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낙옥형의 비밀
두 사람은 주루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다. 허칠안은 방에서 휴대용 의자와 작은 원탁을 옮겨 와 그녀와 오목을 두었다.
“자네 이번 수 잘못 두었어. 여기에 두면 안 되지.”
왕비가 큰 소리로 말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에 두어야 다음에 바둑돌이 다섯 개 연이어지잖아요. 제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자네가 잘못 두었다는 거잖나. 자네가 나를 이기면 어떻게 계속 두겠어?”
“…….”
“내가 두 번 두고 자네가 한 번 둘 수는 없을까?”
“마마 생각은요?”
“연약한 여인을 괴롭히기만 하는 게 무슨 대수(大數)인가?”
“연약한 여인조차 괴롭히지 못한다면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괴롭히겠어요.”
“안 해!”
그녀는 홧김에 바둑돌을 내던지고 옆으로 돌아섰다.
그는 은비녀를 꺼내 바둑판 위에 올려두었다.
“드릴게요.”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탐색하듯 힐끗 보더니 이내 얼굴에 웃음이 넘쳐 흘렀고, 기쁨에 겨워 은비녀를 쥐었다.
왕비는 허칠안의 놀리는 표정을 보자 바로 정색하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어색하게 말했다.
“나도 사실 엄청 좋아하지는 않아…….”
“그럼 제게 돌려주세요.”
허칠안은 손을 뻗어 뺏으려 했다.
왕비는 즉시 은비녀를 몸 뒤에 숨기고 눈을 부릅떴다.
“내가 자네를 도와 연뿌리를 키우는 것에 대한 보수인 셈 치게.”
“일리 있군요.”
허칠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잡담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번화가에서 먼 편이고 날씨가 더우니 집에 채소를 쌓아두지 않는 게 가장 좋습니다. 이따가 제가 봐 드리고 나서 행상인에게 매일 아침에 신선한 채소를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성안에는 행상인이 아주 많았다. 그들은 이른 아침 장에 가 채소 농사꾼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채소와 과일을 구매한 뒤, 내성에 들어와 아침 일찍 외출하기 싫어하는 부유한 집에 제공하였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칠안은 잠시 침묵하더니 또 말했다.
“제가 앞으로 경성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마마, 마마께서는……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에 남으시겠습니까?”
왕비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자네와 가지 않을 거야. 경성이 이렇게 번화한데 왜 가겠어? 자네가 떠나는 날 국사에게 좀 통지해주게. 나와 그녀는 친분이 두터우니 그녀가 나를 안배해줄 거야.”
허칠안은 좀 실망하였다.
“그때 가서 마마께 은자 한 몫을 남겨드리지요.”
왕비는 그를 몇 번 쳐다보더니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원경제가 자네를 상대하려고 하지?”
“당분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예감은 있어요.”
“이 세상은 그의 황실 천하니 가도 좋지.”
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다만 자네 사촌 동생이 지금 한림원 서길사인데 그가 자네를 따라가길 원하겠는가? 음, 내가 생각했을 때 자네는 그에게 후원자를 찾아주려고 하는 거지?”
“아주 똑똑하시네요.”
허칠안이 웃었다.
원경제가 미워하는 사람은 허신년이 아니라 그였다. 자신이 떠나고, 허신년에게 견고한 빽이 생기기만 한다면 앞길은 아마 까마득하지만, 생명의 위험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허신년 뒤에는 운록서원이 버티고 있었다. 원경제는 기껏해야 그를 파면하고 서민으로 좌천시킬 터였다.
“똑똑한지 똑똑하지 않은지는 무슨 일인가를 봐야지. 요 며칠 나 혼자서 생활하는데 스스로 그다지 똑똑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더군. 불을 지피고 밥을 하면서 허둥지둥거리다가 몇 그릇 깨트려 하마터면 화가 나서 울 뻔했네.”
왕비가 개탄했다.
