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문회 (1)
회경은 보드라운 입술을 오므리더니 보기 드물게 품위 있는 어조로 말했다.
“장 스승님은 왕년에 전쟁에 나가신 적이 있는데 그 후에 벼슬길이 순조롭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나셨지. 그는 병법에 능하지만 어쨌거나 그것도 수십 년 전의 일이야. 이 수십 년 동안 그는 서원에 은거하면서 아마 진작에 병법을 내팽개쳤을 거야.”
허칠안은 가슴이 철렁했다.
사실 병법에 대해 논하자면, 그가 전생에 유일하게 알고 있던 것은 바로 손자병법이었다. 그는 이를 단순히 아는 수준을 넘어 외우기까지 했었다. 물론, 허칠안 스스로 이런 걸 외울 리는 없었다. 손자병법은 선생님이 내준 방과 후 숙제였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으니 그는 그 내용을 벌써 거의 다 잊었다. 그러다가 그는 연신경의 덕을 본 뒤 원신에 변화가 생겨 보통 사람을 초월하면서 손자병법의 내용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었다.
구주는 비범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 세계의 병법은 그 속에 담긴 사상이 자유분방하였으며, 걸핏하면 두뇌 대신 무력을 썼다. 4품 고수 하나가 평범한 병사로 구성된 기마병 군단을 때려눕힐 수 있으니 구태여 머리를 쓸 일이 없었다.
이 세계의 무장들은 전술을 그렇게까지 중시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세계에서 탄생한 손자병법은 반대였다.
“모레 문회에 자네는 나와 함께 참가하는 거야.”
회경이 말했다.
“만약 장진이 출석한다면, 신년도 반드시 참가할 겁니다. 그럼 저는 그의 모습으로 역용하기가 쉽지 않아요.”
허칠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제삼자로 역용해서 내 시위 역할을 하게.”
회경은 잘 돌아가는 머리로 제안을 했다.
“좋습니다.”
* * *
문회는 황성의 로호에서 개최되었다. 그들은 호숫가에 차양막을 세우고 수백 명이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구역을 구축했다.
늦여름의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으나 호숫가에는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었다. 본래 문회는 국자감에서 개최했기에 문회에 참가하는 대다수가 국자감 서생이었다.
하지만 배만서루가 한바탕 훼방 놓아 이렇게 큰 기세를 떨치니 문회에 출석하는 인물이 즉시 달라졌다. 국자감 서생은 그대로 참가할 수 있었으나 차양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외곽에 있어야 했다.
문회는 오시에 거행되었다. 이렇게 해야 조당 제공들이 한 시진 동안 휴식 시간을 사용하여 떳떳하게 참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시가 가까워지자, 유삼을 입고 유관을 쓴 국자감 서생들은 무장한 금군에 의해 가로막혔다.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우리 국자감의 문회에 입장하지 못하게 하는가?”
“어찌 주객이 전도될 수 있단 말인가?”
“금군이 현장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사천감 술사조차 왔군. 속뜻을 품었다고 추측되는 자가 문회에 섞이지 않도록 방비하잖나. 설마, 설마 폐하께서 문회에 참가하시려는 건가?”
그들이 말하던 중에 마차가 한 대씩 들어오더니 로호 밖 광장에 정차하였다. 마차 안에서 내린 사람들은 훈귀와 무장이었다.
그들은 문회와 본래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며, 지금은 전부 ‘병법 지도 편달’이라는 말을 듣고 왔을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안식구와 자식들도 데리고 왔다.
“이것 봐, 제공들이 왔어. 육부상서, 시랑, 전각 대학사…….”
“나는 거물이 올 거라고 짐작했지만, 이렇게 많이 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군? 문회 한 번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형님, 이건 형님이 모르시는 겁니다. 문회 한 번이면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이번 문회의 배후는 결국 담판과 관련된 일이지 않습니까. 두 나라 사이에는 사소한 일이 없지요. 제공들은 세력을 조성하여 압력을 가하러 온 것입니다.”
“일개 오랑캐가 감히 경성에 와서 도리를 논하다니 세상 물정 모르는군. 이따가 장진 대유가 그를 어떻게 훈계하는지 보자고.”
