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고작?
남강 천고부의 구름 송이는 고운 빛깔을 띠는데 거기에는 독기와 장기(瘴氣)가 섞여 있었다. 남강의 밀림은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는 살기가 남몰래 감춰져 있었다.
오랜 세월 전, 고신은 극연에 깊이 잠들었다. 그때 이후로 남강은 독충과 맹수의 낙원이 되었다.
천성이 강인한 인류는 환경에 굴복하고, 환경에 적응하고, 환경을 지배하였다. 대대로 계승하다가 고족이 탄생했다.
남강에는 인족 부락이 아주 많은데 고족은 가장 특수한 종족이었다. 그들은 극연 근처에서 생활하며 고충을 동료로 삼아 고신의 힘을 이용하여 특수한 수행 체계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독술사!
이날 극연에서 또 무시무시한 비명이 들려왔다. 무의식적인 비명이었다.
울부짖는 소리는 마치 지옥에서 온 듯 경미한 지표면의 진동을 동반하였다.
극연을 중심으로 주위 수백 리에 걸쳐 모든 고충이 거칠고 불안정해졌다. 마치 천적을 맞닥뜨린 듯 빽빽한 밀림 속,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작은 고충들이 툭툭 떨어지더니 잇따라 변사했다.
고족의 고충 역시 난폭해지더니 역으로 주인을 공격하였다. 다행히 고족은 이미 한 차례 교훈을 얻었던 적이 있기에 대처가 급작스럽긴 했지만,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고부의 용도는 발광하는 고충을 쳐서 기절시킨 뒤, 족인을 데리고 혼란을 수습했다. 그는 북방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딸을 떠올렸다.
그는 리나가 대봉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총명하니 틀림없이 대봉에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잘 어울릴 수 있을 것이었다.
수십 리 밖, 천고 할머니 역시 북방을 바라보았다.
“유가 성인의 힘이 점점 없어지고 있구나. 무신이 만약 곤경에서 벗어나면 다음은 바로 고신인데……. 에휴, 무도에는 언제 품계를 초월하는 존재가 나올 수 있을까?”
천고 할머니는 깊은 시름에 빠져 생각했다.
“네가 반드시 칠절고를 잘 보관해야 한다, 리나.”
* * *
해가 진 후, 허칠안은 약속한 대로 천향거에 이르렀다. 배만서루는 황선아를 데리고 주루 입구에 서서 오랫동안 공손히 기다렸다.
세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대청 안 별실로 들어가 술잔을 기울였다.
황선아는 특별히 북방식 복식을 갖추었다.
그녀는 탁자에 단정하게 앉을 때 허리를 곧게 폈다. 그러고는 양쪽 허리를 보일락말락 하며 허칠안을 유혹했다.
황선아는 처음에 자신이 선녀처럼 아름답지만, 허 은라처럼 여색에 흔들리지 않는 좋은 남자를 앞에 두었으니 대봉 숙녀로 계속 위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숙녀’답게 허칠안을 침상 위로 꾀어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치장을 바꿔 본 모습으로 돌아감으로써, 북방 미인의 이국적인 분위기로 허칠안을 흔들고자 했다.
어차피 이는 남녀 간의 일이지 않은가. 상대가 주동적이든 내가 주동적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맥 빠지게 한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허칠안이 마치 미색에 막강한 면역력을 가진 듯 굴었다는 것이었다. 요조숙녀든 이국적인 분위기의 미인이든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남자였다면 진작에 그녀의 유혹에 넋이 나갔을 터였다.
그는 꼼짝하지도 않았으며 조금도 ‘피가 끓지’ 않는 눈치였다.
황선아가 배만서루에게 눈짓하자 그가 바로 말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미 야간 통행 금지 시간이니, 주루에서 쉬시지요. 제가 이미 공자님을 위해 곁채를 잡아두었습니다.”
황선아가 즉시 말했다.
“제가 허 공자님을 데리고 가지요.”
* * *
세 사람은 즉시 별실을 나섰고, 황선아는 허칠안을 데리고 객실 방향으로 걸어가 문을 젖히고 들어갔다.