“원경제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어떨 때는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이네. 허무맹랑한 장생을 위해 후궁의 아름다움도 내버리고 명성도 내버렸지. 하지만 그는 20년간 도를 닦으면서 어떠한 것도 수련해내지 못했네.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포기를 알아야지, 안 그런가? 국사가 말하길 원경은 집념이 무척 강한데 다만 그 집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모를 뿐이라고 하더군.”
“국사와 관계가 좋다고요?”
“경성에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는 여인은 그녀뿐이야.”
왕비는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말도 안 돼. 국사는 아주 똑똑해 보이는데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은 여인과 대화거리가 있을 수 있지…….’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그녀 역시 가련한 여인이야.”
왕비는 ‘헤헤헤’ 웃었다.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비밀을 알려주지. 듣고 싶은가?”
‘지금 네 모습은 마치 건달 같거든…….’
허칠안은 공손히 귀담아들었다.
“무슨 비밀인데요?”
“인종이 수행하는 방법에는 아주 무시무시한 후유증이 있는데 수행자의 몸에 업화가 달라붙게 해 매월 한 번씩 발작하네. 품계가 낮은 자는 자신의 의지로 막을 수 있지. 하지만 품계가 높을수록 업화가 몸을 태우는 강도가 공포스러워지네. 만약 업화를 없앨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자멸의 길에 들어설 거야.”
왕비는 굉장히 대단한 기밀을 누설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허칠안은 무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진작에 알고 있었습니다.”
금련 도사와 그는 인종의 수행 공법의 폐단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도문 3종은 각각의 결점이 있었다. 인종은 업화가 몸에 달라붙고, 지종은 마도에 빠지기 아주 쉬웠으며, 천종은 인성을 완전히 상실하여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왕비는 또 ‘헤헤’ 웃더니 나쁜 일을 말하는 건달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아는가?”
허칠안은 그녀를 흘겨보았다.
“아세요?”
왕비는 병아리가 먹이를 쪼는 듯한 빈도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어서 나한테 부탁해, 어서 나한테 부탁해’라고 써 있었다.
“무슨 비밀인데요?”
허칠안은 협조적으로 상응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듣자 하니 남자와 쌍수해야만 대겁을 이겨낼 수 있대.”
왕비가 수상쩍게 말했다.
“?”
허칠안은 가장 먼저 그녀가 사기 친다고 생각했고, 그다음은 이 말이 그녀가 허투루 듣고 온 가십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는…… 제기랄, 그렇다고?!
인종은 기운을 빌려 수행하여 업화를 완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낙옥형은 국사가 되어 원경제의 수련을 지도했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만약 대기운을 지닌 자를 찾아 쌍수해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아니, 효과는 열 배, 백 배 더 셌다.
허칠안이 까닭 없이 추측한 게 아니었다. 그는 상고 시대 도문이 남긴 온전한 방중술(房中術)을 마스터했다. 비록 줄곧 쌍수할 대상이 없다고 해도 그의 장기적인 이론 연구에 의하면 쌍수술을 수준 높은 경지까지 연마하고 남녀 간에 속내를 알게 될 때 잠시 ‘융합’이 이뤄진다고 했다.
기기, 원신 등이 잠시 교감할 것이다.
진정으로 네 안에 나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는 것이다.
“낙옥형은 2품이니 만약 그녀가 업화를 소멸하지 못한다면 자멸할 것이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거야. 원경제는 황제라 몸에 기운이 함께하니까. 낙옥형은 대기운을 지닌 남자가 필요하네. 대기운을 지닌 남자가…….”
허칠안은 얼굴이 갑자기 굳었다.
‘낙옥형이 대기운을 지닌 남자와 쌍수해야 한다니. 그녀가 국사가 되었지만, 지금까지 원경제와 쌍수하길 원치 않았군……. 금련 도사는 십중팔구 내 몸에 기운이 있다는 걸 안다. 금련 도사가 여러 차례 낙옥형에게 약을 구하면서 나에게 가라고 똑똑히 지명했지……. 초주로 출발하기 전에 낙옥형은 초원진더러 내게 부검을 선물하라고 부탁했었고……. 검주에서 연밥을 수호할 때 금련 도사가 내게 강제로 호신부를 주면서 위기의 순간에 낙옥형을 부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 왔지…….’
