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화. 천지회의 야담회 (1)
배만서루가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여인이 부족하겠나?”
황선아는 가볍게 탄식하더니 무심코 길게 뻗은 다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희고 매끈한 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어여쁘게 말했다.
“그럼 내가 직접 등판하면 되겠지?”
배만서루는 미소를 지었다.
“이 말을 기다렸다.”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급하지 않아. 요 며칠은 우선 계속해서 바쁘게 활동하자고. 가능한 한 대봉 관원들을 끌어들여 만회할 수 있는 손실을 최대한 만회하자고. 담판이 끝난 뒤에 우리 같이 전기적인 인물을 찾아가자. 현음, 너는 가면 안 돼.”
세로 눈동자 소년이 굴복하지 않고 다급하게 말했다.
“왜요?”
배만서루가 냉소를 지었다.
“허칠안은 에누리 없는 무사다. 너는 언행이 무분별하니 그를 격노하게 하면 그 자리에서 너를 베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해.”
현음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감히! 우리는 사절단이에요. 그가 감히 사절단을 벤다면, 대봉 조정이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요.”
사절단을 베는 건 양국의 담판 결렬을 의미했다. 지금은 공동으로 무신교에게 저항하고 반격하겠다고 하는 상황이니, 대봉 조정은 이런 일이 발생하게 놔두지 않을 터였다.
황선아는 현음의 머리를 찌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는 국공조차 죽였어. 네가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우리도 말리지 않아.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헤아려보렴. 촉구 주상께서 너에게 단련하라고 한 건 네게 기대를 하기 때문이야. 만약 네가 여기서 죽으면, 어르신께서도 개의치 않으실걸.”
요족은 아랫사람을 단련시키는 일에 줄곧 냉혹했다. 게다가 촉구는 뱀류라 더욱 냉혈했다.
성장시킬 수 있으면 힘껏 양성하여, 혹여라도 죽으면 안 될 재목으로 만들었다.
약육강식, 생존의 법칙이었다.
* * *
회경은 회경부 저택에 돌아온 뒤 궁녀와 시위를 물리치고 임안과 허칠안만을 응접실에 남겼다.
“역시 너야. 내가 한참을 봐도 너를 찾지 못했어. 만약 차양막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감히 네 신분을 확신하지 못했을걸.”
임안은 기쁨에 겨워 허칠안을 이끌어 그와 함께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공주님, 우리 같이 앉으면 안 돼요. 이렇게 하면 규칙에 어긋난다고요……. 그리고 제 전생의 얼굴은 집단을 놀라게 할 정도로 잘생겼는데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안면 인식 장애가 좀 심각한데요.’
허칠안이 막 이렇게 생각하자 임안이 탄복하는 얼굴로 말했다.
“너 정말 똑똑하더라. 이렇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자로 역용하니까 한 번 보면 잊는 건 둘째 치고 아예 주의를 끌지 않더라고.”
허칠안은 무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말없이 다른 탁자에 앉으러 갔다.
임안은 초롱초롱한 도화안에 억울한 기색을 드러냈다.
“병서는 위 공께서 쓴 것이고, 자네 손을 빌려 배만서루를 제압한 거지?”
회경은 차를 마시면서, 자신의 감정을 점점 더 통제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동생을 응시했다.
“그렇습니다!”
허칠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경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러면 합리적이었다. 당대에서 배만서루를 굴복시키고, 장진이 감탄해 마지않는 데다가 태부를 이렇게 흥분시킬 수 있는 병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알기로는 위연뿐이었다.
‘병서는 위연이 썼구나…….’
임안은 좀 실망했다. 그녀의 인식 속에서 개자식은 전지전능했기 때문이었다.
“병서에 뭐가 쓰여 있는지 자네는 기억하지 못할 테지.”
회경이 물었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허칠안이 고개를 저었다.
회경은 실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결국에는 병서를 볼 수 있을 테지만, 명색이 독서를 좋아하는 자로서 오래 기다리기를 원치 않았다.
‘됐어, 이따가 위 공을 만나러 가야지…….’
회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허칠안은 몇 마디 잡담을 나눈 뒤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임안은 그를 따라 같이 나왔다. 그녀는 회경부에서 나와 허칠안을 뚫어지게 주시하면서 물었다.
