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3화. 문회 (2)
분위기가 좀 경직되자 회경이 일어서서 태자를 태부 곁에서 밀어낸 다음 그의 자리에 앉더니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부, 배만서루의 재주가 놀랍더라고요. 사서오경만 논하자면 대제주는 결코 그보다 약하지 않습니다. 박학다식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은 참 보기 드물지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장진이 나서면 생각건대 모든 일이 안정될 겁니다.”
태부는 회경의 손등을 툭툭 치더니 미소를 머금었다.
“마마께서 만약 사내의 몸이었다면 어찌 그 오랑캐가 경성에서 거들먹거릴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이 늙은이가 이번에 구경하러 온 것도 믿기지 않아서예요. 우리 대봉 지식인 사회는 인재가 끊이질 않고 새로 나타난 신예가 수도 없이 많은데, 정말 성인 겉모습만 흉내내는 오랑캐를 제압할 수 있는 자가 없단 말입니까?”
이때 가벼운 웃음소리가 차양막 밖에서 들려왔다.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다소 여유로운 어조로 반박했다.
“공자께서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태부께서는 말끝마다 오랑캐라고 하시는데 성인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기셨습니까?”
차양막 밖, 백발의 배만서루가 아름다운 자태의 황선아와 세로 눈동자 소년을 데리고 거침없이 차양막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분명히 이민족이고 손님이었는데 한적한 정원을 거니는 가뿐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그들이야말로 문회의 주인 같았다.
그들은 제공, 훈귀, 무장들의 위협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며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국자감 서생, 한림원 청귀, 자리에 있는 제공, 훈귀, 무장들……. 그들은 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깊은 오랑캐 배만서루를 말없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답하는 이가 없었지만, 그들은 마치 아주 강한 적과 마주한 듯 슬그머니 허리와 등을 곧게 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소생 백수부, 배만씨 장자 배만서루가 여러분을 뵙습니다!”
배만서루는 자신의 학식으로 재능이 뛰어난 지식인의 인상을 천하에 깊이 새겼다. 그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이번 문회에 그는 명성을 다시금 절정으로 끌어올려 후속 담판을 위한 포석을 깔 계획이었다.
* * *
초원진은 허부 정원 안 돌탁자에 앉아 손에 술잔을 쥐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묘진과 리나와 허영음이 앉아 있었다.
“어떻게 그가 황성에 들어갈 수 있지? 그는 뭐하러 가는 건가? 원경제가 그의 목을 벨까 봐 두렵지 않나?”
초원진은 질투했다.
그는 문회를 선망하였다. 그 역시 명색이 지식인 출신의 검객이었다. 또 예전의 장원이었기에, 이렇게 전봉끼리 최후 승부를 겨루는 문회는 그에게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성에 들어갈 수도, 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가운데 문회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은 허칠안 때문이었다. 애당초 그를 돕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처참한 상황이 생겼을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초원진은 술을 마시면서 몇 마디 불평이나 하러 그를 찾아왔더랬다.
그런데 그가 생각지도 못하게 최초 주도자가 스스로 들어갔다.
초원진은 신 귤을 먹은 것처럼 마음이 쓰라렸다.
“나도 가고 싶어요.”
허영음이 낭랑하게 말했다.
“문회는 지식인이 무료한 문제로 토론하는 곳이라 너는 가고 싶지 않을 거야. 이런 곳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어. 차라리 집에서 떡을 먹고 감주를 마시는 편이 나아.”
리나는 기회를 틈타 제자를 가르치려 했다. 그녀는 그래도 아주 철이 들었고, 제자 역시 점점 철이 들 수 있기를 바랐다.
“사부님, 문회에는 맛있는 게 아주 많아요. 지난번에 큰 오라버니와 승려가 싸웠을 때 저는 한 아저씨를 따라가서 맛있는 음식을 아주 많이 먹었다고요.”
허영음이 치명타를 날렸다.
“맞네, 왜 나는 생각하지 못했지. 문회에는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이 있잖아.”
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관점이 참 간사해…….’
초원진은 허영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이 멍청한 여자애가 정말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곧 그날 운록서원에서의 악몽과도 같은 일을 떠올렸다.
