지 궁리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