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화. 항원의 비밀 (1)
이내 그들은 내성 상공을 날아 외성에 이르렀다. 이묘진이 발끝에 힘을 주어 검 끝을 아래로 향하자 남성 방향을 향해 비스듬히 갔다.
이묘진은 무모하게 낙하하는 대신 저공에서 한바탕 선회하더니 물었다.
“어떤가?”
“당분간은 안전하오.”
허칠안이 대답했다.
그는 한동안 적의를 포착하지 못했다. 주변에 매복한 자가 자신을 아주 잘 통제하며 고개를 들어 관망하지 않고 있거나 이미 떠났거나.
이묘진은 진지하게 분석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감추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네. 어쩌면 이미 빈틈없는 경계망을 쳐 놓고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허칠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소. 원경제는 우리가 항원과 한패라는 걸 알고 있으니 성을 포위하고 적의 지원군을 칠 계획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오.”
“성을 포위하여 적의 지원군을 친다?”
이묘진은 개탄했다.
“훌륭한 묘사군. 역시 자네다워. 그럼 자네가 선봉을 맡게. 자네의 금강불패는 4품 고수의 ‘의’라고 해도 뚫기 어려울 테니.”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찬성하였다.
“그대는 상공에서 나를 도와 위협해주시오.”
두 사람은 한바탕 분석하더니 서로 쳐다보며 씩 웃었다.
이때 종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래쪽에는 매복이 없고, 무사가 없어…….”
허칠안과 이묘진의 표정이 굳었다.
‘아이고. 하마터면 종리가 망기술에 정통한 술사임을 잊을 뻔했군. 휴, 그녀가 평소에 보여준 연약한 모습을 탓해야지 뭐. 나한테 너무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고…….’
허칠안이 속으로 말했다.
이묘진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녀는 더 이상 선회하지 않고 비의 장막에 낙하하였다. 거리는 오랜 세월 보수하지 않아 울퉁불퉁하였고, 양쪽에 있는 낮은 집들은 빗속에서 스산하고 낡아 보였다.
양생당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허칠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가 막 ‘전투한 흔적이 없소’라고 말하려는데 종리와 이묘진이 일제히 말했다.
“누군가 죽었네.”
그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 * *
세 사람은 담벼락을 뛰어넘어 양생당 내부로 들어갔다.
잡초가 무성하고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뜰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동쪽 당내, 창문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 나왔다.
세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자 당내에 남루한 널빤지 침상이 놓였고, 흰 천으로 덮인 수척한 시체 한 구가 보였다.
허칠안은 한눈에 항원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결코 마음이 편해질 수는 없었다.
한 늙은 하급 관리가 시체 옆에 앉아 맥이 빠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은 온통 주름이 져 있고 슬픔과 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허칠안은 양생당에 여러 번 온 적이 있었기에 그를 알았다. 이 늙은 하급 관리는 이(李)씨로 역시 독거노인이었다. 그는 그저 몸이 건강하여 양생당에서 근무하도록 배치되었을 뿐이었다.
“이씨 아저씨,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허칠안은 애써 우렁찬 발소리를 내어 이씨 아저씨의 주의를 끌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깜짝 놀라 온몸을 덜덜 떨었다. 마치 막 공포를 맞닥뜨린 듯했다.
“허, 허 은라…….”
늙은 하급 관리는 허칠안을 보자 탁한 눈에서 희망의 빛을 내뿜었다.
그는 순간 기쁨에 차오른 나머지 휘청거리며 일어나 흥분하여 말했다.
“허 은라 어떻게 오셨습니까.”
허칠안은 그의 손을 잡고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늙은 하급 관리는 이 말을 듣자 다시 흥분하더니 말했다.
“오후에 마을 이웃이 달려와 저희에게 알려주더군요. 밖에서 누군가 항원 대사를 찾고 있는데 그의 초상화까지 들고 있다고 말이지요. 저는 항원 대사님에게 나가서 피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황혼이 되자 정체 모를 사람들이 양생당에 난입하였고 항원 대사님을 잡지 못하자 내게 그에 관한 일을 물은 뒤 떠났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양생당의 노인과 아이들을 강제로 문 앞까지 데려가더니 큰 소리로 말하더군요. 만약 항원 대사가 돌아오지 않으면 일각마다 그들이 한 사람씩 죽이겠다고요…….”
