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화. 반평생
조정은 전쟁 때마다 병력을 배치하고 군량을 조달했다. 물론 여기에 상응하는 의식도 빼놓아서는 안 됐다.
조정은 사천감에게 길일을 택하게 한 뒤 하늘, 땅,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를 삼제(三祭)라고 했다.
삼제(三祭)는 격식이 엄격했는데 각각 다른 길일에 황제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거행하였다.
군대를 따라 출정해야 하는 병사, 장수들도 이날은 제사를 지냈다.
자손에 전쟁터에 나가면 제사는 필수불가결 했다.
허씨 집안 무덤은 경성 밖 풍수가 빼어난 명당에 있었다. 이 명당은 사천감 술사를 청해 풍수를 봐달라고 한 곳이었다. 물론, 경성 대부호는 대체로 술사를 청해 풍수를 봐달라고 했다.
사람들의 무덤은 전부 풍수가 빼어난 명당이었다…….
허신년과 허칠안 형제 둘은 지금 허씨 가문의 금봉황(金鳳凰)으로 핵심 인물이었다.
서길사 허신년이 이렇게 큰 전쟁에 출정한다고 하니 가족 대부분이 왔다. 그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장로가 둘 있었다.
한 장로는 체격이 그런대로 정정하여 마르고 훤칠하였다. 다만 그는 백발이 좀 성겼다.
다른 한 사람은 머리가 이미 좀 맑지 않았고, 눈빛이 다소 멍했다. 그래도 백발이 성성하고 빽빽했다.
제사 의식을 거행한 뒤 백발이 성성한 장로가 개탄했다.
“그해 사실 사천감 술사의 말을 믿은 이가 없네. 경성이 이렇게 큰데 어디 그렇게 많은 풍수 명당이 있겠는가. 그저 행운을 빌 뿐이지. 다만 지금 보니 여기는 확실히 풍수 명당이네. 아니면 뛰어난 인재가 둘씩이나 연달아 나올 리가 없지.”
주위 가족들이 웃었다.
이때 나이가 많아 눈과 귀가 어두운 그 장로가 사람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더니 중얼거렸다.
“칠안은 어디에 있는가? 칠안은 어디에 있지? 우리 허씨 집안의 문곡성(文曲星)이 어디에 있는가?”
허평지가 허신년을 끌고 다가와 웃었다.
“삼촌, 우리 허씨 집안의 문곡성은 신년입니다. 무곡성(武曲星)이 칠안이지요.”
장로는 혼탁한 눈으로 신년을 주시하면서 한참을 바라보더니 끊임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아니야. 너는 칠안이 아니야.”
“그는 당연히 칠안이 아니지요. 모두가 그를 신년이라고 하고, 우리 허씨 집안의 문곡성이라고 합니다.”
옆에서 가족들이 큰 소리로 설명했다.
장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혀 거리낌 없이 사람들 사이를 뒤졌다.
“칠안, 칠안 어디에 있는가?”
허칠안은 어쩔 수 없이 걸어가서 웃었다.
“할아버지, 제가 칠안입니다.”
장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자세히 살폈고, 웃음을 지었다.
“칠안이구나, 칠안. 우리 허씨 집안의 문곡성이야.”
이 장로의 아들이 옆에서 난감해하며 변명했다.
“예전에 아버지께 네 업적을 말씀드렸어. 아버지는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칠안 너밖에 기억하지 못하셔.”
* * *
위연은 황궁 어화원 정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흑돌을 만지며 원경제와 바둑을 두었다.
위연은 늙은 황제를 몇 판 이긴 뒤, 담담하게 말했다.
“듣자 하니 황후께서 병이 나셨다고요?”
원경제는 그를 쳐다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
“가을이 되니 아마 감기에 걸렸나 보지. 짐이 정무로 바빠 한동안 황후를 냉대했구먼. 위 경이 짐 대신 황후를 문안하러 가게.”
위연은 일어서서 읍하고 물러났다.
그는 봉서궁으로 가는 길을 수도 없이 걸었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천천히 걸었다. 분명히 길의 종점에는 그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빨리 걸을까 봐 두려웠다. 그는 자신이 까딱 조심하지 않았다가 이 길을 다 걸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 * *
봉서궁 안, 당대 제일 미인인 황후가 전 안에 서서 한 손으로는 소매를 걷고, 한 손으로는 향을 피웠다.
“자네 어찌 왔는가?”
