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화. 유물 (1)
허칠안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아우의 방문을 두드려 열고는 말했다.
“요 며칠 기억해둔 선황 기거록을 내게 적어주렴.”
허신년은 정신을 가다듬는 탕을 마시고 막 쉬려던 참이라 밀치락달치락했다.
“제가 좀 더 기억하고요.”
“안 돼. 너무 많이 기억하면 스스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세부 사항을 선별할 거야. 지난번에 원경의 기거록을 볼 때 네 흠을 눈치챘다.”
허칠안은 언짢아했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요?”
허신년은 자신의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고 책임지는 거지, 네가 책임지는 게 아니다.”
허칠안은 탁자 옆으로 걸어가 문방사우를 고르게 펼쳐 놓고 재촉했다.
“어서 와. 큰형이 직접 먹을 갈아줄 테니.”
허신년은 어쩔 수 없이 책상 옆으로 걸어와 앉아 붓을 들고 글을 썼다. 그는 요 며칠 연속으로 선황의 기거록을 적잖이 보았고, 전부 머릿속에 기억하였다.
만약 며칠 더 지나서 쓴다면, 확실히 그는 자신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대화 일부를 삭제할 터였다. 그러지 않으면 업무량이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쓴다면 기억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반 시진 후, 허신년은 붓을 내려놓고 가볍게 손을 털더니 선지 십여 장을 큰형에게 내밀었다.
“됐어요.”
“네가 읽는 걸 들을게. 초서는 내가 알아보지 못하잖니.”
허칠안은 선지를 도로 내밀었다.
허신년은 굳은 얼굴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럴 거면 왜 저한테 써내라고 했어요?”
‘내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거든…….’
허칠안이 재촉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읽으라면 읽어. 큰형은 아버지와 다름없는데 내 말이 소용없어졌니?”
허신년은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애매하게 큰형 일가 전부의 안부를 묻고는 선지를 쥐고 읽기 시작했다.
“잠깐!”
그가 어느 단락을 읽을 때 허칠안이 갑자기 멈추라고 소리쳤다.
그는 선지를 빼앗아 자세히 살펴보면서 물었다.
“이 대화는 어떻게 된 일이지? 다음은? 다음은 없어졌나?”
허신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거록에 후속 내용이 없는 건 아마 그 당시에 수정돼서 일 거예요. 음, 이 대화가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큰형을 바라보았다. 허신년이 보기에 이 대화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도를 닦아 장생하는 것에 대한 선황과 윗세대 인종 도사 사이의 대화였다.
도문 고수와 장생을 논하는 건 마치 대유와 경전을 논하는 것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허칠안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생각하였다. 그는 이 대화에서 생각의 물꼬를 터 연상을 펼쳤다.
자고로 천명을 받은 천자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었다. 도문의 장생법이 이 한계를 해결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는 이 말을 통해 선황은 몸에 기운을 더한 자가 장생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래 살 수는 있으나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라……. 전임 인종 도사가 말한 장생은 아마 장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다음 문구인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원경제가 간절히 바라는 장생이다. 일기화삼청은 삼자(三者)가 한 사람이야, 아니면 삼자가 세 사람이야……. 악, 이 말이 무슨 뜻이지? 선황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은 걸까 아니면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걸까?’
허칠안은 의구심을 품은 채, 아우에게 계속해서 읽으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의심스러운 단서는 없었다.
“신년아, 진도를 빨리 나가야 한다. 사흘 내로 큰형 대신 선황 기거록의 모든 내용을 기억해야 해. 한림원 사람이 네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지 않게 숨겨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라. 우리가 암암리에 몰래 조사한다는 걸 절대 폭로해서는 안 돼. 아니면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다.”
경찰의 직감에 기인하여 허칠안은 원경제가 도를 닦는 데 깊이 빠진 게 어쩌면 선황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사실 이 사건의 핵심 의문점은 단순했다. 황제가 장생할 수 없는 이상, 원경제는 왜 도를 닦으려고 하는가!
이 의혹을 풀면 모든 진상이 밝혀질 터였다.
원경제는 바보가 아니다. 품계를 초월하는 성인과 무사 1품인 선조와 무종조차 장생할 수 없는데 일정한 확신 없이 어떤 가능성만 보고 원경제가 수도(修道)에 깊이 빠질 리가 없었다.
“음.”
허신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서 말했다.
“최근에 제가 조당에서 한 가지 일을 들었는데 북방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데 형님 아세요?”
“북방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허칠안은 깜짝 놀랐다.