그는 묵묵히 손을 거두었다.
이묘진이 편한 태도로 말했다.
“그 오랑캐가 최근에 너무 날뛰던데. 보기에 편치 않아서 그를 단검으로 찌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겠더군요.”
‘보기에 불쾌한 자가 있으면 찌르겠다니. 정말 천종 성녀 맞나…….’
초원진은 천지회에서 문제점을 가장 많이 제기하는 자가 이묘진이라고 생각했다.
일호는 신분이 불분명했으며 삼호 허신년은 성인군자였다. 육호 항원은 자비를 베풀 줄 알았으며, 오호 리나는 비록 똑똑하지 않고 먹기를 좋아하지만 남이 ‘속에 있는 말을 다 내뱉고’ 싶게 하는 결점은 없었다.
칠호와 팔호는 여러 해 동안 ‘실종’된 상태였다.
성정이 온화한 구호 금련 도사는 존경할 만한 웃어른이었다. 그는 공덕을 닦았으며 품성도 인정할 만했고 좋지 않은 기호도 딱히 없다.
이묘진만은 사람을 어쩔 수 없게 했다. 그녀는 천종 성녀로 본래 성정이 담박하고 냉정했다. 그런데 그녀는 산에서 내려와 2년간 단련하면서 백성의 이익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그녀는 자신을 악행을 뿌리 뽑는 의협심이 강한 비연 여협객으로 지독하게 단련하였다.
“국자감 지식인이 이렇게 형편없다니! 게다가 운록서원의 지식인에게 의지해 그를 무찔러야 한다니!”
이묘진이 말했다.
초원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진이 쓴 《병법육소》는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하오. 그가 나서면 그 오랑캐는 오랫동안 방자하게 굴지 못할 것이오. 허나 이자가 《북재대전》을 쓸 수 있다는 건 그의 능력을 증명하오. 종파를 세워 한 시대의 저명한 학자가 되기에 충분하지.”
이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초원진이 결코 장진을 좋게 보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챘다.
“그 오랑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초원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시사를 비교하자면 아마 허칠안이 더 대단하겠지요?”
이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원진은 비웃었다.
이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차이가 큽니까?”
초원진은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아니오, 허칠안의 시재는 보기 드물지요. 하지만 문회는 시회가 아니오. 게다가 허칠안도 무대에 나올 수 없고.”
* * *
시정.
비록 일반 백성은 황성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들은 문회에 관해 꽤 수준 높은 토론을 했으며 결과도 무척 기대했다.
고생스럽게 노동하는 행상인과 심부름꾼조차 작은 노점 옆에 앉아 국수 한 그릇을 먹을 때, 옆 탁자에서 시시각각 문회에 관해 토론하면서 권선징악과 천하를 논하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작년 두법이 떠오르는군. 그 두법이 얼마나 큰 파문을 일으켰는가. 결국에 우리 허 은라가 곤란한 상황에 선뜻 나서 국면을 타개하였지.”
남색 윗도리를 입은 행상인 하나가 국수를 호로록 먹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문회는 두법이 아닐세. 애석하게도 허 은라는 지식인이 아니라 도와줄 수가 없어!”
동료가 안타까워했다.
국수 노점 사장은 뜨거운 솥을 열어젖히더니 면을 내리면서 참견하였다. 그는 울분에 차서 말했다.
“국자감 지식인은 정말 폐물이 따로없군. 오랑캐한테 지다니. 내가 다 얼굴이 빨개지는구먼.”
다른 탁자의 식객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허 은라가 지식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백성들 눈에 허 은라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영웅이었다. 그는 대봉의 전기적인 인물이자 진정으로 양심이 있는 거물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를 맹목적으로 숭배했으며, 그가 전지전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이성은 허 은라가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학식이 틀림없이 그 오랑캐보다 못할 거라고 깨우쳐 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허 은라가 지식인이었으면 좋겠다고 개탄할 수밖에 없었다.
국수 노점 사장이 면을 손님에게 건네더니 웃으며 말했다.
“허나 이 오랑캐가 감히 운록서원의 대유에게 도전하다니 정말이지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먼.”
