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화. 일호의 신분 (1)
“신년이 간 지 둘째 날이구나. 그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허칠안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엊그제 그는 저택에서 사무를 보고 수행에 몰두하느라 바빴기에, 오늘이 돼서야 시간이 나 선황의 기거록을 살폈지만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년을 그리워하였다.
허신년은 떠나기 전에 선황 기거록을 모조리 외워 썼다. 물론, 그가 쓴 건 초서(草書)였다.
편폭이 너무 길어서 초서로 쓰면 시간이 훨씬 절약되었다. 그는 군대를 따라 출정을 앞두고 있기에 제대로 글씨를 쓸 시간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건 고정적인 표기법이 없었기에 지식인이 아니면 아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집안에서 공부한 사람은 신년 외에 영월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월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했던 터라 초서를 배운 적이 없어서 알아보지 못했다.
“선황 기거록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니 아무에게나 함부로 보여줘서는 안 되지. 반드시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해.”
허칠안은 머리를 한 바퀴 굴린 끝에 자신이 아는 지식인이 몇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천지회 내부에는 초원진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군대를 따라 출정하였다.
집안에는 신년 한 사람만 지식인이었다. 허평지와 숙모가 그 대신 번역해주길 기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야경꾼 관아에서 춘 형, 정풍, 광효 세 사람은 믿을 수 있어. 하지만 그들의 문화 수준은 나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지. 운록서원의 지식인은 괜찮아. 하지만 왔다 갔다 두 시진 여정이라 확실히 너무 길어. 음, 이묘진더러 나를 하늘로 올려보내게 해서 바로 날아갈까……. 회경은 너무 똑똑해서 직접 선황 기거록을 꺼내 그녀에게 번역하라고 하면 분명히 이것저것 캐물을 거야. 참, 임안은 가능할 텐데. 이 아가씨가 멍청하기는 하지만,그녀의 문화 수준을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고. 어쨌거나 황실의 공주이니 필법 같은 기본기는 문제없다고.’
허칠안은 고민 끝에 임안을 택했다.
그는 즉시 두꺼운 종이를 챙겨서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암말을 탄 뒤 다그닥다그닥 야경꾼 관아로 갔다.
신년이 출정한 후, 그는 허신년의 모습으로 역용할 수도 서길사 관패를 사용해 황성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도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인맥은 여전히 넓었으니까.
야경꾼의 은라는 황성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황성을 순찰하는 일은 줄곧 은라의 직무 중 하나였다.
허칠안은 춘 형의 요패를 빌렸다. 그리고 그때 입었던 본인의 차복을 입은 뒤 이옥춘의 모습으로 역용하였다. 이후 그는 춘 형의 말을 타고 순조롭게 황성에 진입하였다.
* * *
허칠안은 춘 형의 모습을 모방하여 임안부 저택 문 앞에 이르러 시위에게 말했다.
“본관 이옥춘, 허칠안의 전임 상급자이자 가장 친한 벗입니다. 임안 공주마마를 뵈러 왔습니다.”
그가 이렇게 구구절절 말한 이유는 임안을 순조롭게 만나기 위함이었다. 공주마마는 일개 무명 은라가 만나겠다고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허칠안’ 세 글자든 은라 그 자체든 문을 지키는 시위가 체면을 봐주기엔 충분했다. 그는 묻지도 않고 ‘잠시 기다리시오’라는 말만 남겼다.
그러고는 황급히 저택에 들어가 아뢰었다.
임안은 아니나 다를까, 허칠안의 친한 벗이라는 걸 들은 즉시 그를 소견하였고, 응접실에 있길 택했다.
임안의 곱고 다정한 도화안, 충만한 수줍음은 저도 모르게 클럽 여왕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녀는 탁자에 앉아 기질에 맞지 않게 진중한 모습과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은라가 본 공주를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마마, 저예요. 여기서는 대화하기가 불편하니 더 구석진 곳으로 가시지요.”
허칠안이 전음으로 말했다.
임안은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무너졌다. 그녀는 얼굴에 걷잡을 수 없이 웃음이 번져나갔으나 재빨리 참고 궁녀들을 쳐다보면서 분부했다.
“내가 이 은라와 중요한 일로 상의할 테니 방해해서는 안 되느니라.”
궁녀와 태감이 없는 서재 안, 임안은 놀라면서도 기쁜 나머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어떻게 왔어? 안 그래도 허신년이 출정한 후에 그의 모습으로 바꾸어 본 공주한테 놀러 올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너랑 놀려고 오는 거라면, 역용하기에 쉽지. 회경 마마가 나를 도울 거거든…….’
허칠안은 책상으로 걸어가 말했다.
“이번에 마마를 찾아온 건 급한 일이 있어서입니다. 음, 마마께서는 초서를 보실 줄 압니까? 저한테 초서가 있는데 마마께서 제게 읽어주시길 간청하고 싶습니다.”
임안은 듣자마자 아주 기뻐하며 병아리가 쌀을 쪼아먹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할게!”
드디어 그녀가 개자식 앞에서 놀라운 재능을 드러낼 기회가 생겼다.
‘역시 열등생이라고 해도 상대적인 거야. 명색이 공주인데 어찌 머릿속에 먹물이 조금도 없을 수가 있겠어…….’
허칠안은 탁자 옆에 서서 아주 즐겁게 품속에 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표정과 눈동자가 굳었다.
책상 위에 《용맥감여도》가 한 권 놓여 있었다.
‘용맥감여도? 임안 서재에 어떻게 이런 책이 있지? 아니, 임안이 어째서 이런 책을 보지?’
허칠안의 눈동자가 굳었다. 용맥감여도, 특히 ‘용맥’이라는 두 글자는 그를 극도로 민감하게 했다.
