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화. 유물 (2)
허부.
아침 식사 시간에 리나는 죽을 먹는 중이었다. 꿀꺽, 꿀꺽.
콩알이도 죽을 먹었다. 꿀꺽, 꿀꺽, 꿀꺽, 꺼억…….
다른 사람은 침착하게 죽과 음식을 먹었다.
숙부는 태평도를 어루만지면서 헤벌쭉 웃었다.
숙모가 화를 냈다.
“매일 칼 쓰다듬는 거나 알고. 나리는 칼이랑 같이 자면 되겠네요.”
“좋소.”
숙부는 말하면서 조카를 쳐다보았다.
“좋아요.”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 숙부와 시간을 많이 보내렴.”
숙모는 화가 나서 빽빽거렸다.
“숙부랑 조카 둘 다 쓸만한 놈이 없구나.”
그녀는 돌아서서 아들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신년아, 너와 그 왕씨 집안 소저는 어떻니?”
“그 얘기를 해서 뭐해요…….”
허신년이 웅얼거렸다.
“너 왕가(王家)에 갔다고 하지 않았니? 그럼 우리도 그쪽 집안 소저를 집으로 초대해야 하지 않겠니? 비록 우리 허씨 집안이 서생 가문은 아니지만, 예의는 알잖니. 네가 가서 그녀를 저택 손님으로 모시고 오렴.”
숙모는 한 집안 마님으로서 허세를 부렸다.
‘숙모, 이렇게 말하면, 저는 미리 아부 떨 말을 준비해야 한다고요…….’
허칠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전혀 예의에 맞지 않아요. 제가 그녀를 저택으로 초대하는 건 명분이 서지 않는다고요.”
허신년은 모친의 수준이 미달임을 까발렸다.
“저를 핑계 삼아 왕씨 집안 소저를 저택으로 초대하는 건 예의에 맞지요.”
허영월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허신년은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구나.”
허칠안이 장단을 맞추었다.
“그럼 너무 오래 끌지 말고 시간을 정하자. 요 며칠 사이가 가장 좋겠어.”
숙모는 이 말을 듣더니 저도 모르게 조카를 쳐다보았다.
“칠안이 넌 뭐하러 이렇게 열성적이니?”
‘제가 열성적인 게 아니라 숙모가 미래의 며느리한테 발리는 걸 보고 싶어 죽겠어서 그래요…….’
허칠안은 속으로 말했다. 그는 무미건조하게 사건을 조사하던 생활에 마침내 즐거움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그는 다시 허영월을 쳐다보았다.
‘왕사모가 미래의 시어머니를 바를까 아니면 시누이가 기세를 떨치며 언니와 필사적으로 싸워 위기에 봉착한 어머니를 구할까? 이거 기루의 희곡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거 아니야?’
“내가 큰형으로서 당연히 신년의 혼사에 관심을 가져야지. 신년의 혼사가 결정되어야 영월의 혼사도 일정을 잡기에 좋을 테니까.”
허칠안이 그럴싸하게 말했다.
허영월은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눈에 빛이 반짝였다.
“하긴!”
숙모는 공감하였다.
* * *
허칠안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방으로 돌아와 탁자 옆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종리를 보았다.
종리는 헝클어진 검은 머리를 살짝 가르고, 입술을 드러낸 채 무를 베어 먹는 토끼처럼 약간 꿈틀거렸다.
그는 비록 지금껏 종리의 정면을 본 적은 없지만, 이따금 드러나는 눈과 입술로 이목구비가 아주 정교한 미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세요. 저 비망록 쓸 거예요.”
허칠안은 그녀를 책상 옆에서 내쫓았다.
종리는 그릇을 팔로 감싼 채 침상 옆에 쭈그리고 앉아 계속해서 먹었다.
“오늘 아침 ‘의(意)’를 수련하였다. 최대한 빨리 각종 절학을 칼 하나에 담을 것이다. 천지일도참 더하기 심검 더하기 사자후 더하기 태평도, 예감이 든다. 내가 ‘의’를 수련해낼 때 나는 4품이라는 경지로 대성을 이룰 것이다. 오후에 임안과 데이트하러 갔다. 그저께 ‘무심코’ 임안의 허리를 만졌는데 정말 부드럽더라.