늙은 하급 관리는 여기까지 말했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운이 나쁜 장씨, 그자들이 목을 비틀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 매우 고통스러워했어요. 바닥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쳐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지요. 나중에 항원 대사께서 돌아왔고, 그들이 잡아갔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원 대사께서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늙은이도 모릅니다…….”
이묘진의 얼굴은 이미 분노로 새파랗게 질렸다.
“그자들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습니까?”
허칠안이 물었다.
“그들은 검은색 장포를 입고 있었습니다. 가면을 써서 얼굴은 볼 수 없었고요.”
늙은 하급 관리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왕 밀정!
허칠안과 이묘진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진작에 예상했던지라 전혀 놀라지는 않았고, 분노가 더욱 커질 뿐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만약 항원이 나타나지 않으면 양생당의 모든 사람은 살해당했을 것이다.
“우리가 회왕 밀정의 사악함과 잔인함을 과소평가했군.”
허칠안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상대는 냉혈한 짐승들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죽여서는 안 됐다. 게다가 독거노인이지 않은가.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어.”
이묘진이 잇새 사이로 목소리를 냈다.
“내 사부님이 전에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그의 생명 역시 존중받을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네.”
허칠안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다른 사람은 괜찮습니까? 음, 뒤뜰의 그 아이는…….”
늙은 하급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놀라기는 했으나 별일 없습니다. 잠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비통함과 슬픔은 분명히 뒤따를 것이다. 그저 여태껏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의 감정을 신경 쓰는 자가 없었을 뿐이었다.
“오늘 밤에 저희가 여기서 자겠습니다. 연세도 있으신데 우선 돌아가서 쉬세요.”
* * *
허칠안은 하급 관리를 방으로 보내고 동당으로 돌아왔다. 종리와 이묘진은 당내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다소 적막하였다.
지금 상황은 아주 엉망이었다.
회왕 밀정이 항원을 데려갔으니 십중팔구 절망적이었다.
지종의 지보인 지서 파편이 원경제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원경제는 지종 요도와 결탁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항원에게서 천지회 내부 구성원들의 자료를 빼낼지도 모른다. 항원은 당연히 자백하지 않을 테지만, 지종은 그가 자백하게끔 할 방법이 있다. 예컨대 사람을 죽이고 영혼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그리고 일단 허칠안이 지서 파편 소지자라는 신분이 드러나면 지종 도사는 초주에 나타난 그 신비로운 강자가 바로 허칠안이라는 걸 알아차릴 터였다.
원경제 역시 십중팔구 상백 아래 그리고 불문과 관련 있는 봉인물이 허칠안에게 있다는 걸 짐작할 것이다.
순식간에 압박감이 밀려왔다.
허칠안은 얼굴을 문지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이 장군, 그들에게 알려주시오. 항원이 납치당하여 생사를 알 수 없다고. 지서 파편 역시 원경제 손에 넘어갔다고.”
이묘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서 파편을 꺼내 천지회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사: 역시나 가장 재수없는 쪽으로 일이 치닫고 있군.]
초원진이 개탄하며 전서를 보냈다.
[오: 그럼 지금 어떡하지?]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리나라도 까다롭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그녀에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지금 항원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몰랐다. 게다가 그들의 적은 황제였다.
초주성 백성 대량 학살 때도 상대는 황제였지만, 문무백관, 감정, 운록서원의 조위라는 ‘맹우’가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대세를 업고 일을 행했다고 할 수 있었다. 원경제는 대세를 거슬렀기에 패했다.
이번에는 천지회밖에 없었다.
위축된 침묵 속에 금련 도사가 갑자기 전서를 보냈다.
[구: 빈도가 감지해보았는데 항원의 지서 파편이 자네들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았네.]
허칠안의 눈이 갑자기 번쩍였다.
금련 도사는 ‘자네들’이 누구인지 가리키지 않았지만 허칠안은 그들임을 알았다.
‘맞다, 내가 마음이 혼란스러워 항원 대사를 과소평가했다. 그가 자신을 양생당 사람의 목숨과 바꾸기로 결심한 이상, 몸에 지서 파편을 지닐 리가 없지…….’