그는 명색이 경찰 학교 졸업생이자 다년간의 형사 경험이 있는 경력자였다. 그는 이 책만으로도 아주 많은 정보를 연상하였다.
처음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이러했다. 지서 단체 채팅방의 일호는 조정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그녀)가 얼마 전에야 항원의 사건을 인수하겠다고 선포하였고, 항원 사건은 용맥과 관련이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관리라는 법은 없었다. 공주 역시 높은 자리에 있었다.
몇 초 뒤, 그가 떠올린 두 번째 생각은 이러했다. 아니, 임안은 이런 머리가 없었다.
일호는 지서 단체 채팅방에서 과묵하게 염탐하는 걸 좋아하지만, 이따금 이야깃거리에 참여할 때 아주 예지롭게 보였다. 초원진에 뒤지지 않았다.
임안은 명색이 어장의 세 바보 중 하나건만 어떻게 이렇게 지혜로울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만약 그녀가 정말 일호라면, 자신이 그녀에게 보인 애정과 무방비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를 삼호라고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용맥감여도》를 광명정대하게 책상 위에 놓을 수 있겠는가!
그는 또 몇 초 뒤, 세 번째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이런 방식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암시하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터져 나왔다. 허칠안은 벼락을 맞은 듯 감정이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추리하고 추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임안이 일호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허칠안이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 임안은 유쾌한 발걸음으로 책상 옆으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녀는 작은 두 손으로 책상을 ‘탁탁탁탁’ 두드리며 조급함을 드러냈다. 그녀는 해죽이 웃으며 재촉했다.
“초서는? 어서 꺼내서 본 공주에게 보여줘. 본 공주가 초서 읽는 법을 가르쳐줄게.”
허칠안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몇 초 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직이 먼저 변소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임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서재를 나섰다가, 밖으로 어느 정도 걸어 나가 궁녀 한 명을 찾아서 물었다.
“저택에 변소가 어디 있소?”
그는 사실 알고 있었다. 그는 임안부에서 임안의 규방과 궁녀와 태감의 방을 제외하곤 다른 곳은 다 가보았다.
하지만 허칠안이 안다고 이옥춘도 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궁녀가 그를 데리고 변소에 가더니 어느 뜰을 가리켰다.
“이 대인, 저기가 바로 변소입니다.”
“공주부의 변소는 평범한 백성의 정원보다도 크군.”
허칠안은 ‘경탄’하더니 개탄했다.
‘이 은라는 참 상스럽네…….’
궁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허칠안은 변소에 들어간 뒤 ‘유가 마법서’를 꺼내 망기술 한쪽을 찢고 손을 털어 불을 붙였다. 청광 두 줄기가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흩어졌다.
청광이 완전히 사그라든 뒤 그는 변소를 나와 임안의 서재로 돌아갔다.
허칠안은 차분한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책상 위의 그 《용맥감여도》가 치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엇, 마마, 방금 그 책은요?”
임안 역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내가 치웠는데.”
허칠안은 내친김에 화제를 이어받아 책을 눈여겨보았다.
“마마께서 어째 풍수학에 관한 책에 흥미가 생기셨습니까?”
임안은 가늘고 아름다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정색하더니 말했다.
“화본은 그저 내가 틈날 때 보는 거야. 나는 비인기 학문의 지식을 파고드는 걸 가장 좋아한다고. 예를 들면, 음, 풍수학.”
‘그녀가 거짓말한다…….’
허칠안은 임안이 거짓말을 했음을 예리하게 분별해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난감했다. 그는 그녀가 한 거짓말이 ‘내가 공부를 좋아한다’라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풍수를 보는 덴 다른 목적이 있다’라는 뜻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냥 접을까? 우선 이 일은 제쳐두고 나중에 관찰하여 그녀의 신분을 확인할까? 의심 가는 대상이 생겼으니 앞으로 조사를 펼치기에 훨씬 수월해졌어…….’
이 생각은 곧바로 산산이 조각났다.
그에게 임안의 중요성은 맨 앞줄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계집애가 그에게 있어 몇 되지 않는, 아낌없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그녀는 좀 바보 같고 좀 순진했다. 또 그를 도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권력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허칠안은 비로소 이 낯선 세계에 정착할 수 있었으며, 마음의 항구가 생겼다.
임안은 가족과 같았다. 그녀는 그를 심리적으로 구원했다.
그래서 그는 암암리에 임안을 조사하지 않기로 하고 그녀와 단도직입적으로 대화하는 걸 택했다.
허칠안은 상대방의 까맣고 빛나는 도화안을 주시하면서 무심한 척 말했다.
“제가 최근에 보물 얘기를 들었는데, 보물 이름이 ‘지서’라고 하더군요. 지종의 법보인데 마마께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임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들어보신 적 없어요?”
허칠안은 아주 중요하다는 듯 다시 캐물었다.
“없어.”
임안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입을 여는 동시에 망기술에 반응이 왔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어. 그녀, 그녀는 일호가 아니야. 역시 그녀는 바보 같은 임안이야. 정말 잘됐어…….’
허칠안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왠지 모르게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는 쾌감이 들었다.
즉시 그는 새로운 의혹이 생겼다.
임안은 일호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이해하는 바로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 그녀가 왜 이 중요한 시기에 그가 아주 민감하게 여기는 《용맥감여도》를 선택했을까?
“마마께서는 어째서 이런 쓸데없는 책을 보십니까?”
허칠안이 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평소에 늘 책을 보고 학문을 탐구한다고.”
임안은 손으로 탁자를 치더니 눈꼬리를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마치 허칠안의 의심이 아주 불만스러운 듯했다.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
허칠안은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바람이 든 여인은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설령 거짓말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