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문회 (4)
배만서루는 로호반 차양막 안에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사방을 향해 읍하였다. 그는 이겼다고 자만하지도, 졌다고 낙심하지도 않았다.
“여러분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대봉은 역시 문도가 번창한 곳이군요. 동경하는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사람들은 이 말이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그는 그들을 비웃었다.
태부는 어두운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공들은 잇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말없이 탁자에서 벗어나 떠날 작정이었다.
툭!
술잔을 탁자 위에 놓는 소리가 다소 무거워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허신년은 멋스럽게 일어나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형님의 시 중에 ‘쪼그만 놈들이 새로운 권력자가 되는 걸 참고 보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연무대에 올라 주먹을 휘두르네’라는 시가 있습니다.”
소리가 퍼져나갔다.
태부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제공들과 훈귀, 무장들이 쳐다보았다.
국자감 서생들이 쳐다보았다.
배만서루는 깜짝 놀라 도발을 건 한림원의 젊은 관원을 쳐다보았다.
허신년은 백발의 오랑캐를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본관이 그쪽과 병법을 좀 논하고자 합니다.”
이 말을 내뱉자 사방이 떠들썩해졌다.
“신년!”
한림원의 동료들이 잇따라 그에게 충동적으로 굴지 말라고 눈짓했다.
관리 사회에서 허신년의 명성은 좋았다. 전부 그가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사건 때 오문을 막아서고 회왕에게 욕을 퍼부었을 때 쌓은 명성이었다.
이 명성은 힘들여 얻은 것이었으므로, 한순간의 분노와 충동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지면 너무 애석했다.
“장 선생님이 그의 스승이고, 그조차 쳤는데 허신년은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가?”
“왜 굳이 또 망신을 당하려 하는가. 배만서루가 쓴 병서는 장 대유조차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높이 평가하였거늘.”
“우리 역시 공평하지 못함에 화가 치미네. 그저, 그저 허신년이 지나치게 무모할 뿐이지.”
국자감 서생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배만서루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의심했다. 그는 허신년을 잠깐 주시하더니 이 자가 장진의 제자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다만…… 선생도 졌는데 학생이 국면을 만회하려고 하다니?
세로 눈동자 소년 현음은 냉소를 지었다. 황선아는 극도로 따분해하며 술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재미없어.”
왕사모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허신년이 한참을 참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마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감정적인 일 처리!’
왕 재상은 마음속으로 크게 화를 냈다.
“허 대인, 훈련해 본 적 있습니까?”
배만서루가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허신년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터에 나가본 적 있습니까?”
배만서루가 또 물었다.
허신년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오랑캐 출신 지식인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대인께서 비록 병법을 전공하시지만, 탁상공론인데 어찌 저와 병법을 논하시고자 합니까?”
세로 눈동자 소년 현음이 비웃었다. 그는 이제 아예 조금도 예의를 차리지 않고 대봉인들을 깔보는 티를 팍팍 냈다.
“설마 그쪽도 병서를 쓴 건 아니겠지? 꺼내서 우리 형님과 우열을 겨뤄보려고?”
다른 사람들도 허신년이 오랑캐에게 비웃음을 사는 모습을 보자 괜히 창피해질 지경이었다.
장진은 의아해하며 자신의 득의양양한 제자를 쳐다보았다.
‘이 자식 머리가 어떻게 됐나? 선생조차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겨 부끄러워하는데 그가 튀어나와서 뭐 하려고? 나 대신 복수하려고?’
하지만 장진은 그가 좌절을 좀 겪게 해도 괜찮았다. 허신년의 생은 너무 순조로웠다. 그는 집안 환경이든 학문이든 관리 사회든 큰 좌절을 겪은 적이 없었다.
허신년이 아래턱을 치켜들고 꿋꿋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한테 정말 병서가 한 부 있습니다. 배만 형님께서 가르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
장진을 포함한 모든 이가 아주 망연한 눈빛으로 멍하니 허신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배만서루처럼 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했다.
허신년은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서 옅은 갈색 표지의 선장서(線裝書)를 꺼냈다.
배만서루는 책 표지 위에 쓰인 네 글자 <손자병법>을 보았다.
경전을 많이 읽은 그도 이 이름에는 아무런 인상이 없었다. 당대에 널리 퍼진 병서도 조정에서 막 편찬한 책도 아니었으며, 그에게 선물한 같은 주제를 귀찮을 정도로 되뇌는 병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책 이름 가지고 책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책을 받더니 미소를 지으며 훑어보았다.
“전쟁은 나라의 대사로 백성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에 관한 일이므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서두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는 전쟁의 중요성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는데 한 마디로 따끔한 경고를 하였다.
그가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그러므로 5가지 방면을 신중하게 분석하여 실제 정황을 파악해야 한다. 첫째는 도(道), 둘째는 천(天), 셋째는 지(地), 넷째는 장(將), 다섯째는 법(法)이다.”
배만서루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마음에 품었던 경멸과 관찰하는 태도를 거두었다. 이런 문구를 써낼 수 있다는 건 책을 쓴 사람이 확실히 능력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전쟁은 예측 불가다’라는 문구를 봤을 때 마침내 동요하였고, 눈동자가 약간 수축하였다.
“훌륭하다, 훌륭해! 이 말은 정말 훌륭합니다.”
배만서루는 열성적으로 읽어나갔다. 그는 점점 지식의 바다에 빠져들어 정신을 잃고 주위의 모든 것을 잊었다.
이 책은 12편으로 내용이 심오하였다. 전쟁 이론, 경험을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쟁의 규율을 결론짓기까지 했다.
이 책은 이미 책략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책의 서술은 간단한 책략 병법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보다 더 거시적이고 더 고차원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책에서 말하길 정치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순식간에 단계가 높아지자 배만서루는 정수리에 지혜를 불어넣는 듯했다.