호화롭게 꾸민 방 안, 작은 청 내부에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작은 청을 지나야 침실이었다.
황선아는 돌아서서 문을 닫고 빙그레 웃었다.
“허 공자님, 방금 마음껏 마시지 못했으니 저와 함께 몇 잔 더 기울이시는 게 어때요?”
그녀는 몰래 허칠안을 살폈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바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기뻐하였다. 거절하지 않는다는 말은 기회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휘어잡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팔을 껴안은 채 탁자 곁으로 가서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허 공자님, 저는 공자님을 흠모한 지 이미 오래여요. 공자님과 같은 탁자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니 제가 오랫동안 쌓은 복인가 봐요…….”
술잔을 든 황선아의 몽롱한 눈길은 나긋나긋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허칠안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막 술잔을 받치고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황선아의 작은 손이 떨리더니 실수로 술을 가슴에 쏟는 걸 보았다.
미인의 피부는 희고 매끄러웠다. 촛불 빛이 술에 젖은 피부를 비추자 피부조차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술이 차츰 스며들자 풍경이 달라졌다.
허칠안은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눈을 뗐다. 그는 그녀를 무례하게 쳐다보아서는 안 됐다.
‘참으로 성인군자구나…….’
황선아는 입술을 깨물고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을 했다.
“아이고, 어떡하지요? 제 옷이 다 젖었어요. 허 공자님, 저 좀 닦아주세요.”
“이, 이러지 마시오…….”
허칠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좀 닦아 주세요.”
황선아는 수줍음을 머금은 얼굴을 들고 주눅이 든 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술을 마셨다. 뺨에는 분홍빛 홍조를 띠었고, 입술은 빛깔이 선명했으며 여우 같은 두 눈은 사람 마음을 간지럽게 유혹했다.
“좋소.”
갑자기 허칠안이 태세를 전환하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들고 쪽 입 맞추었다.
황선아는 어리둥절하여 얼굴이 다소 경직되었다. 그녀는 확실히 그의 태도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멍하니 입을 뗐다.
“허 공자님?”
“말하지 말고, 입 벌리시오!”
* * *
이튿날, 이른 아침.
눈두덩이가 부은 황선아는 벽을 짚고 약간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걷다가 이따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마침 다른 편 복도에서 나오는 배만서루를 만났다. 백발의 배만서루는 그녀의 낭패한 모습을 반복해서 살피더니 주저하며 말했다.
“마님이라고 외치면서 용서를 빌게 할 거라고 얘기하지 않았나? 자네, 고작?”
황선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하, 이 몸이 당했어…….”
* * *
허칠안은 애지중지하는 암말을 타고 아침 햇살을 맞으며 다그닥다그닥 허부로 갔다.
그는 상쾌한 기분이 되어 진심으로 감탄했다.
“요녀의 맛, 정말 괜찮구먼!”
* * *
그는 허부에 돌아온 뒤 오전 내내 《천지일도참》에 몇 가지 묘수를 섞은 도의를 연습하였다.
그는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처마 위에 누워 태양을 내리쬐며 얕은 잠을 청했다.
그는 어젯밤에 여의봉을 써서 그 호녀를 밤새도록 제압하였다.
요녀는 너무 비통한 나머지 울부짖으며 용서를 빌었지만, 결국 대봉의 허 은라가 이겼다.
하지만 이 싸움으로 허 은라 역시 원기에 큰 손상을 입었으므로 잠시 쪽잠을 자서 정기를 모아야 했다.
세상에 요녀는 수천만이었으니, 마도를 없애고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야말로 정의 사도의 책임이었다.
종리는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따금 이렇게 몸매를 드러내는 자세로 앉을 때야 성숙한 여성의 매력이 드러나곤 했다. 그녀는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네의 의(意)가 난관에 빠진 듯하군.”
종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저는 역시 사저네요. 겉으로는 가련한 척하면서 제 동정심과 애정을 얻지만, 사실 아주 믿을 만한 선배예요. 높은 안목을 지니고 한 마디로 정곡을 찌르잖아요.”
허칠안은 눈을 감고 쪽잠을 자려 하며 탄식했다.
“무슨, 자네가 말한 것과 같지 않아.”