내일은 집에 있으면 안 된다. 미망인한테 가서 자야겠다. 그녀를 데리고 나가 길거리를 구경하고 방랑하는 것도 빼놓아서는 안 되지. 모레 오전에는 회경부에 가서 나의 도도한 여신을 만나야겠다. 그녀를 냉대하기도 곤란하다. 오랫동안 그녀와 수다를 떨지 않았다. 학식이 풍부한 미인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누구나 동경하는 일이니까.
오후에는 송정풍, 주광효와 기루에 가서 노래를 듣기로 약속했다. 교방사, 에잇, 교방사는 안 갈란다. 글피에는 식량을 사들여 죽을 나누어 주겠다고 이묘진과 약조하였다. 이 미련한 협객 같으니라고. 내가 그녀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게 낫다고 말했지만, 미련한 협객은 자네가 무슨 잡는 법을 알려줄 수 있다는 거냐고 말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오후에는 리나와 채미 그리고 콩알이를 데리고 주루에 먹으러 갈 거다……. 그리고 또 미망인 있는 곳에 가서 자야 한다…….”
허칠안은 여기까지 썼을 때 어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엇, 내 공적인 업무는? 내가 조사하려는 사건은?’
그는 비망록 말미에 적었다.
“허칠안아, 허칠안. 너 온종일 여인들 옆에 머물며 공적인 업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몇 초 후, 그는 이 문구를 지워버리고 수정하였다.
“나는 《나(羅) 대사의 시간 관리학》한 권이 필요하다.”
그는 한없이 속상해하며 비망록을 다 쓴 뒤, 아침밥을 다 먹고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하는 종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오 사저가 좋아. 가만히 어장 안에 있잖아.’
그녀는 못된 짓을 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의 공적인 업무를 그르치지 않았다.
이때 문지기 장씨가 뛰어와 문 앞에서 말했다.
“큰 공자님, 누가 찾아왔어요.”
허칠안이 이 말을 듣더니 반응하였다.
“누구?”
“자칭 매아라고 하는 낭자입니다.”
‘매아라면 부향의 수행 여종인데…….’
허칠안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말했다.
“그녀를 외청으로 데리고 오게. 지금 바로 가겠네.”
그는 비망록을 책 사이에 끼운 뒤 종리에게 당부하였다.
“몰래 보지 마세요.”
종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허칠안은 방을 나서 안뜰을 지나 외청에 이르렀다. 그는 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경건한 태도를 취한, 이목구비가 수려한 매아를 보았다. 그녀는 약간 긴장한 듯했다.
옆에 있는 찻상에는 작은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매아.”
허칠안은 내청에 발을 들였다. 그는 허둥지둥 일어서는 소녀를 향해 손을 아래로 저은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긴 건가?”
매아는 예전과 다르게 아주 소박해 보였다. 위로 향한 맨얼굴은 영매소각에 있을 때 아름답게 차려입었던 그녀의 차림새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는 매아가 아마 교방사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허 은라……. 아니, 허 공자님.”
매아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저는 이미 교방사에 있지 않아요. 부향 소저가 떠나기 전에 일부 저축을 제게 남겨주면서 저더러 그걸로 속신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돌보다가 성실한 사람 만나 시집갈 계획이었어요.”
허칠안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와 작별 인사하러 온 것인가?”
기녀의 신분에서 벗어나 혼인할 수 있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었다. 부향은 그녀가 지금 평안하길 바랐으리라.
매아는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부향 소저가 떠나기 전에 몇 가지 물건을 공자님께 전해 드리라고 했어요.”
허칠안은 눈동자가 살짝 수축했다.
매아는 작은 보따리를 두 손으로 받치고 예를 갖춘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 공자님, 그럼 노비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잠깐!”
허칠안은 보따리를 받아서 펼치지 않고 아름다운 용모의 여종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집은 어디에 있느냐?”
“노비 집은 초석현(焦石縣)에 있습니다.”
매아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초석현은 경성 관내로 동북 방향이었다. 마차 한 대 빌려 북방에서 출발하면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매아는 부정 관리의 자손이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집에서 교방사에 팔린 경우였다.
