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599화 (577/712)

599화. 일호의 주도권

초원진이 분석했다.

[사: 만약 감정조차 용맥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면, 회왕 밀정이 용맥을 빌려 토둔하기란 더욱 불가능한데. 내 생각이 틀렸나?]

추측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허칠안조차도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바로 이때, 일호가 갑자기 말했다.

[일: 항원의 일은 내가 조사해보겠네. 내게 맡기면 내가 책임지겠네. 자네들 아무도 신경 쓸 필요 없어.]

‘엇, 일호가 이렇게 자발적이라니. 이건 그(그녀)의 성격과 맞지 않는데…….’

허칠안은 깜짝 놀랐다.

일호는 지서 파편 소지자들 중, 가장 소극적이고 신분이 가장 신비로웠다. 칠호와 팔호가 얼굴을 비출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유독 일호는 극히 드물게 얼굴을 비추며 가끔 토론에 참여하였지만, 딱 그뿐이었다.

지금껏 일호는 지서 파편 소지자들과 오프라인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천지회 구성원들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일호가 이렇게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라니? 이런 행동은 일호의 평소 태도와 맞지 않았다.

[일: 천지회 안에 나를 제외하고 황성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자는 없네. 나는 방법까지 생각하면 궁에 들어갈 수도 있어. 항원이든 지하도든 내가 자네들보다 내가 접근하는 편이 더 유리하고 더 안전하네. 물론,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네들에게 도움을 청할 걸세. 다들 거절하지 않길 바라네.]

이 이유는 합리적이라서 아주 쉽게 사람들을 설득시켰다. 또한, 허칠안 등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지금의 황성과 황궁은 그들에게 금지 구역과도 같았다. 허칠안이 살금살금 황성에 몰래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그는 회경과 임안 곁에서 동행할 수밖에 없었기에 단독 행동할 수 있는 조건이 부족했다.

‘마침 이번 기회에 일호의 능력과 그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겠군…….’

초원진이 속으로 생각했다.

‘일호가 자유롭게 황성을 드나들 수 있고, 심지어 궁에 들어갈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은 그의 신분이 높다는 의미인데. 제공 중 한 명인가? 종실 혹은 훈귀?’

이묘진은 속으로 짐작했다.

‘후, 항원 대사의 일을 드디어 처리할 사람이 생겼군. 그럼 안심이 된다. 자야지, 자야지…….’

리나는 기쁘게 생각했다.

* * *

그 후 이틀 동안, 조정과 요족 및 오랑캐 사절단은 수차례 협상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양측은 한동안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허칠안은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지냈으니 이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요 며칠 미망인의 작은 뜰로 피신했다. 문회 일 이후로, 각계 지식인이 끊임없이 허부로 쪽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그를 찾아오고 싶어 했으며 어떤 이는 그와 술 약속을 잡고 싶어 했다. 또 어떤 이는 집안의 딸이나 여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에 사주팔자까지 같이 가져왔다.

불문과 두법할 때도 물론 허칠안의 명성은 자자했지만, 지식인은 그에게 편견을 지녔기에 완전히 ‘내 사람’으로 삼지는 않았다.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 후, 조위가 조당에서 허칠안이 그의 제자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자 허칠안은 정식적으로 지식인들의 눈에 ‘내 사람’이 되었다. 다만, 그때 원경제가 화가 난 상태라 그들은 감히 허칠안한테 친근하게 굴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문회 파동 후, 허칠안은 인기인이 되었다.

이것들은 전부 작은 문제였다. 정말 그가 집에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운록서원의 몇몇 대유 때문이었다.

그저께는 바람이 크게 불었다. 허칠안은 눈꺼풀에 경련이 났다.

조위 원장이 왔다. 풀을 먹여 하얀 유삼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견유(犬儒) 차림이었다.

허칠안은 명목상의 스승을 대청 안으로 공손하게 안내한 뒤 좋은 차를 대접하며 잡담을 나누었다. 조위가 물었다.