그녀는 위연이 전 안에 들어오는 걸 보자 아주 기뻐했다.
“곧 출정하여 마마를 뵈러 왔습니다.”
위연의 미소는 온화하였다.
황후는 그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뒤 궁녀에게 차와 떡을 내오라고 분부했다. 두 사람은 방 안에 앉았다. 시간은 조용히 흘렀다. 그들 사이에 말은 많지 않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정겨움이 있었다.
위연은 차를 한 잔 다 마신 뒤 개탄했다.
“궁 안에 마마께서 만드신 떡이 항상 비치되어 있습니까?”
황후는 입을 오므리더니 가볍게 웃었다.
“자네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자네가 내가 만든 떡을 가장 좋아한다는 건 아네. 그래서 매일 오후에 직접 부엌에 가서 손수 만들고 있네.”
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심하십니다.”
황후는 접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떡을 고작 두 조각만 먹은 걸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예전에 아명(阿鳴)이 늘 자네한테서 내가 만든 떡을 빼앗아갔는데 자네 역시 그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았지. 상관가(上官家)에서 자네는 적자인 그보다 더 적자 같았어. 왜냐하면, 자네는 우리 부친이 가장 중시하는 서생이자 그의 생명의 은인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만하십시오!”
위연은 차분하게 말을 끊고 나지막이 말했다.
“저와 상관가의 원한은 상관명이 죽은 뒤 말끔히 청산했습니다. 여기에 온 건 마마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그는 황후의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해처럼 흠모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저는 마마의 반평생을 지켰습니다. 지금,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러 가려고 합니다.”
위연은 말을 마치고 일어서서 읍한 뒤 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네는 나를 반평생 지켰으면서 지금껏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가?!”
뒤에서 황후의 외침이 들렸다.
위연은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단호하게 떠났다.
궁벽 안, 어디서 불어왔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청포를 날리고 그의 희끗희끗한 귀밑머리를 흩뜨렸다.
봉서궁 밖엔 긴 길이 있었고, 양옆에는 높고 큰 붉은 담장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침묵하며 앞으로 걷다가 마침내 이 길을 전부 걸었고, 자신의 반평생도 전부 걸었다.
올해, 세상의 끝에서 희끗희끗한 양쪽 귀밑머리에 꽃이 피었다.
* * *
임안은 불타는 듯한 붉은 치마 차림으로 수행 궁녀 둘과 소음궁 시위를 데리고 문연각을 향해 걸어갔다.
“엇, 위연이 어째서 궁에 들어왔지?”
임안은 먼 곳에서 청의가 후궁 방향에서 나오는 걸 보고선 호기심에 한 마디 중얼거렸다.
그녀는 줄곧 위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위연은 사황자의 믿을 만한 버팀목이었는데, 사황자는 태자의 가장 큰 위협이다.
그녀는 허칠안을 만난 이후에야 위연에게 아주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 이는 순전히 허칠안 때문이었다.
임안은 위연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일을 지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연각을 향해 걸어갔다.
문연각에는 총 7개의 각루가 있었는데 황실의 장서각이었다. 그곳에 소장된 책은 풍부하고 다양했다.
임안은 정확히 세 번째 각루로 들어가 문연각 관리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를 불러 말했다.
“본 공주가 경성 용맥에 관련된 책을 보려고 하니 네가 가서 찾아오거라.”
그녀는 명색이 공주로서 책의 바다에서 직접 책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도와줄 관리인이 있었다.
임안은 용맥과 관련된 책을 얻었다. 그러고는 다시 길을 돌려 여섯 번째 각루에 가서 마찬가지로 관리원을 불러 분부했다.
“본 공주가 초대 평원백의 자료를 열람하고자 한다.”
관리원은 이내 초대 평원백의 해당 권종을 찾아왔다.
이번에 임안은 서적을 빌려가지 않고 펼쳐서 보았다. 초대 평원백은 170년 전의 인물로 본래는 북방의 장수였는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나중에 봉작되었다.
“평원백 저택이 황제의 하사품이군…….”
임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 * *
한밤중 내성, 황성과 인접한 어느 구역의 평원백 저택은 아주 고요했다. 저택 문에는 봉인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평원백 일가가 항혜에게 전멸당한 뒤 이 저택은 조정에서 회수하였다.
사실, 당시 평원백에게는 밖에서 유쾌하게 떠돌던 서자가 둘 있었다. 그들은 저택에 있지 않았기에 급습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다만, 서자는 작위를 계승할 권리가 없기에 당연히 황제가 하사한 이 저택을 계승할 권리도 없었다.