허칠안은 황급히 천종 성녀를 쳐다보았다.
“묘진!”
이묘진이 허리춤의 향낭을 열고, 푸른 연기를 내보냈다. 연기가 가냘프고 부드럽게 흩어지더니 양생당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지서 파편을 찾았다.
일주향의 시간이 흐른 뒤 푸른 연기는 거울 하나를 감싸고 돌아와 탁자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푸른 연기는 이묘진 앞으로 흘러와 공을 가로채듯 줄기를 비틀었다.
“내일 네게 두 배의 음기를 주겠어.”
이묘진은 약속한 뒤 향낭을 열고 입을 벌려 소리 없는 울부짖음을 내었다.
이내 푸른 연기는 부름을 받고 용솟음치더니 돌아와 향낭으로 파고들어 갔다.
“항원이 지서 파편을 길가의 잡초 더미에 버려두었군. 양생당에서 멀지 않아.”
천종 성녀가 말하면서 다른 파편 소지자들에게 전서로 알렸다.
금련 도사가 전서로 말했다.
[구: 좋네. 여러분, 빈도는 이제 우리가 잘 상의할 차례라고 생각이 드네만.]
[일: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호는 아주 빠르게 대답했다. 그(그녀)가 줄곧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고 있다는 게 티가 났다.
초원진이 이어 전서를 보냈다.
[사: 삼호, 이 일은 자네가 발견한 것이지 않은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우리한테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허칠안은 잠시 어휘를 선택하더니 붓 대신 손으로 전서를 보냈다.
[삼: 항원 대사가 평원백부에 난입하여 평원백을 살해했던 일을 아직 기억하는가? 당시 내가 그를 구했었지.]
상백 사건 전, 작년에 발생한 이 일은 모든 사람이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 원경제가 이번에 항원에게 맞서는 게 이 일과 관련 있는가?]
이묘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삼: 내가 어떤 은밀한 경로를 통해 한 가지 일을 알게 되었는데 평원백이 조종하는 거간꾼 조직 배후에서 진정으로 전심전력 힘썼던 자가 원경제였네.]
[일: 불가능해!]
일호는 그의 말을 바로 반박하였다. 짧게 세 글자로 단호한 태도를 드러냈다.
[사: 이건, 내가 비록 원경제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거간꾼 조직을 조종하여 사람을 팔아먹는 배후의 진범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이렇게 할 필요가 없거든.]
황제가 어떤 사람인가?
조정 전체에서 최고 권력을 지닌 자이다. 그보다 더 많은 권력을 지닌 자가 누가 있는가? 없다. 감정이 그보다 세지만 권력을 논하자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황제가 손에 쥔 권력이 가장 컸다.
일반 백성은 둘째 치더라도, 설령 고관대작일지라도 황제는 그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버젓한 제왕이 사람을 팔아먹을 필요가 있는가?
‘나도 믿기 어렵다는 건 알지. 마치 마윈이 전기 스쿠터를 훔쳐서 체면이 서는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과 같거든…….’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는 계속해서 전서를 보냈다.
[삼: 초 형, 형님은 지식인지만, 사고가 여전히 날카롭지 않습니다. 원경제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습니다.]
[구: 무슨 이유?]
이번에는 금련 도사도 앞다투어 질문하였다. 그는 무척 궁금해하는 듯 보였다.
[삼: 저는 구체적인 내막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건 거간꾼 조직이 정기적으로 산 사람을 궁에 들여보낸다는 겁니다. 이 과정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었는지 당분간은 확인할 수 없지만, 틀림없이 아주 여러 해가 되었을 겁니다.]
그는 멈칫하더니 계속해서 전서를 보냈다.
[삼: 평원백은 자신이 원경제의 약점을 쥔 줄 알고서는 야심이 불타올라 더 큰 권력과 지위를 얻고자 양당과 합작하여 평양군주를 죽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원경제는 모든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원백을 감싸기로 했지요. 평원백이 신중할 줄 모르고 위연을 건드리기 전까지요. 원경제는 일이 까발려지지 않도록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한 겁니다. 그는 평양군주 사건을 빌려 평원백을 죽이고 멸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