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제압
두 사람은 한담을 나누면서 허씨 저택을 둘러보았다. 왕사모는 이번에 구경하면서 저택에 아주 만족하였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이곳에 산다고 해도 창피하지 않겠다고 여겼다.
유일한 문제는…….
“저택의 시위가 좀 적은 것 같구나.”
왕사모는 일부러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든 큰 오라버니든 작은 오라버니든 딱히 심복인 부하가 없어요. 그래서 수행원만 고용했고, 시위는 없어요.”
허영월이 설명했다.
왕사모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집을 지키는 시위는 반드시 심복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선 공공 제물을 훔치는 일을 벌이기가 쉬웠다. 게다가 남자 주인은 항상 저택에 있을 수 없었기에 저택의 안식구가 꽃처럼 아름다우면 더욱 위험했다.
‘이러면 방어력이 좀 약한데…….’
왕사모는 남몰래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왕부 시위를 데리고 올 수 있다지만, 이런 행위는 무사한테 불안정한 요소가 될 게 분명했다. 동시에 일종의 도발이 되기도 했다.
허영월이 탄식하며 말했다.
“허가(許家)는 기반이 얕아요. 이 역시 도리가 없는 일이지요.”
허영월은 말을 하면서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왕 소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역시나 눈꼬리를 살짝 찌푸리는 걸 보고 허영월은 아름답게 웃었다.
이때 왕사모는 허영월의 규방을 지나치던 중 그쪽을 무심결에 쳐다봤다가 갑자기 멍해졌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보았다. 천종 성녀였다!
‘그녀가 왜 허부에 있는 거지? 그녀가 어째서 허부에 있는 거지?!’
왕사모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대범하게 예를 갖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를 뵙습니다.”
이묘진 역시 그녀가 허신년의 연인임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왕 소저.”
명색이 천종 성녀, 비연 여협객인 이묘진은 그래도 허세가 있었다. 이런 태도는 전혀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강호 고수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여협객다웠다.
왕사모는 기세를 몰아 방에 들어갔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일을 하는 소소를 곁눈질로 힐끗 보더니 속으로 매우 의아해했다. 이 흰 치마 여인의 자태는 정말이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게다가 이묘진……. 허씨 집안에 절세 미인이 이렇게 많았다니?’
왕사모는 속으로 남몰래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심지어는 미소까지 머금었다.
“성녀께서도 저택 손님으로 오셨나요?”
이묘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는 허부에서 머문 지 몇 달 됐습니다.”
‘허부에서 몇 달 동안 묵었다고……. 그녀가 허부의 객경인가?’
왕사모는 문득 깨달았다. 어쩐지 허부에 시위가 필요 없다더라니. 이러면 당연히 필요 없었겠지.
여기엔 놀라운 힘을 지진 남강 고족의 소녀, 천종 성녀 이묘진, 어도위 백호 허평지 그리고 천인 양종을 힘으로 제압한 허 은라가 있었다.
설사 그녀의 왕부라고 하더라도 이런 첨단 전투력이 없었는데, 어디 보통 시위가 필요하겠는가?
‘허부는 비록 관리 사회에서의 기반이 얕지만, 강호의 어떤 방면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기반이 두텁구나…….’
왕사모는 속으로 말했다. 그녀는 이 방면에서는 만족하였다.
그녀는 소소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 언니는…….”
이묘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소소라고 합니다, 제 언니지요.”
그녀는 친하지 않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소소를 여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소소 낭자, 안녕하세요.”
왕사모는 친절하게 인사하였다.
“소소 낭자 바느질 솜씨가 정말 능숙하네요. 저보다 훨씬 잘하세요.”
소소는 미소를 지었다.
“저는 출신이 미천해 장차 시집을 간다고 해도 첩 노릇밖에 할 수 없으니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왕 소저가 부럽습니다. 고귀한 신분이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잖아요.”
‘시작했다, 시작했어…….’
허영월은 눈을 반짝였다. 왕사모를 이쪽으로 데리고 온 보람이 있었다.
‘소소 낭자가 나한테 적의를 품은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를 처음 본다고!’
왕사모의 눈동자가 수축했다. 그녀는 이 소소라는 낭자가 신년을 흠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대담하게 추측했다.
‘그녀는 자신이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첩 노릇을 한다는 말을 내뱉은 거야. 자신을 지지해 주는 천종 성녀를 등에 업고, 겉으로는 약한 척하면서 말로 나를 자극한 거지…….’