“칠안이 뜻밖에도 병법에 능하였다니. 그 병서를 베껴 쓴 책이 더 있는가?”

조위는 책을 보러 온 김에 병서를 서원의 장서각에 수록하고 싶었다.

‘베껴 쓴 건 없는데……. 나 이제 좀 놀고 싶다.’

허칠안은 4개월 동안 여색에 가까이하지 않은 터라 아주 유감스럽게 조위를 거절했다.

바로 이때 대유 장진, 이모백, 진태가 손을 잡고 찾아왔다.

원장 조위를 보자 대유 셋은 하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를 훔치는 도둑놈!”

“제자를 훔치는 도둑놈!”

“파렴치한 늙은 도둑놈!”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퉤!”

그러자 조위 원장은 크게 화를 냈다. 그가 소매를 휘두르자 언출법수가 나왔다.

“백 리 물러나게.”

대유 셋이 소매를 휘둘렀다.

“물러나지 않습니다!”

“백 리 물러나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백 리 물러나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허칠안은 현장의 독창적인 법술 겨루기를 피해 허부를 빠져나갔다. 그가 떠나기 직전에 고개를 돌리니 숙모가 대청 안에 진열해 둔 분재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싸움에 뛰어들어 옆에 서서 말하는 허영음이 보였다.

“물러나, 물러나, 물러나…….”

이묘진은 목숨을 내걸고 이 어리석은 계집애를 구해냈다.

* * *

왕비는 아주 윤택한 삶을 살았다. 신체적인 윤택함이 아니라 정신적인 윤택함이었다.

그녀는 어떠한 구속 없이 자유로웠으며 의식주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허칠안은 그녀를 데리고 점포를 구경하거나 간식을 먹고 희곡을 보는 등 자주 외출하였다.

구색 연뿌리가 성장하는 기세는 아주 맹렬했다. 연뿌리는 이미 싹이 트기 시작했고, 또 한 마디가 더 자랐다. 허칠안은 연뿌리가 금련 도사의 뿌리보다 더 크게 자라길 기대했다.

* * *

이날 해 질 무렵, 허칠안은 기루에서 변장한 뒤 애지중지하는 암말을 타고 허부로 돌아갔다.

저녁 식사 때, 숙모가 말했다.

“내가 영월이를 시켜 왕씨 집안 소저에게 모레 저택에 놀러 오라고 했다. 집안 남자들은 비켜있어. 어머, 네 얘기하는 거야, 네 얘기. 허영음, 네가 가장 예의가 없잖니.”

먹는 모습이 조금도 점잖지 않은 허영음이 고개를 들고 의아해했다.

“사부님과 묘진 언니가 저택에 손님으로 와도 똑같은데 어머니는 왜 예의 없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게 같을 수 있니? 왕 소저는 네 둘째 오라버니의 아직 시집오지 않은 마누라잖니.”

숙모가 말했다.

“마누라가 뭐예요?”

허영음이 물었다.

숙부가 말했다.

“네 어머니가 바로 아버지의 마누라란다. 이해했니?”

허영음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녀가 제 어머니가 될 거래요?”

가족들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그들은 콩알이한테 ‘마누라’라는 명사를 설명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사실 설명하자면 확실히 복잡했다. 마누라가 명사이긴 하지만, 남자가 아내를 맞이할 때는 동사로서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이 단어는 그 안에 내포된 뜻이 지나치게 심오했으므로 여섯 살짜리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아무튼 너 좀 얌전하게 굴어, 소란 피우지 말고. 엄마가 나중에 너 데리고 원숭이 뇌 먹으러 복만루(福滿樓)에 가야겠구나.”

숙모가 말했다.

원숭이 뇌는 복만루의 간판 요리였다.

“저는 원숭이 뉘 먹고 싶어요.”

허영음은 역시나 주의를 돌렸다.

“뇌.”

“뉘.”

“…….”

숙모는 정색하고 말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콜록콜록!”

허신년은 기침 소리를 내어 경직된 분위기를 깨고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형님, 저 요즘에 또 일부를 기억했으니 밥 다 먹고 제 서재에 다녀가세요.”