무장 뒤에는 3품 이상의 조당 제공들이 있었다. 형부상서, 병부상서 그리고 전각 대학사들이 그러했다.
그중에 일부 조당 대빵 역시 집안의 안식구들을 데려왔다. 예컨대 문명(*文名: 글을 잘하여 세상에 알려진 이름)을 떨치는 왕사모는 연분홍색으로 된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정교한 화장을 하여 단아하면서도 세련되었다.
“한림원의 청귀도 왔네. 재미있군. 이 서생들은 학식이 뛰어나다고 허풍을 떠니 조금 이따가 틀림없이 그 배만서루를 상대로 함께 들고일어나 공격하겠지…….”
국자감 서생의 눈이 반짝였다.
청포를 입은 젊은 관원 한 무리가 목을 뻣뻣이 세우고 회의장에 들어섰다.
한림원은 공부벌레가 모여든 곳이었다. 이 청귀들은 비록 손에 쥔 권력이 없고 나이도 젊었지만, 그들은 확실히 대봉에서 가장 똑똑한 단체 중 하나였다.
그들은 한창 청춘이었다. 기억력, 깨달음, 사고의 날카로운 정도가 모두 인생 최고봉인 시기였다.
그들이 입장하자 국자감 서생의 자신감이 배가 되었다.
한림원 청귀들은 자리에 앉은 뒤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를 나눴다.
“《북재대전》을 봤는데 수준이 있더군. 하지만 잡다하고 정교하지 못해.”
“우리한테는 확실히 정교하지 못하지. 하지만 이 세상 서생들에게는 아주 심오할 거야.”
“이자는 확실히 대단해. 단일 영역에서는 우리가 그를 이길 수 있지만,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논하자면 우리는 자책해야하네.”
“참, 병법을 논한다면 우리 한림원에서 신년을 능가할 수 있는 자가 없지?”
그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림같이 준수한 외모의 젊은이에게로 향했다.
탁자에 앉은 허신년은 한림원 동료뿐만 아니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훈귀와 제공들 모두 소리를 듣고 자신을 쳐다본다는 점을 똑똑히 알아차렸다.
‘그건 당연하지. 내가 주로 쓰는 게 병법이니까…….’
그는 막 고개를 끄덕이려다 훈귀 중에서 누군가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배만서루가 가르침을 청한 사람은 장진 대유네. 스승이 학생보다 형편없으면 안 되지.”
허신년은 약간 분노하여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학문은 나이를 나누지 않고, 학문이 깊은 자가 곧 스승이라고 하셨죠. 학생이 꼭 스승보다 못하다고 누가 그럽디까?”
훈귀와 무장들은 떠들썩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허칠안의 사촌 동생임을 알았기에 아주 방자하게 비웃어 댔다.
허신년은 학식이 있기는 하나 욕을 내뱉을 수 있는 입을 제외하면 다른 영역은 한림원에서 아주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학생이 스승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니, 그들은 아주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응? 욕?’
문득 깨달은 훈귀와 무장들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허신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딱딱한 태도로 일어섰다.
* * *
허칠안은 경갑을 입은 채 허리에 제식 패도를 걸고 회경과 임안의 마차를 따라왔다. 호화로운 마차가 천천히 길가에 멈추었다. 우아한 궁장을 입은 회경과 새빨간 긴 치마를 입은 임안이 동시에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 뒤 그녀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따가운 햇빛을 가렸다.
‘공주마마들께서 햇빛이 너무 강해 손으로 가리셨군…….’
어느 시위의 머릿속에서 이 문구가 튀어나왔다. 이내 그는 환관이 일산(日傘)을 들어 두 공주를 위해 햇빛을 가려주는 모습을 보았다.
임안은 고개를 돌려 인파를 한차례 훑더니 초롱초롱한 도화안에 당혹스러움을 내비쳤다. 그녀는 개자식이 누구의 모습으로 역용하였는지 알지 못했다.
‘위장을 참 잘해…….’
임안은 속으로 좀 실망했다. 화본에서 ‘서로 좋아하는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한다’라는 묘사를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두 공주가 막 입장하니 탁자 옆에 서 있는 허신년이 보였다. 그는 격앙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내뱉더니, 상스러운 말로 훈귀를 가리키며 욕을 퍼부었다.