“병서, 정말 위연이 쓴 거야?”
허칠안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반짝반짝 빛을 내는 도화안을 쳐다보았다. 사랑스럽고 어여쁘며 매혹적인 눈동자였다.
눈은 마음의 창이자 이목구비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였다. 속되지 않은 여인은 통상적으로 영기를 사방으로 내뿜는 눈을 지녔다.
임안은 예쁜 도화안을 지녔다. 그녀가 당신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는 눈동자가 아른해져 유난히 어여쁘고 다정해졌다.
하지만 임안이 이런 눈동자로 남을 보면, 그 사람은 차마 그녀를 조롱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갈라서 선물하길 원하곤 했다.
허칠안은 본래 그녀를 놀릴 계획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병서는 제가 썼습니다. 위 공과는 무관해요.”
임안은 기뻐하며 웃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답을 얻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였다.
“그럼 왜 회경을 속였어?”
임안이 경쾌하게 깡충 뛰자 붉은색 치마가 불길처럼 휘날렸다.
“회경 마마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하여 그녀가 인정하는 건 번복하고 변경하기가 어렵지요. 게다가 전에 제가 병법 방면의 학식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병서가 위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여기는 겁니다. 사실 합리적이에요.”
허칠안이 설명하였다.
“사실은 그녀가 너를 믿지 않아서 그래. 나는 너를 믿어. 네가 뭐라고 하든 나는 다 믿어.”
임안은 득의양양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천진난만한 것도 천진난만한 대로 장점이 있어…….’
허칠안은 속으로 말했다.
만약 천진난만한 소저가 그처럼 좋은 남자를 만나면 행복할 터였다. 하지만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나면 천진난만한 소저의 마음은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농락당할 터였다.
허칠안은 여태껏 소저의 마음을 희롱한 적이 없었다. 그는 소저의 몸을 더 좋아했다.
허칠안은 황성을 떠나기 전에 돌아서서 더 깊은 곳에 있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만약 바깥 세계에 정말 황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항원 대사는 또 무슨 비밀을 발견했길래 원경제가 야단법석을 떨며 사람을 보내 체포하도록 내몰았을까?
* * *
국자감 밖의 무대 위, 유포를 입은 서생이 무대 단상에 서서 문회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침까지 튀겨 가면서 생생하게 퍼뜨렸다.
“배만서루라는 오랑캐의 학식이 확실히 뛰어나더군. 한림원 청귀들과 천문, 지리, 경의, 책론을 논하는 데에 전혀 뒤지지 않았네. 한림원 청귀들이 속수무책인 사이에 운록서원의 대유 장진, 장진이 왔지…….”
무대 아래, 백성들은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그들은 이 순간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잇따라 웃었다.
“운록서원의 대유가 왔으니 십중팔구 아니겠어? 오랑캐가 기고만장할 수 없었겠지.”
“그러니까, 운록서원 대유의 학식이 관성루만큼 높다는 걸 누가 모르겠어.”
무대 위의 유포 서생이 고개를 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닐세. 운록서원의 장진 대유 역시 졌네. 그 오랑캐가 꺼낸 병서 한 권을 장진 대유가 보더니 진심으로 탄복할 줄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나!”
무대 아래의 백성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떠들썩한 소리가 들끓었다.
“운록서원의 대유조차 졌다고?”
“정말 오랑캐에게 졌다고? 괘씸하군. 대봉 지식인은 전부 폐물이란 말인가!”
“화가 나 죽겠군. 작년에 왔던 불문 사절단보다 더 화가 나는데.”
시정 백성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욕을 퍼부었다.
무대 위의 서생이 손을 아래로 저었다.
“여러분, 기다리게. 만약 우리가 졌다면, 내가 어찌 여기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주위에 모여 있던 백성들은 이 말을 듣자 조용해지기는커녕 도리어 점점 더 심하게 떠들어댔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시오, 빨리!”
“운록서원의 대유조차 졌는데 그럼 도대체 누가 오랑캐를 이겼단 말이오?”
국자감 서생이 웃으며 말했다.
“조급해하지 말게. 내가 하는 말을 들어보라고. 이때 한림원의 한 젊은 대인이 일어서더니 배만서루와 병법을 논하겠다고 하더군. 이 젊은 대인은 허신년이라는 자로 허 은라의 사촌 동생이지…….”