왕사모는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런 익숙한 상황을 마주하자 주 무대로 돌아온 듯 허씨 집안 안주인의 ‘트라우마’에서 잠시 벗어났다.
왕씨 집안 소저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첩은 첩의 고충이 있고, 본처 역시 본처의 애환이 있으니 언니는 스스로 원망하고 한탄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 어떤 이치는 변하지 않아요. 지위가 높을수록 능력도 뛰어나야 하지요. 그러므로 결국에는 평민, 첩이 되는 편이 살기 가장 수월한 것 같아요. 맞죠? 소소 언니.”
소소가 의아해했다.
“그래요? 내가 보기에 허 부인은 아주 즐겁게 살던데요. 남편이 총애하고, 자식이 효도하니까요. 하지만 왕 소저는 명문가 출신이니 당연히 다르겠지요.”
‘아닌 척하면서 나를 헐뜯고 있잖아……?’
왕 소저가 속으로 말했다.
이묘진은 옆에서 구경했다. 소소와 왕씨 집안 소저는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으면서 괴상 야릇한 말을 해댔다. 두 사람 모두 집안싸움의 거장급 고수로, 날카로운 말을 평온한 우스갯소리에 숨겼다.
그들의 심리 상태 역시 늙은 개처럼 차분했으며, 그들은 조금도 분노를 내비치지 않았다. 이는 장기전이 될 게 뻔했다.
이묘진은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기에 흥미진진하게 관전했다. 다만 좀 의구심이 들었다. 왕사모는 허신년의 연인이고, 소소는 허칠안의 정부인데 이 두 사람이 뭐 때문에 말싸움을 하는 걸까?
그녀는 또 허영월을 쳐다보았다. 허씨 집안 여동생은 순진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옆에 앉아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의 대전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연약한 새끼 양이 가장 위험한 법이지…….’
이묘진은 개탄하다가 갑자기 지붕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발소리를 감지하였다.
그녀는 눈을 희번덕였다. 허칠안도 구경하러 왔다…….
‘이 망할 놈!’
이묘진은 시선을 돌렸다. 그녀 옆에서 불이 붙었기 때문에 머리 꼭대기에 있는 자식이 너무 한가로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기회를 틈타 끼어들더니 웃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소소 언니는 가정 형편이 처참합니다. 몇 년 전에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저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이번에 경성에 오더니 그녀가 가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왕사모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어? 안 간다고요?”
‘이 천한 계집이 정말 허신년의 첩 노릇을 하고 싶은가? 허신년이 분명히 집에 첩실이 없다고 말했는데. 허, 확실히 첩실이 없긴 하네. 왜냐하면 정식으로 첩을 두지 않았으니까! 이 거짓말쟁이가!’
왕사모는 가슴이 갑자기 철렁했다.
이묘진이 말을 이어갔다.
“소소와 허칠안이 서로 감정이 통해 저는 소소를 허부에 남겨둘 계획입니다. 그녀는 본처의 자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첩이면 되거든요.”
‘아! 허칠안의 첩이라고? 그럼 괜찮지.’
왕사모는 새로운 희망이 생기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우호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 큰오라버니랑 서로 감정이 통했구나…….’
허영월의 눈에도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녀는 거짓 웃음을 지었다.
“소소 언니, 정말 잘 속였네요. 저는 지금까지 언니와 우리 큰 오라버니가 서로 감정이 통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정말 잘됐어요. 부향 낭자가 병으로 죽은 뒤 큰 오라버니는 늘 울적해 있었거든요. 잘됐어요. 소소 언니가 생겼으니 틀림없이 큰 오라버니는 점점 즐거워질 거예요.”
‘지금 나를 기녀와 비교하는 거니……?’
소소는 허영월을 쳐다보았다.
이묘진은 미세한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었다. 허칠안은 살그머니 왔다가 다시 슬그머니 가버렸다.
‘영문도 모르는 불이 내 몸에 붙었잖아. 영월의 성격으로는 아마 내 옷 속에 바늘을 숨기려 하지는 않을 거야……. 안 되겠어. 숙모가 자유자재로 행동하게 둬서는 안 돼. 나는 그녀가 매달린 채 맞는 걸 봐야겠어. 사람은 초심을 지켜야 해…….’
허칠안은 정색한 채로 성큼성큼 내청으로 걸어갔다.
* * *
숙모는 구리 주전자를 들고 허리를 굽힌 채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화분에 물을 주었다.