훈귀와 무장들은 크게 노하여 너 한 마디, 나 한 마디씩 허신년을 둘러싸고 공격했다. 허신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경전의 문구를 인용해 날카롭게 반박했다.
적잖은 무사는 이미 소매를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제공들은 차를 마시면서 이 상황을 유유자적하게 구경했다.
회경이 눈살을 찌푸리고 조용하게 꾸짖었다.
“무엄하다!”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에는 위엄이 가득했으며 뜻밖에도 위화감까지 있었다. 허신년이 욕설을 그쳤을 뿐만 아니라 화가 나서 빽빽거리던 상급 무장들도 꼬리를 내렸다.
제공과 훈귀들은 잇따라 일어나더니 허리를 굽히고 예를 갖추었다.
“두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회경은 콧방귀를 뀌더니 임안과 시위 둘을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허신년은 차로 목을 축인 뒤 왼쪽 위 자리에 있는 왕사모를 쳐다보았다. 마침 상대방 역시 그를 쳐다보았다.
어제 왕사모가 특별히 그를 찾은 이유는, 허신년이 문회에서 재능을 뽐내 명성을 키우고 성망을 높일 수 있길 바라서였다. 그녀는 허신년이 문회에서 마구잡이로 주변을 공격하면서 주위를 놀라게 하길 기대하지 않았다.
장진이 등판하기 때문이었다. 장 선생은 허신년의 스승으로 그가 등판하면 충분하였다.
허신년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어제 사정을 다 들은 뒤, 맑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웃었듯 이번에도 그녀를 향해 웃었다.
이때 주위에서 서생과 시위들이 공손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삼황자, 사황자를 뵙습니다…….”
차양막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니 호호백발에 지팡이를 짚은 노인을 부축하는 태자가 보였다. 그는 금군이 포위한 통로를 따라 차양막으로 걸어왔다.
“태부?”
회경은 깜짝 놀라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었다.
임안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움츠렸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이 못된 영감한테 몇 년 동안이나 손바닥을 맞았더랬다.
태부는 고귀한 공주가 아니라 공부하지 않는 학생을 때린 것이었다.
태자는 태부를 부축하여 차양막으로 들어갔다.
제공들은 잇따라 일어나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서열을 논하자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태부의 아랫사람이었다.
허신년은 동료들을 따라 이구동성으로 인사한 다음 태자에게 부축받는 노인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백발이긴 하나 여전히 머리숱이 많았다. 정말이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양이었다.
태부는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데다 피부가 심각하게 늘어졌으며 눈동자 역시 좀 탁해 보였으나, 기질만은 아주 독특했다.
그는 원장 조위가, 태부가 당대에 유일하게 호연정기를 길러낸 지식인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본 조정의 삼공(三公)은 모두 1품이지만, 실권이 없었다. 태부는 본래 내각을 장악하길 바랐다. 다만 그해 황제가 도를 닦는 바람에 정무를 등한시하였다. 태부가 대나무 오리를 잡고 황제를 호되게 때리려 했으나 저지당했다. 그 후 그는 벼슬길과 더 인연이 없어 궁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고 했다.
‘태부도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허신년은 속으로 말했다.
태부는 콧방귀를 뀌더니 국자감 대제주를 쳐다보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이 늙은이가 은거한 지 여러 해가 지나서야 국자감이 대가 지날수록 점점 더 못나진다는 걸 발견하였네.”
대제주는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같은 국자감 출신 제공들 역시 다소 난감해했다.
조정의 체면이 곧 그들의 체면이었다.
오랑캐 젊은이 하나가 경성에서 크게 빛을 발했다. 오랑캐는 본래 저속한 무사였으니 만약 무도였다면 이런 일이 있었어도 상관이 없었겠지만, 하필 그가 학식으로 명성을 떨쳤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들은 인족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바로 문화라는 점을 알아야 했다. 모든 것이 다 하찮다고 해도 독서만은 고상했다.
유가는 중원 인족의 체계로, 문화의 유일한 보배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자랑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