오랑캐가 전쟁하는 건 그저 약탈하기 위함이었다. 배만서루 역시 전쟁은 전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전쟁 외적인 요소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결국 쌍방의 전투력 차이에 달렸다고 여겼다.
병서의 글자 수는 많지 않았다. 두껍디두꺼운 그의 책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글귀가 주옥같았다. 모든 문장이 한참을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었다.
그는 각 전투를 초록(抄錄)하면서 최선을 다해 세부 내용을 분석했던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그는 각종 진영을 총괄하여 병사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지만…… 결국 이 책으로 인해 패배했다.
물론 이 책 역시 흠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전편을 통틀어 무사의 역할과 무사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참 뒤 배만서루는 마침내 필사적으로 책에서 눈을 뗐다. 그는 만족스럽게 감탄했다.
“얻은 바가 꽤 많습니다, 얻은 바가 꽤 많아요…….”
이어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주위의 대봉 사람들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전부 바보가 되었다.
방금 배만서루의 일련의 표정 변화는 그들에게 ‘격렬한 기쁨’, ‘절로 나오는 감탄’, ‘갈망’ 등의 어휘를 떠올리게 했다.
사람들은 책 속에 도대체 뭐가 쓰여있길래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이런 반응을 보일까 궁금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배만서루는 허신년을 쳐다보았다. 또 손에 쥔 손자병법을 쳐다본 뒤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길게 탄식하더니 깊이 읍하였다.
“허 대인, 소생이 졌습니다. 소생,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이 책을 베껴 쓰게 해달라고 간청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소생, 제자의 예를 갖춰 대인을 선생이라고 부르길 원합니다.”
이 책은 확실히 그가 쓴 《북재병법》을 능가하였다. 고집부리는 건 의미가 없었다.
세로 눈동자 소년 현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형님…….”
이 순간, 어여쁘면서도 매혹적인 황선아의 간드러지는 얼굴에 마침내 게으르고 느슨한 자신감이 사라지면서 표정이 약간 변했다.
솥의 기름이 끓는 듯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만서루가 패배를 인정했다.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며 부끄러워했다.
게다가 허신년이 쓴 병서를 베껴 쓰기 위해 제자를 자처하였다.
훈귀, 무장들은 배만서루 손의 병서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마치 저 병서가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물건인 듯했다.
왕 재상은 허신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눈빛과 표정이 응고된 듯했다.
왕사모는 가슴이 쿵쿵쿵 미친 듯이 뛰어서, 넋을 놓은 채 장내에 우뚝 선 허신년을 바라보았다.
태부가 지팡이를 짚은 채 앞으로 두 걸음 걸어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아래로 살핀 뒤 지팡이를 두 차례 힘껏 내리쳤다.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이 자야말로 우리 대봉의 지식인이지, 이 자야말로 진정한 신예지.”
삼공주, 사공주는 눈동자에서 의외라는 빛을 내뿜으며 허신년을 바라보았다.
“허씨 집안은 정말이지 한 집안에서 쌍벽을 이루는군. 허칠안은 이미 더할 나위 없이 눈부신데 뜻밖에도 허신년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구나.”
누군가 개탄했다.
장진은 배만서루의 손에서 병서를 빼앗아 깊은 당혹감을 품고 보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 변화는 방금 배만서루와 똑같았다.
그는 다 보고 난 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니, 옳지 않아. 이 병서는 누가 쓴 거지? 신년, 누가 쓴 건가?”
장진은 흥분하며 물었다.
그가 자신의 제자가 어떤 수준인지 모르겠는가? 허신년은 병법에 뭇사람보다 뛰어났지만 이렇게 천하를 다스릴 만한 병서를 쓰기란 절대 불가능했다.
이 병서의 저자는 따로 있었다.
장진은 원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대봉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니!
허신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병서는 사실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장내에 가득 찼던 왁자지껄한 소리가 끊겼다. 사람들은 망연자실하면서도 당혹스러움에 그를 쳐다보고 또 장진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점차 정신이 들었다. 배만서루를 굴복하게 만든 이 병서의 저자가 따로 있다니?
“위연인가? 위연이지?”
장진이 다시 물었다.
시선들이 허신년에게로 향했다.
‘위연…….’
배만서루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위연이군!’
사람들은 문득 모든 걸 깨달았다.
“이게 위 공과 무슨 상관입니까?”
허신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소 불쾌해하며 사람들을 훑어본 뒤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저희 형님이 쓴 병서입니다.”
순식간에 차양막 안팎과 로호반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 순간, 현장 전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잠시 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엄청난 충격과 경악이 터져 나왔다. 이내 세찬 조수처럼 논의하는 소리가 일었다.
이번에는 여느때보다도 떠들썩했다.
안하무인으로, 방자하고 오만하게 굴던 배만서루를 납득시킨 병서, 대유 장진이 큰 소리로 극구 칭찬하는 병서가 알고 보니 허신년의 손에서 나온 게 아니라 거의 금기시된 그 이름을 지닌…….
전(前) 은라 허칠안이 쓴 거라니?
“허 은라가 쓴 병서라니. 이, 이게 어찌 가능한가……. 그는 지식인도 아닌데.”
“허 은라, 그는 그저 무사일 뿐인데…….”
비록 허칠안은 이제 벼슬아치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허 은라라고 부르는 데 익숙했다.
국자감 서생들은 갑자기 흥분하여 너나 할 것 없이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발표하였다. 심지어는 더 이상 장소를 고려하지도 않았다.
대다수 사람은 황당하고 믿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허칠안을 얕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이 그 자체로 불합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망연자실했으며 당최 영문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