그는 허신년이 어떻게 병서를 꺼냈으며, 어떻게 배만서루를 굴복시켰는지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주위의 백성들은 이 말을 다 듣고 나서는 분발하며 갈채를 보냈다. 그들은 형이 뛰어난 만큼 아우도 평범하지 않다며, 허씨 집안 형제 둘은 전부 인재라고 칭찬하였다.
못된 취미를 가진 국자감 서생들은 일부러 멈추고 허신년을 칭찬하는 백성들을 쳐다보다가 얼추 기다린 뒤에 말머리를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
“병서를 누가 쓴 줄 아는가?”
백성들은 멈추어서 그를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국자감 서생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허 은라네, 우리 대봉의 시괴 허 은라야.”
경악이 즉시 흥분과 희열로 바뀌었다.
허칠안에 대한 국자감 서생들의 무분별한 찬양과 선전 덕에 그의 병서가 오랑캐를 굴복시켰다는 소식이 빠르게 경성을 휩쓸었다.
시정 백성들은 배만서루의 학식에 관해 결코 관심이 없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이 오랑캐가 최근에 너무 방자하게 굴었으며 국자감조차 그에게 졌다고만 알았다.
그들은 본래 운록서원의 대유가 나서서 오랑캐의 오만한 기세를 꺾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해진 소식은 운록서원의 대유 역시 졌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자 놀라면서도 화가 났다. 그들은 딱하면서도 변변치 못한 모습에 분노가 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분노가 기쁨으로 바뀌었다. 허 은라가 사촌 동생을 대신 나서게 했다. 그는 병서 한 권을 꺼내 순식간에 오랑캐를 굴복시켰다.
이는 허 은라의 전기적인 내력에 또 한 획을 더했다.
설서(說書) 선생은 탁자를 치며 훌륭하다고 소리쳤다. 그들에게 드디어 새로운 소재가 생겼다. 물론 백성들은 불문 두법과 허칠안이 홀로 반란군 팔천을 막아선 일을 듣는 걸 좋아했지만, 어쨌거나 그 일은 이미 수 차례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들은 드디어 다른 얘기들을 할 수 있었다.
* * *
허칠안과 임안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경 역시 황성을 나섰다. 회경은 극도로 호화로우면서도 제작비가 매우 비싼 마차를 타고 야경꾼 관아에 도착했다.
화려한 옷차림의 회경은 통전한 뒤 치맛자락을 잡아끌고 호기루 7층에서 위연을 만났다.
위연은 감여도 앞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여 눈여겨보더니, 돌아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마마께서 어찌 한가하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회경은 예를 갖추었다. 그녀는 위연 앞에서 공주 티를 내지 않고, 시종일관 아랫사람을 자처하였다.
“본 공주가 책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녀는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연은 탁자로 돌아와 붓을 들었다.
“제가 공주마마께 친서를 한 부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 책이 있다면 안독고에 가지러 가시면 됩니다.”
회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본 공주는 그 병서를 보고 싶습니다. 위 공, 위 공께서는 병법에 정통하시면서 지금까지 책을 편찬하여 세상에 퍼뜨리지 않으셨지요. 실로 유감스럽습니다. 지금 위 공의 병서가 세상에 나온 건 대봉의 행운입니다.”
위연은 천천히 고개를 젓더니 온화하게 말했다.
“그 병서는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아니라고?’
회경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녀는 다소 멍한 눈으로 위연을 쳐다보았다. 몇 초 후,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회복하였다. 속마음이 세찬 바닷물 같이 반응하였다.
‘병서는 정말 허칠안의 손에서 나왔구나. 그는 이렇게 병법에 정통하였으면서 왜 전에는 자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이렇게 꼭꼭 감추었을까…….’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도 그에게 다소 미운 감정이 들었다. 허칠안은 일부러 설명하지 않았고, 고의로 그녀가 위연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다.
위연이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마저도 그를 데리고 전장에 나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자는 몇 년만 연마하면 됩니다. 대봉에 또 인재가 하나 배출될 겁니다.”
회경은 마음을 가다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몰래 데리고 가시면 되지요.”
위연은 눈을 내리깔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데리고 가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