종리는 울적하게 말했다.
허칠안은 깜짝 놀라더니 몸을 돌리고 일어나 앉아 반짝이는 눈으로 추궁했다.
“말해보세요. 사저의 첫 번째 남자가 누구예요?”
종리는 얼이 빠져 그를 쳐다보았다.
“어?”
그녀는 억울해하며 설명했다.
“나는 자네의 동정 그리고…… 애정을 얻으려고 한 적이 없어.”
허칠안은 안심하고 다시 누웠다.
“아, 사저가 말한 건 그거군요.”
‘당신이 높은 안목을 지니고 한 마디로 정곡을 찌르는 사저기만 하면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예요.’
종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당혹감에 잠겼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기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했다.
“내가 비록 술사지만, 무사의 일을 좀 알지. 무사가 수행하는 건 의(意)로, 이는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네. 결코, 일 년 내내 칼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반드시 도의를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네. 검을 부린다고 해서 검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도 아니야. 자네가 ‘의(意)’를 깨닫고 싶으면 우선 자신이 왜 칼을 쓰는지 깨달아야 하네. 자네가 칼에 얼마나 애정을 쏟고 있는지, 자네가 현세에 칼을 벗으로 삼길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말이야.”
허칠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원치 않습니다. 저는 이생에 예쁜 여인과 함께하길 바라지요. 또 만약 가능하다면, 수적으로 제한받지 않기를 바라요.”
종리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자네의 ‘의(意)’는 여러 종류의 절학과 어우러져 있는데 이건 가장 수행하기 어려운 의(意)네. 그건 《천지일도참》을 근간으로 하지만, 천지일도참은 그것의 정신이 아니야. 자네는 간단명료한 정신이 필요하네.”
‘간단명료한 정신? 기루 정신 아니면 색마의 영혼?’
허칠안이 물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종리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내가 무사도 아닌데.”
‘무사도 아니면서 이렇게 한참을 달달 볶다니…….’
허칠안은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그는 분명히 손바닥에 힘을 싣지 않았는데 종리는 마치 누군가가 호되게 밀친 듯 와당탕 미끄러졌다. 그녀는 처마에서 미끄러져 기와 위에서 데굴데굴 여러 바퀴 구르더니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사저, 사저……. 고의가 아니에요!”
허칠안은 아연실색했다.
종리는 끙끙대며 일어나 참지 못하고 삼베 장포를 꽉 여몄다. 얼음같이 차디찬 이 세계에 장포만이 실오라기 같은 따스함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 * *
점심 식사를 마치고, 허칠안은 마침 정원에서 허영음과 오목을 두던 중 갑자기 익숙한 두근거림을 감지했다. 그는 곁에 있는 어리석은 어린 여동생을 의식하지 않고 별다른 심리적 장벽 없이 지서 파편을 꺼냈다.
그는 전서를 살폈다.
[사: 우리 쪽에 상황이 좀 생겼네. 아무래도 여러분과 협력하여 항원과 원경제 사건을 계속해서 조사할 수 없을 듯하네.]
허칠안은 가슴이 덜컥하여 전서로 말했다.
[삼: 경성을 떠나려는가?]
이는 아주 간단한 추리였다. 항원을 찾든 원경제를 조사하든 대단히 긴박하고 절박한 일은 아니었다. 먼저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초원진이 이렇게 얘기하는 건 한 가지 가능성뿐이었다. 그는 조만간 경성을 떠나 당분간은 경성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사: 그렇네. 야경꾼 관아의 강율중이 오늘 아침 나를 찾아와 위연이 내가 군대를 따라 출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더군.]
만약 지서 파편에 문장 부호를 나타낼 수 있다면, 허칠안은 지금 일련의 물음표를 친 다음에 발송할 테였다!
‘초원진은 군사를 이끌고 싸운 경험이 전혀 없는데 위 공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 위연이 정말 군신인가? 자네더러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라고 하다니. 차라리 나더러 가라고 하는 게 낫겠군. 나는 적어도 운주에서 군대를 인솔하여 비적을 토벌한 적이 있지 않은가.]
‘알고 보니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군…….’
허칠안은 아주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