합리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각종 단서가 허칠안의 머릿속에 차례대로 스쳤다.
‘네가 이렇게 한다면, 내 머리가 커질 텐데!’
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드러났다.
“하지만 제가 듣기로 국사께서는 원경과의 쌍수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던데요.”
허칠안은 감정을 추스르고 잡담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왕비는 눈을 위로 치켜뜨고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음……. 이건 나도 몰라. 내가 그녀에게 차라리 원경제에게 몸을 맡기면 된다고 설득했지. 황제가 상대라면 그녀도 억울한 셈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녀는 원경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해. 모든 방면에서 다 불만족스러운가 봐. 아니, 나는 원경제를 향한 그녀의 증오를 감지할 수 있어.”
‘단지 기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다 싫다니…….’
허칠안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국사와 같은 수련 경지를 지닌 여인은 아마 평범한 여인처럼 삼종사덕(*三從四德: 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와 지켜야 할 네 가지 덕목) 같은 허례허식을 중시하지 않으실 테지요.”
왕비는 ‘음’하고 소리 냈다.
“낙옥형은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도려를 선택하는 것과 허례허식이 무슨 관계가 있지? 도려를 선택하는 건 지극히 신중한 일이야.”
‘낙옥형은 상어구나…….’
허칠안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쌍수가 바로 도려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는 여기서 남녀 간의 일에 낙옥형이 얼마나 신중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원경제를 다 관찰한 후에 정말 그저 기운을 빌려 업화를 억누르고 있을 뿐, 그와 쌍수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만약 내가 방금 추측한 게 사실이라면 낙옥형은 나도 관찰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일단 그녀가 나와 쌍수해봐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녀가 나를 도려로 선택할 거라는 의미다. 도려에 대한 이모의 중시 그리고 2품 고수로서 그녀의 지위로는 그녀가 나를 선택하기만 하면 내 어항 속의 물고기들에게 활로가 생길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었다. 장점은 지금 비장의 카드가 하나 더 늘었다는 점이었다. 나중에 절박하여 어쩔 수 없으면 낙옥형에게 몸을 팔아 이로써 보답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전제는 그녀가 허칠안에게 비교적 만족하여 그를 도려 후보자 명단의 1순위로 올려놓는 것이었다.
‘음, 기회를 봐서 그녀를 떠봐야겠군.’
“자네 이렇게 확실히 물어서 뭐 하게?”
왕비는 의심하며 말했다.
“국사 같은 경국지색의 미인이…… 만약 그녀의 도려가 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8대가 쌓아 온 복이지요.”
허칠안은 일부러 감개하였다.
“꿈 깨. 자네 고작 그 밑천에, 낙옥형이 어찌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겠나?”
왕비는 아주 예상 밖으로 차가운 조소를 내보이며 신랄하게 그를 비꼬았다.
그런 뒤 그녀는 무의식적인 듯 자신의 손목에 찬 보리 팔가락지를 어루만지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낙옥형의 자색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경국지색이라고 말하자면 아무래도 좀 과분한 칭찬이지.”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아래턱을 치켜들고 허칠안을 흘겨보았다.
이 모습은 분명히 ‘나를 봐, 나를 봐, 나야말로 대봉 제일 미인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허칠안은 그녀를 하찮게 비웃었다.
“방에 돌아가서 거울 좀 보세요.”
왕비는 화를 내며 돌을 집어 그를 내리쳤다.
“알겠어요, 알겠어. 국사가 마마보다 훨씬 못났어요.”
허칠안이 무성의하게 말했다.
왕비는 여전히 달갑지 않아 보리 팔가락지를 쥐었다. 지금 본 모습을 이 자식에게 보여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 낙옥형이 아름다운지 자신이 더 아름다운지 알게 해야 했다.
“잘 생각하세요. 여기는 경성입니다. 마마께서 팔가락지를 빼면 아마 내일 사천감이 관병을 데리고 마마를 잡으러 올 겁니다.”
허칠안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왕비는 순간 쫄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