검은 그림자가 지붕에서 멀리 바라보는 야경꾼을 여유롭게 피하고, 순찰하는 어도위를 피했다. 그림자는 야경꾼이 조망을 끝낸 틈을 타 재빨리 담을 넘어 평원백 저택에 잠입하였다.
검은 그림자는 움직이기 편한, 몸에 꽉 끼는 야행의(夜行衣)를 입고 있었다. 매끄러운 곡선이 드러났다.
남자는 이렇게 과장된 가슴 근육이 있을 수가 없었고, 이렇게 가느다란 허리가 있을 리도 없었다. 따라서 검은 그림자는 여자 도적임이 틀림없었다.
평원백 저택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검은 그림자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담에 붙어 질주하였다. 그 과정 중에 그녀는 품에서 손으로 그린 용맥 흐름도와 사천감의 팔괘풍수판을 꺼냈다.
가늘게 뜬 아름다운 눈동자, 칼 같은 눈빛. 그녀는 어둑어둑한 달빛을 받아 용맥 흐름도를 관찰하면서 손에 든 풍수판을 살폈다.
그녀는 조금씩 대조하고 분석하다가 드디어 목적지인 뒤뜰 화원에 이르렀다.
평원백 저택의 뒤뜰 화원 구조는 독특했다. 규모가 작지 않은 석가산이 세워져 있었는데 관리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까닭에 잡초가 무성하고 아주 황량해 보였다.
검은 그림자는 가볍게 뛰어올라 석가산 위를 밟았다. 그녀는 일각 정도를 내려다보더니 소리 소문 없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고는 고정된 몇몇 석가산 근처에서 한참을 수색하였다.
그녀는 마지막 목표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수확이 생겼다. 한 장(丈) 높이의 석가산은 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석가산을 가볍게 두드리니 공허한 메아리를 냈다.
그녀는 석가산 사이를 오고 가면서 단서를 찾았는데, 갑자기 손을 뻗어 어느 지점을 눌렀다.
‘철컥’ 소리와 함께 석가산의 측면이 저절로 미끄러지면서 아래로 기운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 * *
야행의를 입은 ‘여도적’은 경계하며 한참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칠흑같이 어두운 지하 동굴로 뚫고 들어갔다.
“후!”
어둠 속, 그녀가 가볍게 숨을 내뱉자 불똥이 튀면서 불꽃이 잠잠하게 타올랐다.
등불이 내뿜는 주황색 빛은 주위의 어둠을 몰아냈다. 그녀는 등불을 들고 동굴 벽을 몇 차례 관찰하였다. 인공적으로 판 흔적이 아주 뚜렷했다.
검은 옷의 여인이 한가한 손을 허리춤으로 뻗었다. 그곳에는 짧은 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그녀는 짧은 칼을 천천히 칼집에서 꺼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불꽃 빛이 칼날을 밝게 비추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나타나 빛을 삼켰다.
이 무기는 묵아(墨牙)라고 했다. 철과 검은 비늘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을 주재료로 하여 한 달 동안 정제한 것으로 사천감 송경이 가장 자랑하는 작품 중 하나였다.
이밖에도 위대한 진법사 양천환이 직접 묵아에 진법을 새겨 절세 신병 아래 가장 최상급의 법기 중 하나로 만들었다.
묵아에는 진법이 3중으로 쳐져 있었다. 첫 번째 진법은 칼날을 날카롭게 만들어 아주 잘 들게 했다. 두 번째 진법은 칼 몸체의 강인함을 강화하였다. 설령 4품 무사라고 해도 손쉽게 부술 수 없었다. 세 번째 진법을 통해서는 짧은 거리를 순간 이동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근거리에서 습격하여 죽이기에 아주 적합했다.
검은 옷의 여인은 한 손으로 등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묵아를 거꾸로 쥔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가는 길에 매복을 맞닥뜨리지 않았다. 지하 동굴의 복도는 길지 않아 얼마 안 돼 끝이 보였다. 끝에는 돌방이 있었다.
이 돌방 내부 장식은 아주 간단했다. 가운데에 맷돌 같은 석판이 있었다. 좌우로 지름이 두 장(丈)인데 석판에는 비뚤어진 부문(符文)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돌벽 위에는 기름 그릇이 끼워 넣어져 있었다.
이 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