그날 그가 진북왕을 찢은 뒤, 길리지고가 중상을 입고 신수 승려가 아직 정면으로 들이받지 않은 틈을 타 일부러 초주성으로 쫓아가 3품 오랑캐를 관도 옆에서 베었더랬다.
목적은 북방 요족의 원기를 크게 훼손하고, 우두머리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되면, 오랑캐 각 부족이 새 우두머리 자리를 놓고 쟁탈하는 것만으로도 한바탕 혼란이 일 테니까.
북경 변방에서 더는 소란을 피울 수 없었다.
그리고 북방 오랑캐와 요족은 형제자매 사이니 북방 요족이 이 틈을 타 오랑캐를 잠식할 리는 없었다. 이렇게 되면 그저 내적 소모만 가중될 뿐이었다.
“무신교?!”
허칠안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무신교가 이 기회를 틈타 북방 요족, 오랑캐 영토를 공격하여 점거하려고 하나 봐요. 이건 우리 대봉한테 불리한 소식이지요.”
허신년이 말했다.
“전황이 어떠하대?”
허칠안이 물었다.
“구체적인 건 모르지만 요족과 오랑캐가 계속 후퇴하는 중이래요.”
허신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듣기로 군대를 통솔하는 무신교 대장군이 정국(靖國) 왕인 하후옥서(夏侯玉書)래요.”
‘이건 누구야…….’
허칠안은 몇 초간 어리둥절하다가 갑자기 산해관전역의 권종을 떠올렸다.
하후옥서는 정국의 국왕으로 20년 전 산해관전역 때 그가 정국 대군을 통솔하였다. 그는 3일 밤낮을 급습하여 결전을 앞두고 대봉의 군량 보급선을 차단하였다.
위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건 각측 연합군이 승리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때로 자칫하면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위연은 정국의 국왕에 대한 평가가 아주 높았다. 자신에 버금가는 지도력을 갖춘 인재라고 여겼는데 특히 총괄 능력과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하는 시야가 그러했다.
“엇, 위 공께서 추수 이후에 무신교를 칠 거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무신교가 북방 요족 및 오랑캐의 영토를 침범했으니 대봉에서 출병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나? 나는 위 공께서 이 지경까지 미리 내다볼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아. 그가 무신교를 치려는 건 틀림없이 다른 목적이 있는 거야.”
허칠안은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왠지 모르게 지금이 폭풍전야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
깊은 밤, 높이 뜬 둥근 달.
청량한 달빛이 무성한 수풀에 쏟아졌고, 밤새가 울창한 초목 사이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처량한 울음소리를 냈다.
푸른 연기 한 줄기가 달빛 아래에서 하늘하늘 피어오르더니 숲을 스치고, 산봉우리를 스치고 호수와 강을 스쳐 최종적으로 산굴에 도착하여 뚫고 들어갔다.
구불구불한 동굴 통로를 지나 한참 후, 푸른 연기는 동굴 속 산골짜기에 이르렀다. 청량한 달빛이 꼭대기에서 내리쬐어 동굴 속 산골짜기에 밝고 맑은 달꽃이 가득 피었다.
돌덩이를 겹겹이 쌓은 고대(高臺)는 그 위를 칭칭 감은 덩굴과 가득 핀 생화가 함께 ‘화대(花臺)’를 주조해냈다.
화대 위의 돌의자에는 새하얀 여우 털이 덥수룩하게 깔려 있었는데 당대 제일인 묘령의 여인이 나른하게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빙그레 웃으며 천산만수(千山滿水)를 지나쳐 돌아온 푸른 연기를 쳐다보았다.
푸른 연기는 흐릿한 형상의 여인으로 변하였다. 그녀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자태, 매력적인 기질이 엿보였으나 얼굴은 흐릿했다.
“주인님, 저 돌아왔어요.”
여인이 나긋나긋하게 예를 갖췄다.
“6년이라는 세월이 순식간에 흘렀구나. 잘했다. 당초 너를 경성으로 파견한 게 본래는 상백 밑의 봉인물 때문이었잖니.”
돌의자 위의 미인은 부드러우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녔다. 그녀가 다리를 구부리자 치맛자락이 흘러내리면서 흰 구렁이 같은 긴 두 다리가 드러났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가 보내온 서신을 보았다. 네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여 돌아오라고 재촉하지 않았지. 네게 반년이라는 시간을 더 용인하여 속세의 정분을 끊으라고 했거늘 지금 경성 쪽에 아직도 걱정거리가 있니?”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돌의자 위의 여인은 사람의 정신을 쏙 빼는 매혹적인 여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웃으며 말했다.