그녀처럼 경성 교방사에 팔린 여종은 대개는 경성이나 경성 근처의 빈민가 출신이었다. 천 리 길을 멀리 경성으로 와 딸을 파는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여비가 있을 정도라면 딸을 팔 필요도 없었으니까.
부모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들이 그해 그녀를 교방사에 판 건 전적으로 어쩔 수 없어서였다. 그해 큰 화를 당해 온 가족이 죽을 먹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그녀를 팔아넘겨 되는대로 살길을 만들었다.
‘부향이 설령 그녀에게 남긴 은자가 있다고 해도, 교방사처럼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곳은 틀림없이 속신하는 기회를 틈타 그녀에게 은자를 공갈쳐 빼앗을 거라고. 그녀처럼 연약한 여인이 만약 가지고 돌아가는 은자가 너무 적으면 가족들이 아마 그녀에게 잘해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허칠안은 그녀의 소박한 옷차림을 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품 안으로 손을 뻗어 거울을 가볍게 두드려 오십 냥 가치를 하는 은표를 꺼내어 건넸다.
“허 공자님, 저는 받을 수 없어요.”
매아가 연거푸 고개를 저었다.
“너는 부향과 주종 관계였으니 내가 미력이나마 돕는 게 당연하다.”
허칠안이 웃으며 말했다.
매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침을 삼키고 말했다.
“부향 낭자가 위중하셨을 때 노비가 마음속으로 공자님이 야박하고 의리 없다고 미워했었습니다. 노비가 잘못했어요. 공자님은 진정으로 의리 있는 남자입니다. 부향 낭자가 박명하신 건 복이 없어서지요…….”
허칠안은 좀 난감했다. 그는 부향이 위중하다는 걸 진작 알았지만, 그저 그녀를 어떻게 마주할지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신분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았다. 명색이 경찰인 그는 종리가 상대방의 불완전한 정신을 터뜨리면서부터 예전의 여러 의혹을 줄줄이 엮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요족이 어떻게 그의 몸에 기운이 감겼는지 아는 것일까…….
예를 들면 요족이 어떻게 신수의 단수를 몰래 그의 집에 숨겨 놓으려 했던 걸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정신이 불완전한 사람은 멀쩡할 수가 없었다. 치매거나 식물인간이 될 터였다.
허칠안은 매아를 배웅하고 외청에 앉아 보따리를 풀었다.
안에는 서신 두 통과 책 한 권 그리고 황유옥 팔찌가 하나 있었다.
한 통은 당시 운주에 갔을 때 청주로 가는 길에 쓴 서신이었다. 다른 한 통은 초주에 가서 사건을 조사할 때 강주 황유현으로 가는 길에 쓴 서신이었다.
허칠안이 팔찌와 서신 두 통을 막 내려놓으려던 참에 갑자기 이상한 촉감을 감지했다. 그가 청주 서신을 열자 바싹 말라 쪼글쪼글해진 연꽃이 쏟아져 나왔다.
허칠안은 원래 부향의 죽음에 그저 좀 슬펐던 참이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알고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네게 준 건 고작 이것들뿐이었구나…….’
그는 서신을 펼쳐 묵묵히 읽었다. 쓰라린 마음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 기녀와의 지난날을 회상해보았다.
그는 예전에 할 일 없이 인터넷 카페를 둘러볼 때 누군가 한 말을 본 적이 있었다.
진정으로 깊은 슬픔은 폭발적으로 한바탕 펑펑 우는 데 있지 않았다. 대신 냉장고 안의 우유 반 팩, 창턱 위 바람에 살랑이는 화초, 침대 위에 접힌 담요, 그리고 조용한 오후, 세탁기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있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서신 봉투와 팔찌를 조심스럽게 챙기고 주의력을 책으로 돌렸다.
남색 책 표지에는 책 이름이 없었다. 그는 펼쳐서 본 뒤에야 부향이 쓴 수필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수려한 필적으로 괴상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책에서 말하길 구름 속으로 높이 솟은 벼랑에 노쇠한 매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매에게는 아이가 여섯 있었는데 어느 날 매의 아이가 괴롭힘을 당했다. 아이는 돌아와서 매에게 울며불며 하소연하였다.
매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묵묵히 벼랑 위에 서서 바닥을 주시했다.
그래서 매의 아이는 날아가더니 더는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