허칠안은 기뻐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선황 기거록에 단서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정말 어떻게 조사해나가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면 포기하는 수밖에…….’

* * *

형제 둘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서재에 들어가 초에 불을 켜고 책상 옆에 앉았다. 허신년이 기거록을 읊으면 허칠안은 들었다.

선황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황제로, 공로도 없고 과실도 없이 승천하였다. 성격 역시 매우 온화하고, 약간 여색에 빠져 있고, 약간 정무에 태만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전임 재상 둘이 연이어 손에 대권을 쥘 수 있었다.

지금 생각건대 원경제가 권모술수가 차고 넘치고, 상호 견제에 능한 것은 대부분은 선황의 모습을 보고 교훈을 얻어서였다.

무미건조한 경청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허칠안은 꾸벅꾸벅 졸던 중 갑자기 대화 한 단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화는 대략 이러했다.

선황: 도사는 수련 경지가 심오하고, 혜안을 지닌 인물이니 일기화삼청 법술을 할 줄 알겠소?

인종 도사: 일기화삼청 법술을 논하자면 삼종 중에 지종이 제일이지요.

선황: 듣자 하니 지종은 공덕을 수련하고, 속세를 왕래하며 번개같이 나타났다가 구름처럼 사라진다고 하던데. 도사는 어떠한지 모르겠소?

인종 도사: 가능하지요!

“선황은 일기화삼청에 대해 짙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군……. 음, 선황 시기의 지종 도사는 아마 마도에 빠진 그 지종 도사겠지…….”

허칠안은 생각하다가 갑자기 몸이 떨리고 표정이 굳어졌다.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 때 지종 도사의 분신이 이에 가담하였고, 원경제와 지종 도사는 결탁하였었다. 나는 지금까지 원경제가 왜 지종 도사와 결탁했는지 줄곧 이해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지종 도사가 예전에 경성에 온 적이 있었군……. 그는 틀림없이 선황과 황자였던 원경제와 접촉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황 시기의 기거록을 찾아보는 건 옳은 일이었다. 이런 일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저 보잘것없는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보잘것없는 흔적이 인과 관계를 끌어내는 법이었다.

허칠안은 정신을 차리고 꼼꼼히 들었다. 그가 실망한 건 기거록에 선황과 지종 도사가 만났다는 정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 정보는 아예 지워졌거나, 아니면 적어도 황궁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기거랑은 황제 곁에서 함께 하지 않았다.

초가 다 타버리자 허신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뒷 내용은 제가 아직 미처 보지 못했어요.”

허칠안은 즉시 서재를 나서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이른 아침, 왕사모는 화장대 앞에 앉아 여종의 도움을 받아 지금 가장 유행하는 머리 모양을 했다. 그녀는 눈썹을 그리고, 순지(脣脂)를 바른 다음 얼굴에 진주를 간 분을 옅게 덮었으며 그 위에 연지를 조금 더 두드렸다.

짙은 화장을 한 덕에 정교하지만 요염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옅은 자색의 궁군을 입으니 단정하면서도 우아해 보였다. 값비싼 옷감과 번잡한 스타일은 고귀함을 더해 주었다.

그녀는 이렇게 단장하기까지 한 차례 심사숙고를 거쳤다.

모두가 알다시피 허씨 집안 안주인은 꾀가 깊어 헤아릴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주 고단수라 장차 왕사모의 최대 적이 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녀가 재상 적녀의 신분을 믿고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며 우쭐댄다면, 도리어 상대방에게 약점을 잡혀 패배하기 쉬웠다. 그녀는 왕사모를 가정 교육이 부족하다고 나무랄 터였다.

그녀는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평범한 길을 걸어야 했다.

“정말 기대된다…….”

그녀는 왕씨 집안의 적녀였다. 어릴 때 모친과 총애하는 첩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서녀들이 그녀와 맞서 싸우며 적녀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도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라 어엿한 소녀가 되자 난장판을 벌이던 인물들은 전부 옛사람들이 되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