식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황궁, 침전 내에서 원경제가 나른하게 평상 위에 앉아 도교 경전을 뒤졌다. 곧 발소리가 들리더니 늙은 태감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목소리를 낮추었다.
“문회 쪽에서 소식을 전해왔는데 배만서루와 한림원 대인들이 경의, 책론, 민생, 농경, 역사를 논했는데…….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건 이미 우리 대봉의 체면이 다 깎였다는 것이군.”
원경제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늙은 태감은 황제의 표정을 보고는 그의 기분이 불쾌하다는 걸 알았다.
결국 배만서루가 이렇게 명성을 떨치면 가장 망신이 큰 건 역시나 한 나라의 군주였다.
“시사를 논했는가?”
원경제가 갑자기 물었다.
늙은 태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자신의 결점은 정확히 아는군.”
원경제는 비웃었다. 그는 막 웃음소리를 내다가 갑자기 정색하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원경제가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
“장진은 아직 오지 않았는가?”
늙은 태감이 고개를 숙였다.
“장 선생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원경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지 않다. 문회가 아직 본제(本題)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말이야. 운록서원의 지식인이 밉살스럽긴 하나 학문적으로는 지금껏 실망시킨 적이 없거든.”
그의 표정과 태도는 아주 홀가분했다.
* * *
문회의 본제(本題)가 무엇이었는가?
전쟁이었다. 북방에서 발생한 전쟁.
국자감 대표 중 한 서생이 일어나 분개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오랑캐가 일년 내내 변방에서 소란을 피우며 우리 대봉 백성을 잔인하게 죽여 그 손해가 막심하다. 그런데 지금 동북의 무신교가 잔혹하게 공격하자 전혀 수치를 모르고 우리 대봉에 지원을 요청하러 왔구나!”
“오랑캐는 오랑캐로다!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다!”
주위에 있던 국자감 서생들이 잇따라 호응하며 오랑캐를 ‘후안무치’하다고 비난했다.
황선아는 빙그레 웃으며 이 말을 전부 마음에 새겼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귀밑머리를 비틀었다.
세로 눈동자 소년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찼다. 그는 뱀류의 잔인하고 포악하면서 살인을 일삼는 본능을 있는 힘을 다해 억누르고 세로 눈동자로 그 서생을 음침하게 훑었다.
배만서루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심지어는 웃기 시작하더니 말했다.
“무신교가 구주 동북을 통치하고 있다. 대봉의 3개 주가 동북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대봉의 인구와 병력으로 일정한 대가를 치르면 그들을 세 개 주(州) 밖에서 막을 수 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선 제공과 무장들의 인정하는 표정을 보고는 그제야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만약 북방의 영토가 무신교에게 점령당하고, 정국(靖國) 기마병이 남하하면 곧장 경성을 덮칠 수 있다. 그리고 강국(康國)과 염국(炎國)이 동쪽에서 진격하면 대봉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모두가 알다시피 북방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초원이 있다.
만약 정국(靖國)이 북방 영토를 얻으면 더 많은 기마병을 기르겠지. 그때 가면 대봉에 설령 화포와 석궁이 있다고 해도 육지 위의 ‘무적’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대봉에서 출병하는 건 우리 신족을 돕는 게 아니라 자신을 돕는 것이다. 우리 신족은 뻗어 나가기엔 상황이 곤란하다. 또한 인구가 감소하여 이따금 변방에서 소란을 피워도 남하할 병력이 없으니 대봉을 위협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무신교는 다르지.”
반박하는 이가 없었다.
한림원의 공부벌레, 국자감의 서생, 조당 제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말에 동의했다.
무신교가 장악한 동북은 산물이 풍부하여 수렵과 농경이 모두 가능했다. 게다가 그곳은 현대적으로 농사를 짓는 구역이었으며, 인구가 가장 번성한 지역이기도 했다.
대봉과 비교했을 때, 무신교 인구가 턱없이 부족한 건 지역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북방이 무신교의 손에 들어가 인구 일부가 북방으로 이주한다면, 20년 안에 무신교의 인구는 적어도 두 배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