“콜록콜록!”
허칠안은 기침 소리를 내어 숙모의 주의를 끌더니 말했다.
“숙모, 제가 방금 영월이 왕 소저를 데리고 바느질하러 가는 걸 봤어요. 그녀도 참 그래요. 왕 소저는 손님으로 온 건데 어찌 일을 시킬 수 있어요?”
숙모는 듣자마자 화를 냈다.
“그게 무슨 짓이니? 영월 이 계집애도 영음보다 똑똑하지는 않단 말이지. 그릇이 너무 작아. 매일 일할 줄만 알고. 장차 시집가면 미래 시어머니가 여종으로 삼고 부리지 않아야 할 텐데. 왕 소저는 재상의 소저인데 그녀를 데리고 바느질을 한다는 게 대체 어찌 된 일이니? 화가 나 죽겠구나!”
숙모는 말을 마친 순간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덧붙였다.
“칠안아, 집안에 유리잔이 없는 듯하구나. 가장 평범한 자기 접시와 자기 잔뿐이란다.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이르니 좀 사다 주겠니?”
숙모는 좋은 말로 상의하였다.
“유리잔 몇 개 있으면 우리 집 체면이 더 서지 않겠니? 왕씨 집안 소저가 얕보게 해서는 안 되잖니.”
“알겠어요, 알겠어. 숙모 얼른 가세요.”
허칠안이 재촉했다.
숙모는 빠른 걸음으로 나섰다.
‘숙모 파이팅, 숙모 안녕히 가세요…….’
허칠안은 숙모의 매혹적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잔을 사려면 갔다가 돌아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면 그는 숙모가 제왕의 전투에 난입하여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지 못할 터였다.
허칠안은 고민하더니 옥석경을 꺼내 조국공 사택 소유의 용혈(龍血) 유리 옥잔을 탁자 위에 두었다.
그리고 그는 상서로운 조짐을 나타내는 자기 항아리와 청화(靑花) 도자기 접시 몇 개를 꺼내서 주방에 보내어 취사부들이 요리를 담도록 했다.
* * *
다른 한편, 숙모는 종종걸음으로 부리나케 딸의 규방에 들어갔다.
이곳의 분위기는 이미 좀 팽팽하였다. 여인 셋이 은근히 경쟁하며 마치 절세 고수가 내력을 겨루는 듯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들 중 누구도 상대를 어찌할 수 없었다.
“공연히 무슨 바느질을 하니?”
숙모가 방에 들어가자 순간 경직된 분위기가 깨졌다. 절세 고수가 밖으로 내뿜던 내력이 조수처럼 밀려났다.
“온종일 이런 일만 할 줄 알다니. 너도 이제는 허부의 소저니 신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이해했니?”
숙모가 딸을 꾸짖었다.
“어머니, 알겠어요.”
허영월은 고개를 숙였다.
소소는 미소를 지으며 허 부인을 부르더니 ‘발톱과 이빨’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장포를 꿰맸다.
‘그녀가 오자마자 영월과 소소를 제압했다…….’
왕사모는 이를 눈에 담고 마음으로 굴복했다. 그녀가 저택에 있을 때 모친이 그녀에게 뭐라고 하면, 그녀는 모친이 대답할 말이 없게끔 반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허영월과 소소가 허씨 집안 안주인 앞에서 완전히 제압당한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말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숙모는 왕사모가 바느질하지 않은 걸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기왕 왔으니 앉아서 얘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근사근하게 설명했다.
“전부 제 탓이에요. 제가 평소에 바깥의 점포와 논밭 그리고 사천감 쪽의 배당금을 관리하기 귀찮아해서 전부 영월이 관리하거든요. 그녀가 매일 쉴새 없이 바쁘다 보니 습관이 된 거예요.”
‘왔다, 왔어. 그녀가 나를 자극하기 시작했어……. 내가 앞으로 집안의 장부를 관리하고 싶으면 먼저 허영월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한다는 의미로군…….’
왕사모는 남몰래 헤아렸다.
숙모가 온 뒤로 방 안에 화목해졌다.
허칠안은 지붕에 서서 방 안에 있는 여인들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저도 모르게 왕사모에게 탄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성을 아주 잘 억제하였다. 그녀는 완전히 자신을 온순한 대갓집 규수로 보이도록 연기함으로써 숙모와 가족에게 악의가 없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
역시 그녀는 왕 재상 댁의 소저답게 능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