“쯧쯧쯧, 부향 낭자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다니 정말 굉장하구나. 너, 네 이름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야희(夜姬)야.”
“야희가 감히요. 부향은 죄신(罪臣)의 여인으로 6백 년 전에 이미 병으로 죽었습니다. 야희는 그저 그녀의 육신을 이용하여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야희는 평생 주인님에게 충성을 다할 겁니다.”
“만약 어느 날 내가 너에게 허칠안을 죽이라고 하면?”
돌의자 위의 여인이 교활한 표정을 지었는데 어조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 여인은 온몸을 떨더니 사뿐하게 무릎을 꿇고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더는 주인님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야희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인님께서 사약을 내려주세요.”
돌의자 위의 여인이 몸을 곧게 펴고 앉아 깔깔깔 웃으며 말했다.
“까불기는. 내가 너를 죽일 리 없다는 걸 넌 아주 잘 알고 있지. 내가 허칠안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줄곧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니? 너희 아홉 자매를 구주 각지에 흩어지게 한 날, 내가 말한 적 있었지. 만약 너희가 한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내 미래의 남편이자 만요국의 국왕이라고. 너 말고 또 다른 계집애 역시 그에게 사랑에 빠졌더구나.”
야희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놀랍고 기쁘면서도 질투 섞인 마음으로 말했다.
“누, 누구예요?”
만요국의 공주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농염하고 아름답게 웃었다. 그녀는 야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말했다.
“너 당분간 이곳에서 수양하거라. 내가 너에게 육신을 다시 만들어 줄 테니. 다음에 네게 시킬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고 있다.”
* * *
이른 아침, 천기와 천추는 부사 밀정들을 이끌고 말을 탄 뒤 서쪽 교외 백봉산(白鳳山)으로 향했다.
거대한 패방에는 ‘청룡사’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구불구불한 돌계단은 수풀 깊은 곳까지 이어져 산꼭대기에 있는 웅장한 사찰까지 뻗었다.
천기와 천주는 말을 관리하는 몇 사람만 남긴 뒤 계단을 올라 사찰로 들어갔다.
천자호 밀정 두 사람은 제자의 통전을 얻은 뒤 청룡사 주지인 반수 승려를 만났다.
자비롭고 인자한 얼굴의 늙은 승려는 가슴까지 흰 수염이 늘어져 있었다. 그는 참선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환한 얼굴로 말했다.
“두 대인께서 무슨 일로 제 절에 광림하셨습니까.”
천기는 품에서 접힌 초상화를 한 부 꺼내어 펼치더니 말했다.
“반수 주지께서는 이 사람을 아시는지요?”
초상화 속의 승려는 사각형 얼굴에 눈썹이 짙고 눈이 크며 이목구비가 거칠었다. 바로 항원 승려였다.
“아미타불.”
반수 승려는 양손을 합장하더니 말했다.
“그는 항원으로 빈승의 제자입니다.”
천기와 천추는 서로 눈을 마주쳤고,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천기는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고 반수 승려를 주시했다.
“이 자는 절에 있습니까?”
반수 승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자는 절을 떠난 지 이미 두 해가 넘었습니다. 그해 빈승의 다른 제자 항혜가 실종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항원이 그때부터 산을 내려가 찾아다니더니 다시는 절로 돌아오지 않았지요. 이 일은 사찰에 있는 제자 누구라도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대인께서 믿지 못하겠다면 물어보면 아실 겁니다.”
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주지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주시지요.”
천기와 천추는 사찰에 있는 제자들에게 묻고 일치된 답을 얻은 뒤 사찰을 나섰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산하는 돌계단을 걸었다.
천기가 천천히 말했다.
“이년 여 전에 청룡사의 항혜와 평양군주가 몰래 달아났다가 양당에 의해 암살됐군. 후에 허칠안이 상백 사건을 추적 조사하다가 이 케케묵은 지난 일을 밝혀낸 거고.”
천추가 ‘음’하고 소리를 냈다.
“절에 있는 승려가 말하길 항원이 절의 승려들과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아 하산한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지. 그는 이미 경성을 떠났을 가능성이 농후하군.”
천기가 잠시 침음하더니 말했다.
“사찰에 있는 승려가 말하길 이 자는 오지랖이 넓다고 했잖나. 그렇다면 그가 경성에 있던 2년 동안 흔적을 남겼을 테고, 그를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게야. 외성으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자고. 부주의하게 굴었다가 상대방이 알아채게 하면 안 된다는 점 명심하고.”